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계절.

by 시골서재 강현욱


도시의 오피스텔에서 내려다보이는 겨울은 낮과 밤이 선명하게 구분된다. 줄지어 늘어선 붉은 라이트와 날카로운 경적음, 술에 취해 웅성이는 길거리의 사람들과 까만 하늘까지 닿은 바벨탑의 조명등. 하지만 낮과 밤의 경계는 선명하나, 소란함은 별반 다를게 없다. 동지가 지난 시골의 겨울은 재촉하듯 밤을 불러온다. 시골의 겨울은 명암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흐릿한 낮과 밤이 만나는 순간, 산과 들판은 온통 잿빛으로 물드는데, 소멸의 풍경이 현실적이기 보다는 꽤나 몽환적이다. 언제까지나 해를 바라볼 것만 같던 해바라기도, 달빛을 따라 조용히 흔들리던 달맞이꽃도, 앙증맞은 딸기꽃도, 은은한 종소리를 닮은 스노우벨과 더덕꽃도, 모두 흙으로 돌아가버린 정원에서 비현실적인 적막을 따라 나는 홀로 서성인다. 마을 사람들의 축제같던 김장마저도 끝난 들판은 황량하기 그지없지만, 그렇다고 황량함이 심적인 빈곤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자연은 부재(不在)하지만 다시 존재(存在)할 것이고, 아직 존재하지만 다시 사라질 테니까. 시골의 사소한 풍경들 속에 깃든 세계의 엄연한 순환과 엄혹한 법칙은 부재에 익숙해지라며, 정원가에게 설교하곤 한다. 자연이 펼친 경전은 평화롭고 경건하게 나에게 말을 걸어오곤 하는데,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아마도 자연을 닮았을 것만 같다. 시골의 밤은 깊고도 넓어서 한낮에 존재하던 철없는 쑥이나 씀바귀들 마저도 까맣게 지워버린다. 망막한 바다 위에 떠가는 돛단배가 된 듯한 기분 탓에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서 화로에 숯과 장작을 넣어 불을 지핀다. 집요한 어둠의 살갗을 태우는 붉은 꽃은 사람의 시선을 아무런 이유없이 잡아두는 힘이 있다. 불꽃의 미친 듯한 춤사위를 한참동안 바라보며, 사십 대인 정원가는 부재의 자리를 생각한다. 다가올 봄에 심어야 할 꽃들과 채소들. 죽어버린 라일락과 자작나무가 있던 자리에 다시 식재할 나무들. 허전한 정원의 귀퉁이에 가져다 둘 조형물들. 채워질 정원의 모습에 사뭇 만족스러워 설레는 마음으로 참나무 장작을 이리저리 들쑤시다가 연신 기침을 해댄다. 요즘 말로 나는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지만, 아직도 부재에 의한 결핍이 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여전히 인연이라는 씨앗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흩뿌리며 살아가는데, 그 씨앗은 간혹 부재의 꽃을 발화하기도 한다. 사람의 인연과 달리 자연과의 인연이 낳은 부재는 깨끗한 그리움이며, 언젠가는 재회하리라는 새끼손가락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다. 자연은 부재하지만, 부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사람과의 인연은 확연히 달라서 선택에 따라 뿌려둔 개체화된 인연이라는 씨앗은 결실과 부재를 동시에 잉태한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주변에 수많은 존재들이 있어도 부재하다 느끼고, 외로움과 결핍에 이를 갈며, 몸을 떠는 존재니까. 나 또한 스스로 불필요한 관계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이라는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해야할 일을 하다보면, 인연의 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가고야 만다. 그래서 좋든 싫든, 자의든 타의든, 사십 대의 계절에는 부재의 꽃이 곳곳에서 개화해, 때로는 눈물을 흘리거나, 아물지 않는 상처를 받거나, 멈추지 않는 증오를 품기도 한다. 부재의 꽃도 꽃인지라 필연적으로 비가시적인 향기가 흐르는데, 이 향기에 심취한 사람은 우울이라는 병을 얻거나, 오히려 자신의 삶을 똑바로 관조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도 한다. 비록 중년이 되었지만, 죽음을 포함한 이별이 서스럼없이 던져주는 부재에 익숙해지지 못한 채, 여전히 그걸 쉽사리 놓지도, 견디지도 못하는 것 또한 나라는 인간이다.

