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글을 내어주었다. _ 부산 책방 손목서가.
바다 앞에 서면, 아무것도 쓸 수 없었으나,
어떤 말들을 쓰기 위해 바다를 헤매었다.
바다는 은빛과 금빛, 그리고 검은빛 물보라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리를 바꿔 앉았고, 나를 낚아채어 자신의 심연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저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면, 사나운 파도 위로 뻗은 손에는 문장이 쥐어져 있곤 하였다. 문장이 쓰여지지 않는 지친 듯한 일상에 오늘, 나는 바다를 찾아야만 하였다.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곧잘 침잠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심연으로 가라앉아, 고독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는 일은 글쟁이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바다이든 상관은 없었으나, 문장이 그리울 때는 까만 속을 드리운 동해 바다가 내어주는 고독과 침묵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수많은 애와 환이 스며든 오래된 유서들을 품고 있는 부산 앞바다로 향하였다.
벚꽃이 때이르게 떨어져 흩날렸다. 조금 눈물이 났다.
바다는 소리없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지긋이 나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문장을 돌려달라고, 말하였다. 바다는 소금기 가득한 날것의 문장들을 나의 발 아래에 던져주었다. 그해 봄, 소중한 나의 친구는 허물어져가던 나에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전해 주었고, 봄과 그녀와 책은, 새끼손가락의 언약처럼 나를 붙잡고 다시 살라하였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사람을 살게하는 문장과 죽게하는 문장은 불과 한끗 차이라 생각하였다. 살기 위해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문장들과의 대화는 나를 향한 애틋한 감정들과 소중한 기억들을 푸른 정맥을 타고서 심장으로 차오르게 하였다. 분명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해준 아름다운 한 시절이 있었기에, 그것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지나가버린 것들에게서 연둣빛 새순이 돋아났고, 망각 속으로 사라질뻔 한 어떤 서러운 것들에게 물과 거름을 주었더니, 그 시절의 꽃을 피워 다시 보여주었다. 상처로만 여겨지던 것들이 아름다운 기억의 꽃을 피워 내었고, 후회로 꿈틀거리던 것들이 소중한 인연의 과실을 맺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아프지가 않았고, 단지 애틋하게 다가와 나의 심장에 기대었다.
문장들은 그렇게 통증을 치유하며, 한 시절을 복원시킨다.
부산의 절영절벽을 따라 바다로 흐드러지게 떨어져 내리는 벚꽃 잎은 순교하는 것만 같았다. 멀어져 가는 봄을 안타깝게 놓아주며, 봄을 따라 바닷속으로 장렬하게 뛰어드는 찬란한 빛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벚꽃잎을 애도하며 걷다 보면 글을 품은 책방인 '손목서가'가 있었다. 제2의 송도라 불리기도 하는 부산 영도의 '흰여울 문화마을'에 위치한 '손목서가'는 수많은 생과 사, 삶과 사랑이 빠알간 부표처럼 떠다니는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웃고 울며, 격정의 시간을 보내었을까. 영화 '변호인'의 촬영지이기도 한 이곳에서, 누군가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뭉클한 대사가 바다를 향해 당겨졌고, 화살은 수평선 위의 태양으로 날아갔다. 문장은 운명을 바꾸었다.
'니 변호사 맞제? 변호사님아 니, 내 쫌 도와도.'
하얀색으로 채색된 낡은 건물들은 골목길의 끝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삼키며, 바다로, 또 그 아래로 연약하지만, 단단한 문장들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해안가 절영 절벽 위의 오래된 집들은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서사들을 담고 있는 듯하였고, 바다의 부서지는 윤슬 만큼이나, 빛을 따라 반짝거리는 책 먼지의 입자들도 수평선을 간지럽히며 부유하였다. 손목서가는 '유진목' 시인과 '손문상' 화백 내외분이 운영하는 카페이자, 책방이었다. 어촌의 아낙이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할 것만 같은 나무 문짝을 가만하게 열자, 시의 언어가 손바닥을 펴고 맞이하여 주었다. 왼편에는 커피와 차를 준비하는 책방지기님의 공간이 있었고, 정면과 오른편에는 갈색빛 클래식한 목조 서가가 고요의 풍경을 낳고 있었다. '유진목' 시인의 반짝거리는 시집 두 권을 펼쳤고, 손을 대자, 가슴이 아팠다.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까.
