집 고양이 노랑이 14

숨겨진 야생을 느끼다.

by 강현숙


“이보게 처음부터 집 고양이는 없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위의 할아버지까지 올라가면 처음에는 모두들 길고양이였네, 자연을 누비며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가 있었지, 우리는 방파제 구멍에 살아도 또 풀밭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도 언제나 당당할 수 있네, 왠지 아는가? 우리 조상들의 본능을 충실히 이어받아 변질되지 않은 유전자를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일세, 그까짓 부드럽고 달콤한 음식이 아니면 어떤가? 폭신한 잠자리가 아니면 또 어떤가? 배부른 돼지를 꿈꾸지 않고 배고프지만 조상들의 정신을 온전히 갖춘 고양이로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말일세, 아직도 그 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쥐구멍을 뺏으려 생각하는 자네가 한심스럽네, 그곳에서 기회를 보다가 또 다시 사람들의 적선을 받아 살겠다는 자네의 속셈이 혐오스럽단 말일세,”

“.....”

“우리에게 고양이 말고는 믿을 만한 족속이 없다는 것을 자네는 아직 모르는구먼, 우리 엄마가 사람들을 믿었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네, 자네 또한 지금의 처지가 된 것이 자네의 주인을 믿어서 생긴 일 아닌가? 달콤한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에 발톱과 본능을 감추고 살았지? 이젠 자신의 정체성 마저 잃어버리고 원래부터 집고양이였다고 우기고 있으니 말일세"

"....."

"내 주변 고양이들 중에도 사람들에게 길 들여져 사냥법도 다 잃어버린 다음에 버려진 고양이가 한둘이 아닐세, 좋을 때는 이쁘다 이쁘다 하다가 어느 순간 가차 없이 내다 버리거나 갓 태어난 꼬물이들을 방파제에 버려서 파도가 휩쓸어 가도록 하는 것이 사람들이란 말일세, 자네를 이뻐했다던 그 사람도 자네들을 창고에 가두어두고 가버리지 않았던가? 우리의 야생성을 모두 꺾어버리고도 어떤 이유가 생기면 헌신짝 버리듯 버려지는 게 집고양이들의 운명이란 말일세"


돌아보니 구구절절이 재떨이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는 재떨이는 이전에 알던 지저분하고 버릇없는 고양이가 아니었다. 소신을 갖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집고양이였다가 버려져 야생의 삶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고양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함께 지내는 몇몇 고양이는 이제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지 않네, 수만 년 전의 본능대로 세상을 누비며 사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알아버렸다는 말이지, 우리 세계에서는 내 아버지처럼 사람들 눈치 보느라 아직 어린 자식을 버리는 일은 없네, 나 역시도 장가를 들어 자식을 낳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랑하며 키울 것이네, 그리고 단 하루를 살아도 능력껏 자유롭게 살라고 가르칠 것이네”

재떨이가 저리도 자존감이 높은 고양이 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깜순이를 두고 결투를 할 때 재떨이를 응원하던 많은 길고양이들이 생각났다. 진심으로 재떨이가 이기기를 바라며 큰소리로 응원하던 그들은 이미 재떨이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지금도 재떨이가 사는 방파제 주변에 모여 살면서 서로 돕고 있다. 그런데 내 주변에는 나를 도와줄 고양이가 없다. 가까이 지냈던 옆집 얼룩이도 자신들의 삶이 위태로워질까 봐 밥 한 끼 나누어주지 않았다. 전 주인에게 사랑받고 살 때 내가 족보 있는 고양이어서 누리는 것이라고 주변을 무시한 때문임을 알 것 같다. 고양이의 족보를 만든 것도 사람들이고 자유롭게 떠돌며 사는 고양이들에게 길고양이라는 이름을 봍여준것도 사람들이다. 나는, 우리는 그냥 고양이일 뿐인데 말이다. 재떨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내속에 잠재된 야생성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푸른 하늘아래 푸른 바다가 펼쳐진 자연을 누비며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재떨이는 시내 거울가게에서 본 잿빛털의 고양이가 제 아버지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고 했다. 죽어나가는 아내와 자식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 남은 자식마저도 모른 체하고, 어느 사람의 품에서 먹고살기 위해 발톱을 숨기고 있을 샌님 같은 아버지가 거울 속에 비친 거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거칠지만 당당하게, 남들이 무어라 해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아양을 떨고 얻어먹느니 차라리 한 끼 굶을 용기가 있는 길고양이로 사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그런 재떨이가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본능을 지키며 살자고, 어쩌면 제2의 인생을 고양이답게 살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재떨이와 헤어져 깜순이가 기다리는 풀숲으로 가는 길이었다. 뒷골목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저절로 큰 마당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갑자기 빼빼가 몽둥이를 들고 쫓아왔다.