나는 부재의 계절에 서 있다. 그것이 왜곡이든 오해이든, 죽음의 모양이든. 이유가 있는 그들은 떠났으며, 이유가 없는 나는 이 자리에 남았다. 도대체 무얼 해야할지도 모르면서.

쿵. 어떤 서러운 것이, 어떤 단단한 것에 부딪히는 소리. 그래서 듣기에 썩 좋지 않은 둔탁한 소리가 서재 외벽에서부터 갑작스레 솟아난다. 떨어진 가슴을 쓸어안고 진동의 근원지로 달려가보니, 화려한 수퀑 한 마리가 날아들어 건물 외벽에 대가리를 박고, 땅으로 추락해 죽어있다. 나의 희뿌연 한숨은 스스로 공기 중에서 동결된다. 내가 이곳에 서재를 세웠기 때문일까. 날이 추워 방향 감각이 멸실된 것인가. 아니면 암컷을 상실한 것인가. 왠지모를 동질감 비슷한 감정이 섞인 측은한 마음이 내 안에서 걸려 넘어진다. 서늘한 음영이 드리운 반들반들한 눈동자는 끝내 진실을 토해내지 않겠다는 견고한 자세처럼 희미하게 굳어간다. 힘없이 벌어진 부리에서 가지런히 모인 차마 말하지 못한 말들이 굵은 침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다. 건너편 할아버지들께 말씀드려봐야 홍조 띤 설렌 표정들만이 눈 앞에 선연하기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태워봐야 한 홉도 되지 않을 듯한 뼛가루가 서럽기만 하다. 삽을 들고 벚나무 아래 구덩이를 파고 비닐에 싼 녀석을 묻어준다. 초라한 봉분이 하나 더 내 안에 생긴 것만 같은 황망한 기분. 생의 비밀을 숨긴 듯한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그림자를 밀며 간다. 죽음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나에게 배달된다.

사십 대가 되고 예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것들 중 하나는, 수신되는 청첩장의 수보다, 부고(訃告) 알림이 많아진 것이다. 청첩장은 분홍빛 예쁜 종이에 신랑과 신부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아 천천히 날아오곤 하는데, 부고는 핸드폰을 통해 불시에 내 앞에 배달되곤 한다. 청첩장은 실재하는 이에 대한 현존하는 감정을 드러내게 하는 소식이지만, 부고는 부재하는 이에 대한 허구적인 기분에 침잠하게 하는 쿵하는 소리이다. 그래서 청첩장으로 인한 감정은 즉각적인 하나의 모양으로 귀결되고, 부고로 인한 감정은 분절된 퍼즐처럼 느리고도 깜깜하다. 휴대폰의 화면 안에는 내가 아는 누군가의 죽음이 겨우 몇 줄로 된 짧은 문장으로 요약되어 있다. 길고 무거웠을 삶에 비해 터무니없이 간결한 정보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허무하게 하고, 허구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불과 이 년 전, 나이 어린 후배의 부고를 산란하는 액정을 통해 접하게 되었을 때, 처음 생겨난 감정은 놀랍게도 슬픔따위가 아니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실제하지 않는 일이라는 확고한 의심. 그래.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시작되는 죽음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부재가 실존함을 서서히 깨닫게 되고, 간략한 정보는 비로소 나의 무릎을 꺾으며, 등뼈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는 어떤 단계라도 정해져 있는 것인지, 소중한 이의 죽음으로 인한 부재는 떠나간 자에 대한 그리움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상념으로 한동안 사람의 영혼을 붙잡아둔다. 가깝게는 명예나 직급, 돈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지금부터라도 나를 위해 살자. 는 며칠 가지도 못할 숱한 다짐이나,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와 같은 현실감 없는 어떤 거창한 유언같은 것에서 부터 시작해서, 멀게는 죽음 이후의 시공간에 대한 종교적인 사고를 하거나, 또는 삶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에 이르기까지, 짧든 길든, 얕든 깊든, 나를 죽음 앞에 조아리며 부복(俯伏)하게 한다. 사십 대가 되면서 나의 지나온 시간에 대한 밀도는 물렁해지기만 하는데, 늘어나는 부고는 생경한 죽음에 대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견고하게 인지시킨다. 소중한 이의 죽음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나, 나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은 오히려 현실이 되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내려놓으며 소박하게 살고자 하고, 눈물로 글을 써야만 하는 일 따위는 그만 만들면서, 조금은 나에 대한 의미를 남기고자 애쓰며, 유예된 시간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 사실 죽음보다 두려운 건, 내가 살아온 의미의 부재이다. 나의 삶은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신없는 눈빛은 흐려지고, 날카로운 얼음기둥이 심장을 파고든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그들과의 지나온 시간을 남길 수 있게 하는 건 의미인데, 몇 홉도 되지 않을 뼛가루에 의미를 부여할 권리는, 안타깝게도 다음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허한 부재 앞에서 남겨진 자를 견디게 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이 죽음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펜을 붙든다.

