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욱 산문집.
발톱을 바짝 세운 고양이가 가슴을 할퀴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절이다. 이보다 더한 소식들에 솜털은 수시로 일어서고, 나의 동공은 흰자위를 덮을만큼 열리고야 마니까. 인간은 스스로 사유하고, 매순간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은 손톱만한 죄의식조차 남아있지 않은 선동 앞에 그저 속절없이 나부낀다. 의식없는 육신들은 스스로가 영웅이라도 된 듯한 환각에 취해 법치의 창을 깨부수고, 널브러진 잔해를 짓밟고서 지나간다. 수호하려는 자의 얼굴에는 목적없는 주먹이 격발되고, 침이 섞인 날선 말들이 그 위를 적신다. 그에게서, 또 나에게서 붉은피가 역류한다. 핏물은 아래로, 또 그 아래로 길을 만들고 이어진다. 의식없는 분노로 무장한 선동된 자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하데스를 향해 다가가는 오르페우스의 그것과 닮아있을까.
분노, 두려움, 참담함. 무엇보다 슬픔에 가까운 이 기분.
인간이 실존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에, 나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다. 나의 믿음이 여지없이 무너졌으니까.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근원적 비참함'이 하강하듯 날아와, 나의 정수리 위로 내리꽂힌다. 이성이 무력한 시절에 나는 아연한 심정이 되어 서있다.
언어와 관계, 구조에 의해 자유의지가 박탈당하고, 이용당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저 수많은 분노들과 나의 분노가, 나는 슬프다.
영화 '올드보이'를 재생한다. 올드보이는 몇 번을 보아도 지루하지가 않다. 나에겐 인생영화 중 하나이니까. 분노나 슬픔. 이런 감정들이 치밀어 올라 열기가 느껴질 때면, 올드보이에 나의 의식을 맡긴다. 핏빛 안감의 보라색 가방에서 깨어난 '오대수'로 시작해, 붉은색 목도리를 두른 '미도'의 품에 안긴, 짙은 슬픔이 섞인 미소의 오대수로 영화는 끝이 난다. 연둣빛 평온의 잔디에서 깨어났으나, 붉게 물든 그의 안구는 평온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우진'의 분노에 의해 설계된 핏빛 시나리오를 따라 오대수는 시뻘겋게 분노하고, 끝내 파멸을 향한다. 분노와 증오, 복수의 끝에는 결국 보랏빛 허무와 슬픔만이 남는다. 핏물을 쏟아내는 오대수의 입에, 보라빛 손수건을 욱여넣은 이우진은 자신의 생을 그렇게 스스로 닫는다.
분노, 복수. 그리고 슬픔. 그들의 삶은, 그게 전부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당신들을... 당신들의 삶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덧. 들려오는 소식들이 하나같이 참담합니다. 이 시절을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폭력과 궤변으로 얼룩진 한 시절을 제가 살아간다는 사실에 그저 서글퍼집니다.
그럼에도 설명절만큼은 모두가 평온하고, 따듯하게 보낼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