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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묵고 차 마시고 자고

얌전한 건 내 몫이 아니지

by 강현숙

지난 토요일 완도에 가는 길에 남편이 장성에 들러서 평소 가까이 지내는 스님과 점심을 먹고 가자고 하였다. 그 스님은 나도 잘 아는 분이어서 점심 한 끼 정도는 불편한 마음 없이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아 흔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스님은 종교의 영향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육식은 전혀 드시지 못하는 체질이셔서 스님과 식사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엇을 드시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그날은 전날에 남편이 스님의 심부름을 하였고 그 보답으로 스님께서 밥 한 끼 사신다는 것인 데다, 스님이 거주하시는 장성 주변의 식당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하기도 하며, 또 스님이 어떤 것을 드실지도 몰라서 스님께 장소를 정하시라고 하였다. 스님은 남편의 식성도 고려하심인지 야채와 생선, 그리고 육류까지 골고루 차려지는 한정식 집에 예약을 하셨다.


한정식집의 특성상 고즈넉한 분위기에 고급스러운 상차림과 종업원의 매너 있는 서빙이 일단 손님으로 간 분들에게 일반 음식점에서의 태도와는 다른 점잖은 태도를 요구하는 듯하다. 스님이 정하신 그곳도 입구부터 내게 조선시대의 잘 배운 처자의 자세를 요구했다.

나의 발걸음은 사뿐사뿐하였고 대갓집 별채 같은 분위기에 어울리는 후덕한 미소를 짓게 하였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얌전 모드로 일관하도록 했다.

스님은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으셔서 평소에도 언제나 조심스러웠는데 그날은 더더구나 스님이 사주신다는 식사시간이고 보니 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얌전함'은 다 동원된듯하였다.


식사하는 내내 이야기를 주도하시고 스님이 드시지 않는 고기 종류는 우리 앞으로 옮겨 주시며 많이 먹도록 권유하셨다. 편하게 해 주시려고 애써 주시는 모습이 보였음에도 난 스님이 어려워 음식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씹으려 하였고 젓가락도 내 앞에 있는 음식까지 밖에 갈 수가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셔도 미소만 지올 정도로 조신한 태도로 응대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내 모습이 아니었는데' 싶어 속으로는 웃기도 하였다.


식사 시간이 끝 나갈 즈음 저쪽에 남아있는 음식들이 자꾸만 눈길을 끈다. 팔을 뻗을 수가 없어 쳐다만 보고 있던 고급 음식들이다. 스님이 맛있게 드시던 음식들도 조금씩 다 남아있는 상태다. 싸가지고 가면 두 끼는 해결될 것 같았지만 고상한 사람이 하는 행동은 아닌 듯하여 싸 달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나는 집에서든 음식점에서든 음식을 남기는 성격이 아니다. 거창하게 애국심? 그런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식이 버려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으로 평생 다이어트에 성공하지 못한 원인 중의 하나 이기도 하다. 그런 내가 그때, 남아있던 그 비싼 고급 음식들을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워하고 있는 그 순간에 마무리로 스님께서 한마디 하신다."보살님! 식사를 잘하실 줄 알았는데 오늘 음식이 별로 였나요? 많이 못 드시네요?" 이때라도 "아니요 스님 좀 더 먹을게요"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남편마저도 수저를 놓은 상태인데 더 먹겠다는 것도 웃기는 상황이 될 것 같아 "아! 네 스님 많이 먹었어요, 음식들이 깔끔하고 맛있네요" 하고 말았다. 더 이상 아까운 음식들을 어찌해볼 여지가 사라지고 말았다.


한술 더 떠서 화장실에 가려고 가방을 챙기는데 안쪽에 앉아계신 스님이 "보살님 오늘은 내가 살 거니까 계산하지 말아요" 하신다. 이때에도 '저 화장실 가려고요' 그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계산하려는 거 아니에요' 그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은 "아니에요 스님 이렇게 맛있고 이쁜 집 알려 주셨으니까 계산은 제가 할게요"라는 말이었다. 분위기에 취한 건지 나답지 않게 어디서 저렇게 고상한 말들이 튀어나온 것일까? 그렇게 먼저 일어난 나는 계산대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고 담담한 척 카드를 내었다. 남편이 마신 막걸리 한 병 값을 포함한 금액은 155,000원이었다. 평소 우리가 잘 먹는다 해도 일주일 이상의 식사값이었다.


그날 쓴 돈이 아까운 것은 아니다. 항상 존경하는 스님께는 시주하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사드릴 수 있다. 다만 얌전 떨다가 남긴 음식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릴 정도다. 더욱 황당한 것은 식사를 마치고 스님 거처로 이동하여 직접 끓여주시는 차를 마시는 시간에 벌써 나는 배가 고파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날 스님과 헤어지고 완도로 가면서 남편이 한마디 했다. "오늘 당신이 딴 사람 같았어, 평소에도 나한테 오늘처럼만 해봐" 스님 앞에서 남편에게도 조용한 목소리로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던 것을 말하는 듯한데 그건 칭찬이 아니라 비웃음이었다. 평상시에 거칠고 목소리 큰 것을 힘들어했던 남편이다. 안 그래도 시장기가 살짝 돌면서 남기고 온 음식들이 아까워 짜증이 스멀대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두 시간이 안되어 도착한 완도에 내리자마자 라면부터 끓였다. 남편은 벌써 라면을 어떻게 먹냐며 쳐다보지도 않는다. 남편 몫까지 두 개를 끓였다가 버릴 수가 없어서 다 먹었다. 배가 거북 살스럽게 불렀다. 그래도 난 그 순간이 좋았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먹는 소박한 라면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릇을 정리하고 부른 배가 감당이 안되어 누웠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시간이었다.

남편은 한마디 또 한다. "그러면 그렇지 당신한텐 지금 그 모습이 어울려"


한정식집 입구, 작은 마을 가운데 옛날 가옥을 식당으로 개조하였다.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항아리들이 고풍스러운 풍경을 자아낸다.
전통시대의 별당아씨가 머물렀을듯한 작은 연못
다육이들도 고택과 어우러지니 더 이뻐 보인다.
이곳의 상차림, 이런 상차림이 종류만 바뀌어 가며 세 번이 더 들어왔다.
디저트도 격조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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