“이놈! 너 내 눈에 띄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여기가 어디라고 기웃거려?”

“크아!” 나는 이를 드러내고 노려보았다. 빼빼는 순간 멈칫했다. 저 바보 같은 주인에게 얻어먹고 살려고 쥐를 잡고 뱀을 잡던 일이 생각났다. 그렇게 공을 들여도 내 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빼빼 와 펑퍼짐이 미웠다. 잘 보이려 노력했던 나 자신은 더욱 미웠다. 나는 서서히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본능이 살아남을 느꼈다.

깜순이는 개구리 두 마리를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노랑이님 시장하시죠? 오늘 저녁은 개구리 반찬이에요.”

깜순이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씩씩한 얼굴로 개구리 밥상을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개구리를 어떻게 잡았을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곱게만 자란 고양이인줄 알았는데, 저 씩씩한 얼굴은 또 뭐지?

“어찌 된 거야? 이거 직접 잡은 거야?”

“그럼요. 노랑이님 우리 아버지가 사냥대회에서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으셨다는 거 아시죠? 제가 이래 봬도 아버지의 딸이거든요. 개구리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예요. 이제 나도 끼니 정도는 해결하며 노랑이님 도와드릴게요

웃는 깜순이가 애처로웠다. 주인들이 챙겨주는 부드럽고 달달한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살게 해 준다고 데려왔는데 이제 사냥까지 하며 나를 돕겠다니 고맙고 미안했다. 나는 깜순이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는 이런 거 하지 마 내가 당신을 책임지고 우리에게 아기가 생기면 아기들까지도 책임지는 든든한 아버지가 될게, 미안해, 사랑해, 야옹!”

“아니에요. 노랑이님! 저는 아버지에게서 혼자 사는 법을 배웠어요. 살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비상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여자도 사냥법을 배워야 한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아버지에게 배운 삶의 지혜를 지금 발휘할 때가 된 거예요. 노랑이님이 더 나은 삶을 이루려고 노력하는데 제가 작은 힘이라도 되어야지요. 어떻게든 도와 드릴게요. 같이 지금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요."

우리는 서로 의지해 체온을 유지하면서 잠이 들었다.

새벽바람이 눅눅해서 잠이 깨었다. 후둑, 후둑, 풀숲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은 이곳 풀 섶에서 머물 수가 없다. 이 비를 맞고 있다가는 폐렴에 걸려서 죽을지도 모른다. 깜순이를 깨워서 얼룩이네 집으로 피신을 했다. 얼룩이 부부는 어느새 아기를 가져서 나비의 배가 불룩해 있었다. 곧 부모가 된다고 들떠있는 얼룩이 부부가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기도가 입안을 맴돌았다. -제발 그 행복이 영원하기를...- 사람들이 고양이 식구가 늘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 것 같았다. 첫아기를 가진 얼룩이 부부에게예외였으면 좋겠다는 의젓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빗소리가 조용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룩이 집을 나왔다. 비는 멈추었지만 땅이 모두 젖어있어서 마땅히 앉을 곳도 없었다. 처마 아래서 머뭇거리던 나는 용기를 내어 깜순에게 말했다.

“우리 방파제로 가자. 그곳에 가면 우리가 비를 피할 곳이 있을지도 몰라. 재떨이가 도와준다고 했어”

“그곳에 가면 주인들의 마음을 돌리는 일은 영원히 힘들 거예요. 어쩌면 재떨이 님처럼 길고양이니, 도둑고양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평생 살게 될지도 몰라요. 저는 괜찮지만 노랑이님은 그런 삶 견디기 힘들지 않겠어요? 앞으로는 전 주인아저씨의 사랑받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각오가 서면 가요. 전 이미 야생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어요.”

깜순이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거친 삶도 견딜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깜순이 앞에 걱정이나 하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 이제 나도 새로운 삶을 향해 용기를 낼 차례이다.

우리는 재떨이가 사는 방파제로 갔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눅눅한 집을 나와 바람을 쐬고 있는 길고양이들이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비록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기꺼이 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이봐 재떨이 있는가? 야옹!”

내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깜순이는 울지 않았다.

스스로 살아내야 하는 야생의 삶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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