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난해도 '부유함'이란 걸 본 적이 없으니 그것이 가난인 줄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중학교를 못 가고, 지금 아이들은 있는 쌀로 밥도 못해먹을 나이에 돈 벌겠다고 공장에 가서 일하며 살았던 내게 웬만한 어려움 정도는 어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 내게도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절이 있었으니,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뛰어들었던 첫 사업의 실패와, 허황된 꿈을 꾸며 시작한 다단계의 실패였다.
이른 결혼으로 서른 살 이전에 두 아이를 출산한 나는 아이들 키우면서 직장을 다니기에는 시간적으로 곤란한 점이 많았다. 서른다섯 살까지는 집에서 하는 부업이나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았다.
서른다섯이 되었을 때 친정엄마는 시골에 식당을 하고 계셨는데 몸이 힘들어서 그만 하고 싶다며 가게를 내놓은 상태였다. 당시에 나는 인천에 살고 있었으므로 엄마의 가게가 있는 서산까지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청정지역에 위치한 엄마의 가게를 여름휴가철에 놀러 가지만 않았어도 아마도 내게 실패의 경험은 없었을 것이다.
여름, 그것도 주말에 찾아간 엄마의 가게는 정신이 없었다. 예약 손님과 일반 손님들, 그리고 민박 손님까지 꽉 차 있었다. 1박 2일을 엄마를 도와주고 일요일 차비하라고 주는 돈을 받으며 얼마나 벌었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이틀간의 매출과 대략의 원가를 계산하며 얼마 정도는 벌은 것 같다고 하셨다. 그 얼마가 내가 한 달을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보다 더 많았다.
그 정도면 아이들과 떨어져서 몇 년 고생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음식은 솜씨 좋은 엄마가 주방을 맡아해 주시겠다고 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적금을 해약하고 친구에게 목돈을 빌려서 가게를 인수했다.
처음 한 달간은 '안되면 어쩌지'라는 어떠한 두려움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그런데 우리나라 계곡이나 기타 유원지 특수는 딱 한 달에서 길면 한 달 반 정도이다. 그런 복병이 있을 줄은 미리 계산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8월 둘째 주가 지나니 계곡은 북적이던 사람들을 큰 물이 쓸고 내려가기라도 한 듯이 텅텅 비어 찾아오는 사람들 이 거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친정엄마는 아버지가 하는 가을겆이를 도와야 한다며 밭으로 가셔서 주방도 내가 맡아야 했다. 월급 주는 사람을 둘이나 두고 마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나는 명함을 들고 면사무소로, 파출소로, 농협으로, 찾아다녔다.
마침 그때 서해안 고속도로가 한창 건설되는 중이어서 외부에서 들어온 건설업체 인력들이 대거 들어와 있었다. 그분들은 지역의 기관장님들과 친분을 맺고 있었고 기관장님들은 친정아버지와 안면이 있었다.
게다가 나는 한 미모(ㅎㅎ)를 하는,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젊은 여자였다.(당시에 남편과 종종 갈등의 소지를 준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연줄연줄로 인사를 트고 나니 이분들은 이왕이면 '송산 가든'(당시에 내가 했던 가게의 이름)을 이용하자 하시며 인부들의 식사는 물론이고 자주 있는 회식을 우리 집으로 밀어주었다. 계곡 내에 즐비한 식당들이 두어 집 빼고는 비수기인 겨울철에도 우리 집은 장사가 되었고 수입이 되었다.
그러나 '花無 十日紅'이라고 했다.
2년도 안되어서 도로공사는 끝이 났다. 그분들이 빠져나가고 나니 수입이 터무니없이 줄어 버렸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매출을 늘릴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여름 한철 장사로 버티기에는 정말 힘겨운 시간을 2년을 더 버텼다.
그때 찾아온 다단계, *웨이의 유혹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웨이라는 단어조차 처음 듣는 나에게 '다이아몬드(*웨이 레벨의 한 종류)가 되면 일정 소득이 내 통장으로 매달 들어오고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들에게 상속까지 된다'는 말에 무조건 가게를 정리하고 *웨이를 했다.
*웨이도 내가 하면 될 것 같았다. 구정물에 설거지하며 손님들 비위 맞추면서도 살았는데 그까짓 좋은 물건 함께 쓰자는 그런 일을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2년 동안을, 연락을 끊고 살았던 친구는 물론이고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찾아가 *웨이를 했다.
엄마가 돈 번다고 할머니 손에 맡겼던 아이들에게 돈으로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그냥 가게만 정리했으면, 인천에서 작은 분식집이라도 했으면,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2년쯤 지나고 나니 가게를 정리한 돈은 모두 바닥이 났고, 은행 마이너스 통장은 한도까지 대출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나의 *웨이 레벨은 전혀 오르지를 않았다.
식구들 볼 면목이 없었다.
집안 말아먹었다고 심한 소리 하는 남편의 말들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어느 날 홍성을 지나다 내게 *웨이를 알려줬던 그 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올라갔다.
10층 높이였다. 이 정도면 한 번에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물만 흘리는데 갑자기 개가 짖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만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었다.
죽겠다고 맘먹고 와서 기껏 보이지도 않는 개 짖는 소리에 놀라 주저앉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울다가 내려왔다. 죽을 마음으로 다시 살아보자는 착한 생각이 어떻게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그렇게 살아서 왔다. 그리고 난 기어이 살아서 그 몇 배를 벌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때 힘든 내 사정을 알게 된 친정 오빠가 도매시장 한 귀퉁이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야채를 팔았다.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정직하게 좋은 물건으로 손님들을 대하니 어느 순간 식당을 하시는 사장님들이 단골을 맺어 주셨다. 일수처럼 은행에 꼬박꼬박 넣은 푼돈은 빚을 다 갚고도 목돈으로 내 통장을 지키고 있었다.
쓴맛을 경험했던 시간이 벌써 20년이 흘렀다.
아이들은 다 커서 제 앞가림들을 하고 있다.
중간에 질병으로 장사를 접었던 나는, 10여 년 쉬는 동안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안정을 누리고 있었는데 다시 찾아온 인연으로, 또다시 도매시장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