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앞에서도 건너편 할아버지들은 새벽부터 여전히 부산하다. 나는 아직 눈을 뜰 수가 없는데. 그들은 평일이든, 주말이든, 항상 같은 시간에 기상해, 각자의 정원을 둘러본다. 그리곤 어느새 어떤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 사람은 삼자회동하고, 어딘가를 향해 그들은 줄지어 나란히 걸어간다. 어떤 긍지를 품고서 바다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색상도 제 각각인 털모자 세 개가 씩씩하게 지나가는 모습은 꽤나 귀여운데,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 중 하나이다. 팔십이 다 된 노인들이 어떻게 매일을 저리도 활기차게 지낼 수 있는 걸까. '세 분이서 어딜 그렇게 가세요.' 하고 말하려다 그만둔다. 내 입을 틀어막는 아찔한 기분이 관자놀이를 파고들었으니까. 나는 왜 이 광경을 어제도, 그저께도 목도한 것만 같은 걸까. 꿈에서 보았었나. 데자뷰라는 건가. 그건 아니다. 분명 낯설지 않은 장면이 눈 앞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풍경도, 사람도, 깨끗한 하늘을 삼각편대로 날아가는 새들조차도 모두 어제와 달라진 게 없을 뿐이다. 사는 일이 기나긴 꿈을 꾸는 것에 불과함을 증명해 주기라도 하는 듯, 겨울은 시간의 변주가 중지된 것만 같다. 어쩌면 겨울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도사리는 계절이라는 생각. 어제와 오늘이 분간이 안되고, 오늘과 내일이 구별이 안된다. 매일 조금씩 작별하다가, 결국 끝없는 이별만이 남아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지평선에 도달한 것만 같다. 자그마한 데이지도, 몽환적인 델피늄도, 영원할 것만 같던 백일홍도,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매일을 다른 모습으로 분주하게 살아오던 정원가는, 비로소 생경한 위화감에 숨이 막힌다. 부재(不在) 안에서 적막이 목을 잡고, 숨통을 조여온다. 사십 대의 시간도 어쩌면 이와 닮아서, 마치 나만 멈춰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앞만 보며 전력질주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 믿었으나, 무엇하나 나아진 것도, 내 것인 것도 없는 듯한 기분에 침잠한다. 내일도, 모레도 달라질 것도 없는 일상만이 기다리다보니, 미래에 대한 기대도 남아있지 않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계절이 지나가며, 송두리째 가져가버린 것들. 심지어 열정과 꿈과 의지와 삶을 환대하는 방법조차 사라진 것만 같은 허무함이 사람의 무릎을 꺾이게 한다. 매일 비슷한 일상에서 지루하다 못해 차라리 환상이길 바라는 심정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의문마저도 가지게 된다.
'나,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나. 물을 마시려 했었나. 커피를 내리려 했었나.'
당장 해야할 일 조차 어렴풋할 때, 정원가가 하는 일들이란 난로를 켜고, 굽혀 세운 두 무릎을 한 팔로 감싸안고서, 책장을 넘기는 일이다. 아니면, 욱여넣듯 노트 속으로 언어를 밀어넣는 것이 전부다. 변하지 않는 겨울의 나날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질감을 느끼게 하는 언어의 위안에 스스로 안심한다. 그나마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며,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걸 수도 있으니까.
