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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증명과 좌표의 이동.

강현욱 산문집.

by 시골서재 강현욱


투명한 어둠 안에 놓인 하얀 좌표를 닮은 서재에 앉아있다. 찰나의 감정과 이어지는 사유를 끄적인다. 지금은 슬픔이라 적겠다. 감히 내가 웃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니까. 시계는 돌아가고 있으나, 시간은 이 좌표 안에서 동결되고야 만다. 얼어붙은 시간은 내 안의 어떠한 우연과 필연도 허용하지 않는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수줍게 적은 자그마한 편지. 나의 어깨를 잡는 연약한 손길. 우체부의 낡은 오토바이 소리.

누군가의 다정함을, 나는 그리워 한다.


어느새 산허리가 푸르스름하게 번져온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되었다지만, 인간이 발명한 시계의 태엽이 재배열 되는 소리에 흥분하는 것뿐이다. 박명의 빛을 데려온 저 태양은 어떠한 소란도 없이 어제와 동일하게 찬연하다. 그건 말라버린 나무가지들도, 비상하는 왜가리도, 배고픈 고라니도,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크든, 적든, 순수한 시간의 흐름은 고급스러운 시계 따위에 있지 않다.

공간의 이동에서 태어난 우연과 필연, 그로인해 변화된 내 안에서, 순수한 시간의 흐름은 발견할 수 있다.


2025년의 첫 날, 난 여주에 도착했다. 내일은 파주에 있을 것이다. 좌표의 이동이자, 온전한 시간의 흐름이 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를 다녀간다. 여주의 단아한 산골책방에 들어간다. 갓씻은 채소처럼 싱그러운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책 읽는 자에게서 맡아지는 고요의 향기. 사인한 나의 책을 서가에 꽂아둔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나의 책에 손을 가져간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히 흐르는 것만 같다. 만년필로 오늘 날짜가 적힌 나의 책을 그들은 신기하다는 듯 살펴보다 책방지기님께 가져간다. 책의 저자가 나라는 사실이 발각된다. 그리고 다정한 미소와 말들로 책방은 채워진다.


'결례가 아니라면 제 책을 새해 선물로 드려도 될까요?'

'완전 좋아요.'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는 그토록이나 보고 싶던 다정함을 만나고야 만다. 비로소 평온한 시간의 흐름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 얼마 후, 그들의 메일이 나의 발 아래로 배달된다.


'그날 저희 자매는 밤 늦도록 작가님의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뜻깊은 하루를 선물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모든 사랑의 만남은 떠내려옴과 건짐의 오래된 신화라는 쿤데라의 말을 되뇌인다. 모든 삶은 강물이다. 너무나 거대해서 흘러간다는 걸 누구나 망각하고 살아가지만, 언젠가 하나같이 바다를 맞닥뜨리게 되고, 시간에 배반당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 무얼하며 살았던가.'


누군가가 떠내려가는 나를 건져올리거나, 내가 떠내려가는 누군가를 건져올린다. 텅 빈 듯한 시간은 가까스로 다시 채워진다. 묵직한 인연의 무게에 물살은 세차게 부딪히고, 나는 그것을 느낀다. 새벽과 아침이 만나는 기적과도 같은 인연 덕분에 뭍으로 올라 나의 삶이 흘러가고 있음을 직시한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이, 그리 야속하지만은 않다.

카프카는 그의 마지막 일기에서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냥 오는 것은, 이유없이 가는 것은, 그저 다시 오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덧.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신 여주 홍두깨 책방의 김홍석 대표님과 잊지 못할 인연으로 기억될 두 분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책이 출간되면 봄에, 이른 봄에 다시 찾아뵙겠다고 인사드립니다. 유치함과 비겁함으로 얼룩진 얼음송곳 같은 이 시절도 언젠가는 흘러가겠지요. 조용한 날들이 오면 우리가 조금은 더 편하게 웃으며 만나자 전합니다. 너무나 부러웠던 홍두깨 책방에 대한 이야기는 조만간 책방 매거진에 발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첫 인세를 받았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정산 받는 인세가 매년 기다려질 듯합니다. 작다면 작고, 많다면 또 많은 인세를, 유니세프에 기부했습니다. 매달 정기후원을 해왔었지만, 일시후원에 제공되는 유니세프 팀팔찌는 보내주지 않더군요. 사실 팔찌에 조금 탐심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감기 몸살 때문에 며칠째 집 안에서 서성입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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