요란한 산새들의 지저귐에 눈이 뜨인다. 아직 어둠의 피륙은 걷히지 않았고, 적막 속에서 꿈은 이르게 깨어졌다. 조각난 꿈만큼이나 두통이 밀려온다. 희미하게 벌어진 눈꺼풀을 뚫으며 자작나무로 된 서재의 내벽이 어렴풋이 다가온다. 깨어진 꿈을 붙잡으려 되뇌인다.

'무슨 일 있나요. 어디 아픈가요. 밥은 잘 챙겨먹나요.'

지금은 곁에 없는 누군가가 꿈에서 나를 말없이 바라본다.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기습적인 통증이 흉곽 너머에 머무른다. 이어서 오한이 나의 실핏줄까지 휘어감는다. 아무리 장작불을 피웠다고 하지만, 시골의 날카로운 추위는 흐물해진 근육과 텅 빈 뼈 속을 집요햐게 파고든다. 옷깃을 여미거나, 목도리를 두루거나, 이불을 두 겹씩 덮어 추위를 어떻게든 막아낸다. 추위는 외적 충격일 뿐이다. 누군가가 던진 수천 조각의 이별처럼. 하지만 오한은 속수무책이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잡아당겨 보지만, 오한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오한은 내가 어떻게 손 써볼 수 있는 추위와는 다른 거니까. 그건 내 안의 따듯한 것들이 빠져나가는 소리이고,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해 나의 몸이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비명이다. 이가 부딪히고, 살이 떨리고, 열이 일어서고, 수많은 관절의 통증이 몰려온다. 누군가의 부재는 부지불식간에 나의 내부에서부터 나를 잠식해 간다. 내 안에서 살아가는 타자는 이따금 오한을 데려온다. 나에게 들어와 하나가 된 타자는, 떠나간 후에도 나의 늑골 너머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가끔씩 그리움, 또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심장을 두드린다. 더이상 외부의 타자가 아닌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일부가 된 현재의 타인이자, 나 자신이다. 그런 타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이기도 한 나는, 나를 향해 속삭인다.

'난, 이렇게 살아가요. 가끔은 당신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괜찮다면 당신도 나를 잊지 말아요.'