사랑이 끝나는 순간을 알고 싶었어.
내가 국경을 넘었을 때,
휴게소에 잠시 멈췄을 때,
이른 아침 처음 내린 커피를 마셨을 때,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를 찾을 때,
지도를 펼치고, 내가 있는 곳을 찾을 때,
밤새 달려도 불꺼진 모텔 간판만 나타날 때,
주차장에서 웅크리고 잠들었을 때,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을 때,
그게 너었으면 하고 바랄 때.'
- '유진목', '국경의 밤' 중. -
'유진목' 시인은 2015년까지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다가, 2016년부터 '연애와 책', '디스옥타비아', '식물원' 등의 시집과 산문집을 집필하였다. 그녀의 문장들은 시리도록 아픈 기억들을 갖고서도 살고 싶도록 하였고, 그래서 삶을 사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문장은 '그녀' 자체인 듯하였다.
나는 서글프게 사라져가는 삶이 안타까워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갈겨 쓴 문장들은 나의 이야기였지만,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또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문장들은 밀물을 따라 자명한 법칙처럼 나를 채워주었고, 썰물을 따라 감정의 찌꺼기들을 쓸어 나가곤 하였다. 비록 글의 언어는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에서 해방되게 할 수는 없었지만, 하릴없는 외로움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고, 태생적인 불안에서 자유롭게 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의 속박과 굴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고통과 상흔을 딛고, 영혼과 영혼을 연결시키며, 우주를 확장해 갈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도, 간결한 수단이 책 읽기와 글쓰기였다.
문장을 짓는 일은 그래서 가끔은 고통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유진목' 시인은 고통을 얼마나 삼켰을까.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나의 고통이 가치를 상실하는 것 뿐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동안, 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고, 누군가를 향한 가슴 아파할 수 있는 체력이 조금은 더 불어난 듯하였다. 불어난 체력으로 오늘도 난, 자연의 품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꿈을 향해 보행하고 있다.
볕뉘 한줌이 길게 드리워진 좁고 하얀 시멘트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손목서가'의 2층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입 안으로 넘어가는 쌉쌀한 커피를 음미하니, 이미 끝나버린 것들이 아직 끝나버리지 않은 듯,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언제쯤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아니 어리석게도 끝끝내 마침표를 찍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그리움들이 문장과 삶을 이어가는 동력이 되는 듯하였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레빈'의 풀베기가 몸을 소진시키며 몰입하여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라면,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을 소진시켜 타인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끝 모를 그리움과 잉태한 문장들을 순산하는 일, 그리고 비집고 들어오는 다른 우주를 무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삶이 점멸하는 그날까지도 지루하리만큼 배우고 반복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온전한 삶을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그래서 기어코 놓지 못할 나의 인연이었다.
'나는 불안감이 찾아오면 내 은신처로 간다. 다른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읽은 문학 책에 대한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일. 그것만으로도 충만하다. 이보다 더 고상한 기분전환이 있을까? 이보다 더 좋은 동반자가 있을까? 문학의 최면보다 더 감미로운 최면은 없다.'
- '뮈리엘 바르베리', '고슴도치의 우아함' 중. -
작가를 지망하는 수많은 꿈들이 바다의 짠내나는 바람을 따라 나부끼고 있었다. 자신을, 아니면 그 누군가를 구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쪽지들이 바다 위의 별빛들에 가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작가 지망생인 나도 신의 언어로 채워진 그곳에 희망 한줄을 걸어두고 행복해 하였다. 비록 가난한 현실이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마음을 보태며 살기를 바라였다. 그래서 '시골의 글 쓰는 책방 할아버지'를 다시 되내며, 바다를 품은 글의 향기들을 뒤로하였다. 대낮의 햇살이 어느새 건물의 끄트머리에 걸려 아쉬움을 달래는 복숭아빛 황혼녘을 지나고 있었고, 벚꽃잎은 여전히 처절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시인이 살아가는 이곳에서는 모든 낮과 모든 밤에 꿈을 꾸며, 글을 이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벚꽃잎이 아름다워 넋을 놓고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려 소리내어 읽고야 만다.
억장이 무너질 듯, 너는 아름다웠다.
바다는 결국 눈물 한방울과 문장 하나를 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