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와 백구두 신사
부자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옛날에, (옛날이라고는 했지만 아마도 백구두가 등장을 하니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어떤 마을에 열심히 농사를 짓고 많은 양을 키우며 바쁘게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집에 작은 단칸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는 건달 같은 남자가 있었다.
양치기 남자는 일에 치여 재산이 많아도 시간이 없어서 장가를 가지 못하였고, 좋은 옷 입고 갈 곳이 없어서 날마다 작업복만 입고 살았으며, 맛있는 거 해 먹으려 해도 돈이 아까워서 고기 한번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반면 단칸방 남자는 자신의 인생을 즐기느라 장가를 가지 못하였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면 새 옷을 갈아입고 백구두를 반짝반짝 닦아 신고서 어딘가로 외출을 했다가 저녁이면 기분 좋게 돌아와 잠만 자는 것이었다. 어딜 가서 무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얼굴도 반들반들한 것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사는 행색도 아니었다. 어느 날은 양치기 집의 양을 한 마리 사서 친구들을 불러 하루 종일 먹고 마시는 날도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심한 고생 한번 없이 깔끔하게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사는 그 남자가 양치기 남자는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양치기 남자의 하루는 해뜨기 전부터 시작되어 밤이 되어야 끝이 났고 그 일은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그나마 열심히 일한 대가로 마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옆집 남자를 보던 날부터 자신이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의문이 생겼다.
옆집 백구두 남자가 자신의 양을 사다가 삶아놓고는 친구들을 불러 흥청망청 밤새 먹고 놀던 그 모습이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 질 않던 어느 날, 남자는 '나도 양고기 한번 먹어보자'며 양을 한 마리 잡았다.
그러나 평소에 누구와 나누어 먹거나 해본 적이 없는 양치기 남자는 부를 사람도 없어서 혼자 배가 터지도록 양고기를 실컷 먹고 그날 밤 소화를 시키지 못해 죽어버리고 말았다.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대왕에게 불려 간 남자는 집에 두고 온 많은 재산들을 생각하면서 돌려보내 달라고 하였다. "염라대왕님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평생에 고기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일만 하고 살다가 그 많은 양 중에서 겨우 한 마리 잡아먹었는데 소화도 되기 전에 절 여기로 데려 오면 어쩝니까? 옆집 남자는 맨날 놀면서도 깨끗한 옷 입고 하얀 백구두 신고 양고기 잡아 파티하며 살아도 내버려 두면서 나는 내양 한 마리 잡아먹었다고 이러면 안 되지요?" 하고 따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염라대왕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대답을 하였다.
"이놈아 네가 옆집의 그놈처럼 일도 안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멋 부리고 놀러나 다니는 놈 같으면 너한테 그 많은 재산을 맡겼겠느냐? 네가 안 먹고 안 쓰고 부지런해서 재산을 맡겨 놓았더니 겁도 없이 양을 잡아먹어? 그래서 어디 너한테 그 많은 땅이랑 양들을 믿고 맡기겠느냐? 그러니 넌 이제 이곳에 있거라" 하면서 보내주지 않았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부자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다고 믿기도 한다. 또한 부모 잘 만나서, 물려받은 것이 많아서 부유하게 산다고 쉽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자들의 에피소드를 들어 보면 부자가 그냥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해장국 한 그릇이면 충분하다고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과 단골 해장국집을 다녔다는 어느 회장님의 이야기와 그 회장님의 아들이 고급 음식점에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에 "그놈은 아비를 잘 만나서 그렇게 돈을 쓸 수 있지만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만났으니 해장국 한 그릇도 충분하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빈주먹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거 다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충분히 자면서 부를 일구어낸 사람은 없다.
위에 이야기에서 보듯이 하늘은 돈 쓸 시간이 없을 만큼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에게 돈을 맡긴다는 것이 맞는 말 같다.
부부간에도 돈에 대해서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만난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어느 가정이든 부부가 함께 자린고비처럼 사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고, 또한 둘 다 흥청망청한 경우도 본 기억이 없다. 한 사람이 열심히 벌어서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하면 한 사람은 소비의 주체가 된다.
우리 집 경우를 또 이야기해보면, 나는 '굳은 땅에 물 고이는 법'이라는 주의이고 남편은 '채워진 그릇은 비워야 또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작은 불편함은 감수하며 지출을 줄여서 모은 돈으로 큰 것에 투자하자고 하는데 남편은 작은 것들을 먼저 챙긴다. 심지어 화장실 슬리퍼나 주방용품까지도 남편이 챙긴다. 지인들에게 제철인 산물들을 수시로 선물하는 것도 남편이다. 그릇이 없어서 밥을 못해먹는 상황도 아니고 슬리퍼가 없어서 맨발로 화장실을 가는 것도 아닌데 항상 새것을 좋아하고 여분이 있어야 편안해한다. "그거 얼마 안 해" 그러면서.... 나는 그렇게 남아돌아서 쓰이지 않는 물건들이 아깝고 거치적거리는데 말이다. 선물하는 것도 그렇다. 명절이나 생일처럼 이름 있는 날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 부부 중 한 사람은 양치기 남자이고 한 사람은 백구두 신사가 분명하다.
우리 남편은 가끔씩 자기가 전생에 천상의 공주였다고 하는데 하는 것 보면 힘쓰는 일 말고는 정말 여성스럽다. 그럼 나는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마도 나라를 다스리다 망해먹은 군주였을지도 모르겠다. 여자들의 감언이설에 휘둘리다가 나라를 잃어버린 남자!
남편이 지출할 이유를 들어보면 처음엔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사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지출을 거부해 보지만 남편은 집요하게 나를 설득하거나 몰래 사다가 감추어 두기도 한다. 이왕 사 온 거 묵혀두기 아까워서 쓰다 보면 "거봐 있으니까 좋잖아?" 하면서 칭찬을 바란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크게는 나라까지 말아먹는 일은 당연하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남편의 지출을 감시하며 설득당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이런 나를 하늘이 보고 재산을 맡겨도 될만한 사람이라고 판단 내려 주기를 바라면서.....ㅎㅎ
PS: 그래도 사실 사업을 키우는 진짜 큰 일은 남편이 다 합니다.ㅎㅎ
혹시 잔정이 많은 우리 남편을 쪼잔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까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