나는 습격받는다. 무방비 상태인 내가 습격에 관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거의 없다. 그저 해열제 한 알을 삼키고,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웅크리는 게 전부다. 그리고 거칠게 밀려오는 통증을 바위처럼 견디며,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저 글을 쓸 뿐이다. 사랑을 노래하려고 하면 고통이 되었고, 고통을 노래하려고 하면, 사랑이 되었다는 '슈베르트'의 말을 생각한다. 고통에서 시작되었으나 어느새 사랑에 닿아있던 나의 글을 다시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슈베르트'가 보리수 아래로 담담하게 걸어 갔듯, 나는 감나무 아래 차가운 평상에 걸터앉는다. 가끔 찾아오는 오한은 부재의 고통으로 시작해, 결국 내 안의 타자를 향한 그리움과 의미에 가닿는다. 며칠을 온전히 앓고나야, 비로소 개구쟁이 연인처럼 오한은 물러난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말처럼, 떠나간 후에 누군가의 얼굴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지나가버려도 사라지지 않는게,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걸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고(故) '김광석' 선생님은 어쩌자고 이런 노래를 남기고 간 것일까. 사랑하던 이든, 또는 그 누군가이든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일이 사십 대가 되고 나니 마음이 쓰리고, 심장이 저미는 일임을 알겠다. 그런 일을 매일 하며 산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죽음은 가볍고, 삶은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아무래도 요즘은 가까워지기 전에 저절로 물러서게 된다. 가까울수록 알게 모르게 서로를 향해 상처를 주는 일이 많아지는 게, 유감스럽게도 사람이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바늘이 나를 찌르진 않으니까. 나의 주머니에 든 바늘만이 나를 찌를 수가 있으니까. 사람은 가깝다는 이유로 배려와 도움을 고맙게 여기지 않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헌신과 희생을 당연시 여기곤 한다. 가깝다는 이유가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며, 사랑한다는 이유가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아님을 사람들은 종종, 아니 자주 잊어버린다. 타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며 강제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마찰과 불화, 무례와 질투, 그리고 이별이 발생하고, 부재의 자리가 남는데, 그럼에도 한동안 이 자리를 서성이게 된다. 그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아무리 돌림 노래처럼 서성여도 그걸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기에 결국 부재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로 섣불리 채우려 한다. 자유롭기 위해 이별을 선택하지만, 안타깝게도 변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된다. 자유롭길 바라는 만큼, 외로움을 견딜 수 없는 게, 또한 사람이니까. 나 또한 나의 결핍을 끊임없이 타인을 통해 채우려 애쓰느라, 삼십 대의 대부분을 헛되게 보내었다. 마음의 공험함과 영혼의 빈곤, 주체성의 빈약은 관계의 확장을 통해 이를 되메우기에 급급했고, 결국 가장 소중한 나의 삶은 텅 빈 나뭇가지처럼 쉽게 부러졌다. 사교적인 활동으로 인해 채워진 듯한 욕망은 직접적으로는 비교와 무례로 더 많은 욕망을 낳게 되고, 그에 비례해서 배신과 혐오, 우울을 낳기도 한다. 간접적으로는 무의미한 시간을 소모한 것에 대한 후회와 사교적인 선택으로 인해 파생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소진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의 수많은 부재와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나의 빈약함으로 발생한 것들이었다. 관계에 집착하고 타인들과 여흥을 즐겼던 것은 혼자인 나를 감당할 능력이 나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빈약함은 나를 벼랑 끝에서 추락시켰다. 삶의 부재인지, 무게인지 모를 인연과 헛된 말들에 시도때도 없이 어딘가에 머리를 들이박고 추락해야만 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정원일을 하면서 혼자 있을 수 있는 근육이 생겨나고, 오히려 지금은 군집한 시간보다 고독한 시간을 즐긴다. 고독한 이 시간에 서서 부재의 자리를 다시 되돌아보면, 분명 숱한 허언들이 웅성거리기도 했지만, 버릴 것 없는 추억들이 고조곤하기도 했다. 더 이상 덜어낼 말도, 덧붙일 말도 없는 기억들이 고요히 피를 흘리며 내 안에 속삭이듯 살아간다. 애착하던 대상들과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 믿어왔던 연약한 관계들이 빠져나가는 풍경은 조금 씁쓸하기도 하지만, 빠져나가야 그 자리를 다시 채울 수 있기에 그저 바라볼 뿐이다. 설명이 필요한 관계는 삶에 있어서 에너지만 소모될 뿐,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음을 이제는 이해하니까. 혼자 있을 수 있는 정신적 풍요는 타인의 부재에도 흔들리지 않음을 이제는 잘 알고있으니까. 다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타인의 부재를 애도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페소아'는 만남과 헤어짐은 하나의 죽음이라 말했다. 부재의 자리를 지켜보며 내게 남은 건 캄캄한 침묵과 지울 수 없는 추억, 그리고 대상이 사라진 나약한 약속뿐이지만, 남은 것들에 저항하지 않는다. 저항은 고통을 더욱 예민하게 하니까. 오히려 받아들이고 한 시절 내가 살아있었음을 기억한다. 나의 애착을 불멸화하려는 작업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나의 지나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기념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부재에 작별하는 방식이다. 서러워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다. 그저 마음에도 죽음이라는 게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나를 위한 일이다. 마음의 죽음도 부지불식간에 요약되어 전해진다.

