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친구를 찾습니다

보고 싶다 친구야!

by 강현숙

내겐 정말 잊지 못할 친구가 있다.

친구의 성은 김이고, 이름은 명례이다. 처음 자기 이름을 소개할 때 '명래'라고 부를 것을 염려하여 "명례할때 '례'자는 예도 할 때 '례'자야"라고 소개했었다.

21살 시절에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서울 동대문 수도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다.

그때는 나나 그 친구나 어려운 건 비슷했지만 먹고사는 환경에서는 친구가 훨씬 나았다.


학원에 가기 전 나는 버스회사에서 힘들게 일하며 속옷하나 제대로 사 입지 않고 월급의 90프로를 적금을 넣어 돈을 모으고 있었다. 바로바로 목돈을 만지고 싶은 마음에 길게도 못 들고 1년짜리를 들었었는데 만기도 되지 않았을 시점에 시골집에 필요 부분을 충당하기 위해서 여러 번 중도 해지를 해야 했다. 20살에도 만기가 다가오는 적금을 해약해 시골 아버지 집을 사드리고 나니 나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돈이 좀 모아질만 하면 시골집에선 쓸 일이 생기곤 하여 제대로 목돈을 만들지 못하니 돈 버는 일에 회의감이 밀려왔다. 열심히 모아서 나를 위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나의 미래를 위해서 쓰고 싶었는데, 자꾸만 부모와 형제를 위한 일로 쓰이게 되는 상황이었다. 돈 버는 행위가 재미있지 않았다. 벌지 않으면 집에서도 달라고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큰마음먹고 나를 위한 공부를 하고자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기로 했던 것이다.


이미 적금으로 들었던 돈을 통장까지 모두 시골집에 주고 나니 내수중에는 그만 두기 마지막 달에 받았던 월급과 퇴직금으로 받은 십몇만 원이 다였다. 그 당시에는 그 돈으로 학원비와 교통비만 쓴다면 일 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고픔도 감수하리라고 마음먹고 시작한 공부여서 공부에 필요한 돈이 아니면 지출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는 것은 언감생심 내 사전에는 없었다. 밥값도 아까워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내 상황을 눈치챈 친구는 도시락을 싸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조림이나 특별한 반찬이 있어서 많이 가져왔다며 같이 먹자고 하였다. 그렇게 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 끼니를 챙겨 주었었다.


친구는 작은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자신의 고모집에 기거하며, 고모 일을 도와가며, 고모의 보살핌을 받고 있어서 먹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중학교 검정고시를 본 후에 나는 다시 일하러 버스회사에 취직을 했고 친구는 그대로 고모집에 머물며 고등학교 검정고시까지 마쳤다.


몇 년 후 나도 결혼을 했고, 친구도 결혼을 하여, 나는 양천구 신월동에 살았고, 친구는 송파구 문정동에 살면서 한동안 왕래를 하였다. 그러다 서산에서 차린 가게가 잘 안되고 또 다단계*웨이를 하면서 금전적으로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지던 그때, 대전에서 오빠가 마련해준 야채가게를 하기 위해 조치원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 어려운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연락하지 않은 것이 친구와 헤어지게 된 이유가 되었다. 서산에서 식당을 할 때 목돈을 빌려준 친구도 이 친구였다. 몇 년 후 경제적인 곤란함을 만 회한 후에, 친구에게 좋은 모습 보일 수 있겠다 싶어서 찾으려 하니 친구는 이미 문정동을 떠난 상태였고 전화번호도 바뀌어서 지금까지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이다.


내가 정말 어려울 때 조건 없이 날 챙겨주었던 친구였기에 이제 라도 잘살고 있는 모습을 가장 보여주고 싶은 친구인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우리 속담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말이 있다. 머리 검은 짐승이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고 사람들은 어려울 때 도움받은 은인에게 은혜를 갚기보다는 자신이 노력하고 잘나서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머리 검은 짐승이 된 것 같아 부끄럽다. 친구가 바란 것은 내가 잘 사는 것뿐이었는데, 내가 어렵다고 모른 체할 친구는 아니었는데, 마치 내가 친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아 너무 미안한 마음이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착해서 어디서든 잘살고 있을 내 친구 '김명례' 지금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말하고 싶다.



명례야! 너무 보고 싶다.
난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다. 특히 네가 챙겨주었던 그 시절의 도시락은 나를 살린 생명의 밥이었기에 지금도 식사 때마다 그때의 도시락을 기억한단다. 내가 열심히 살았던 것도 어쩌면 네가 베풀어준 우정에 보답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정말 어려워졌을 때 네가 내 모습 보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또한 너에게 더 이상 신세 지고 싶지 않았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지금껏 널 볼 수 없이 되었구나.
명례야! 나 현숙이는 네 덕분에 이렇게 잘살고 있단다. 어디서든 내 소식 들리거든 연락 좀 주라.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45살의 대학 새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