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여름방학 끝나고 수학여행간대 차비가 2천원 이라는데 내일 까지 돈을 내야 갈수있대"
당시 보리쌀 한말(4키로그램)이 500 원이었다. 보리쌀 가격을 기억하는 것은 보리쌀 한말을 사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말값인 500 원짜리 동전을 받아 주머니에넣고 집을 나섰다가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학교운동장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다.
저녁시간이 빠듯한 시점에서 보리쌀을 사러 쌀집으로 달려갔지만 동전은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찾을수가 없었다. 학교 까지 오던길을 뒤돌아 그네 밑에까지 두눈을 크게 뜨고 찾았지만 끝내 찾을수가 없었다.
몇일은 9식구가 근근히 배고픔을 면할수 있는 보리쌀 1말값을 잃어버렸으니 혼나는것은 당연한것이었으리라. 놀다가 잃어버린 9식구의 밥값! 13살 아이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수 없는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시절에 2천원을 내야 갈수있는 3박4일의 수학여행 비용은 9식구가 보름은 먹고 살수있는 금액이었다. 엄마는 그돈을 딸의 여행경비로 내어 줄 형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중학교 3학년이던 오빠의 수학여행과도 맞물려 있었다.
"너두 중핵교 가먼 보내 줄틴게 이번에는 못간다구 허자. 알었지?"
지키지도 못할 중학교 이후의 약속을 남발하던 부모의 거짓말이 9식구 끼니를 지키려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어찌 알수 있었으랴. 그저 매사 돈때문에 안된다고 하는 부모가 많이 서운했었다. 그럼에도 왠지 더 보채면 안될것같은 생각에 현숙이는 울지도 못하고 수학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오빠가 잘되야, 아들이 잘되야, 집안이 잘되는거라며 먹는것도 오빠 먼저, 옷도 신발도 오빠먼저, 그리고 남동생것을 사고, 또다른 동생들것을 사고 난 다음에 다시 벌어서 사준다며 매번 양보하라는 말만 되풀이 들었던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떠 오른다. 오빠에게, 동생들에게 모든걸 양보해야 했던 현숙이는 나는 큰딸이니까, 큰언니, 큰누나니까, 중얼거리며 포기했던 수학여행을 그후 50년이 지나도록 가지 못했다. 수시로 떠나고 싶을때는 언제든 어디든 갈수있는 형편이 된 지금도 국민학교 시절에 건너뛴 그 수학여행에 대한 아쉬움이 씻어지지가 않는다.
누군가 잠시, 딱 한번, 내 삶을 가고 싶은곳으로 보내준다고 한다면, 그 시절로 데려다 달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엄마를 보채서라도 수학여행을 떠나 볼 것이다. 큰딸이라고 양보하며 살았던 어린시절의 현숙이 덕분에 부모의 경제사정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알수없지만 내일을 걱정하며 오늘의 삶을 양보하는 성격의 소유자는 되지 않았을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ㅡ나 돌아갈래~~ㅡ 라고 절규하던 영화의 한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