부재의 자리를 깊이 애도하고, 언젠가는 벚나무 아래에 소중히 묻어두는 일이 그들에 대한 마지막 예의임을 안다.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간에서나 사랑과 이별때문에 괴로운 사람들이 있다. 나도 한때는 누군가의 부재에 기쁜 일은 기쁘지가 않았고, 슬픈 일은 슬프지가 않았다. 그 무엇도 필요가 없는, 존재도 느껴지지 않는 무의 공간, 허무의 공간이었으니까. 방향 감각은 망실되고, 목적성은 분실했다. 사점을 향해 수도없이 날아가 머리를 들이 받으며 생각했다. 그건 나의 잘못인가, 그의 잘못인가. 아니면 부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간들이 하나의 공간에 우연히 섞인 것 때문인가. 자책과 후회로 삶을 탕진하다 보니,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자유로워지지도 못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통해 부재를 채우면 나아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자, 자만이었다. 왜 이런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도무지 자기중심적이지 못한 것일까. 이제는 자유롭기 위해 무얼해야 하는 지, 조금 알 것도 같다. 타인의 애정을 구걸하거나, 스쳐가는 시간들에 그저 넋놓고 있지 않는다. 그 시간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온힘을 다해 부딪친다. 나를 성장시키지 못하면, 결국 타인의 기준과 시선에 흔들린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나의 영혼이 부재의 공간에 감금되지 않도록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금과 틈을 만들어내고, 나의 육신이 고독한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정원일에 좀 더 마음을 쓴다.

오한이 사라진 듯해서, 다시 정원을 거닌다. 모든 꽃들이 사라졌다고 믿었으나, 남아있는 꽃이 있어 손가락을 뻗어 만져본다. 솜털이 가득한 목련의 눈꽃이다. 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믿었을까. 왜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이 글을 쓰고나니 무엇이 소중한 것이지를 알 것도 같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자그마한 존재를 알아볼 수 있고, 여기에 감사할 수 있다. 혹독한 시간을 견딘 목련의 눈꽃은 내년 봄에는 하얀 풍선처럼 개화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부재의 공간에서 부지런히 쓰면서, 또다시 한뼘만큼 성장해 있을 나를 기다린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그자리를 다시 채우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부재의 계절, 겨울에는 분명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빛처럼 일어난다.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음들에게 늦었지만, 고맙다고 전한다.


덧. 겨울이 익어갑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진 듯 쓸쓸한 계절이기도 하지만, 그 부재의 자리에는 분명 싹이 웅크리고 있음을 이젠 잘 압니다. 그 싹을 발견하고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꾸어야 하는 계절인 듯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겨울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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