언어의 힘으로 나는, 나를 견디고 찾아간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글을 쓰다말고, 오늘은 추위가 조금 누그러진 듯해서 오랜만에 한밤의 산책을 하려, 신발을 고쳐신는다. 달빛이 잠긴 정원의 건너편 호수에는 은빛 비늘들이 일렁인다. 자연은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살피고, 말을 걸어오곤 하는데, 휴대폰에 내장된 '빅스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화다. 소롯한 마음의 길로 안내하는 윤슬은, 너는 글을 왜 쓰느냐고 물어온다. 나는 사십 대가 되어, 왜 써보지도 않은 글을 쓰기 시작한 걸까.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었던가. 끄적여본 글자로 돈을 벌고, 인기를 얻고 싶었던가. 가슴에 맺힌 기억과 배설된 감정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던가.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명쾌하게 끄덕여지지도 않는다. 한때, 글쓰기는 마음의 세수라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었고, 또 어느 날은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에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음의 얼룩은 옅어졌으나 여전히 꿈틀거리고, 구원을 바랄 자격은 아직도 아득하기만 하다. 호수의 표면으로 뛰어오르는 붕어의 몸짓에 달빛이 산개한다. 뻐꾸기의 노래는 멈춰버린 세상에 음표를 그린다. 사라져만 가는 차가운 계절 속에서 간혹 만나게 되는 찬연한 아름다움. 나는 이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덧없는 삶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만은 영원하기를 나는 바라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일 뿐인 나는 잔인한 시간 앞에 부복(俯伏)해야 하지만, 무한에 대해 생각하고, 그걸 탐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 그건 불멸(不滅)이다. 나의 목숨이 사멸함에 대한 저항이 아닌 나의 기억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끝없는 시간을 원한다. 서재로 돌아와 출간한 책들을 다시 펼쳐 본다. 그 안에는 내가 사랑한 책방들과 자연, 여러 모양의 애씀과 마음의 온도, 그리고 내 사랑의 대상들이 존재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 앞으로도 사랑할 것들. 끝내 놓을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아프기도 한 것들. 나는 안타깝게도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달려온 만큼의 거리를 앞으로 더 달릴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여전히 달리고 싶은 것이다. 운명과 의지, 그 사이를 수도없이 오가며 아프게 닿았던 사랑의 대상들을 나의 등 뒤로 흩뿌리면서, 조금의 슬픔과 또 조금의 의지를 가슴에 품고서 계속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의가 나의 존재를 선명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비록 사십 대이지만, 정원가는 주저하지 않고 여전히 자연 안에서 나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애쓴다. 나의 남아있는 나날들을 위해 나는 사는 것처럼 살고 싶으니까.
글쓰기는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시도라는 '롤랑 바르트'의 말이 밤바람을 타고 스쳐 지나간다.
사십 대가 되고, 시간이 퇴적 될수록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이 자주 생기곤 했다. 나는 왜 이 모양인 걸까. 왜 이리도 게으른 걸까. 쓸모도 없이 세월만 삼켜버린 걸까. 꿈도 열정도 없이 텅 빈 채로 이렇게 살다가, 소멸하는게 나의 운명인가. 하는 따위의 유치한 질문들. 이러한 질문들에 직면한 나는 많든 적든 내가 참 미워지기도 했다. 미워서 한참동안 거울을 바라보다, 이젠 어쩔 수가 없는 거라 단념하기도 했다. 낙담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증오와 삶에 대한 환멸, 그리고 나태함으로 나를 무장시켰다. 회사와 집을 왕복하는 일 외에는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으니까. 방 안에 가득한 녹색빛 소주병을 응시하며, 중얼거리곤 했다.
'이번 생은 망한 것이다.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꽤나 많은 일들을 만들며 살아왔다 여겼었는데, 좋은 추억은 단 한번의 호흡으로 공기 중에 희석되고, 나쁜 기억은 내 안에서 역류하며, 나의 피와 서스름없이 혼합되곤 했다. 단 한번 밖에 없는 나의 삶과 나의 사랑에 대한 헌신은 어떡해야 보상받을 수 있는가. 사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참 우스웠는데, 우습게도 그 답이라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있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정답을 이끌어내는 힘을 내재하고 있는데, 단지 그걸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내가 쓴 정답은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나를 가꿀 수있는 육체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니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니까. 글을 쓰며 비록 유치하지만,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이 나에게 대답을 강요했기에, 나를 가꾸고 변화시키고자 행동할 수 있었다는 생각. 나를 위해 시작한 일들은 그 순간으로 다시 되돌아 간다해도 망설임 없이 지금도 선택할 것이라는 확신. 정원일과 독서, 그리고 글쓰는 일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입학한 일과 소소하게는 배가 조금 나온 듯하면, 깜짝 놀라 땀에 몸을 담그며, 정원일을 더욱 열심히 하기도 하고, 회식이라는 핑계로 술을 마시기라도 한 날이면, 책을 손에 꼭 쥐고 며칠동안 문장을 탐하기도 했다. 사십 대, 어쩌면 청년과 노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어물쩡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밀려나 권고사직을 받거나, 아이의 교육에 매몰되어 자신을 돌보지 못하거나, 내일에 대한 기대없이 일과 술과 유혹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그렇게 방황하며 어두운 골목을 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서성거리다가, 어느새 자신의 노년을 맞이해야 하는 시기가 유감스럽게도 사십 대라는 생각.
그래서 사십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도 모르게 어두워진다. 불을 밝힐 힘이 더이상 스스로에겐 남아있지 않다고 믿으면서. 작은 불꽃을 피워낼 성냥 하나 정도는 누구나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서.
불을 밝히지 못한 중년들이 하는 것들은, 예전에 나는 이랬었다, 또는 저랬었다는, 그 누구도 관심없는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자신은 지워진 어느 멋진 까페의 커피와 내부 전경 따위를 부지런히 업로드 하는 일들 따위이다. 그 속에 현재의 자신은 가려져 있으며, 스스로를 회피한다. 자신의 삶인데 스스로가 단역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정원일은 내가 주연일 수 밖에 없기에, 많든 적든 나의 존재에 대한 의지를 느끼게 한다. 정원일을 하며 변화된 것 중에 또 하나는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외경과 호기심인데, 그래서인지 클릭 한번으로 진실이 바뀌거나, 사라지는 것들이 불편하기만 하다. 그것들은 가느다란 숨조차 쉬지 않으며, 행동하지도 않으며, 실체가 없기에 언제 어디서든 쉽게 무너지지만,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정원가는 필연적으로 호흡과 생명과 삶에 가까워질 수 밖에 없다. 봄이면 싹이 튼 꽃들과 나무의 새순들이 반가워 어쩔 줄 몰라 동분서주하고, 여름이면 탐스러운 과일들과 채소들이 고마워 연일 바구니를 들고 뛰어다니며, 가을이면 씨앗을 뿌리고 땅을 다듬으며 이듬해를 기다리고, 겨울에는 다가올 봄을 위해 거름과 퇴비를 흩뿌린다. 가지런한 이 모든 일들은 어느 정도의 낙관을 근간으로 한다. 살아있고 실체가 있는 것들과의 교감은 내가 딛고 선 현재를 견고하게 하며, 미래를 응시하게 하니까. 쪼그리고 앉아 추측성 고민과 있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하느라 시간을 허투로 보내지 않는다. 사실 그럴 여유도 없을 뿐더러,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정신적 소진활동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장마가 올 듯하면, 수로를 넓히느라 삽은 쉴 틈이 없고, 가뭄이 들기 시작하면, 뱀같은 호스를 붙잡고, 정원을 빠짐없이 돌아다녀야 한다. 이러한 육체적인 행위들은 흔들리는 오늘과 불확실한 내일을 나아가게 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 간접적으로는 불필요한 상념을 지워버리게 하고, 알게 모르게 몸 안에 에너지를 차오르게 하며, 단련된 몸과 마음의 근육은 수많은 스트레스를 헤쳐나가게 하는 면역력이 된다. 두터워진 몸과 마음의 근육들로 소소한 행복들을 찾아낼 확률도 자연스럽게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정원일을 하며,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일은 나의 매마른 도시 생활에 조금은 더 습도를 높여주고, 낙관으로 일상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준다. 사실 한 사람이 지닌 현재의 모습은 그만한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움직이고, 가꾸려는 의지의 유무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나의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을 가꾸고 움직이는 사람들은 젊었든 늙었든, 가난하든 부자이든, 가족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탄탄한 육체적, 정신적 근육들을 무기삼아, 밝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자신만이 그을 수 있는 자그마한 성냥을 통해 긍정과 즐거움을 발견해 내고, 오히려 어두운 동굴을 헤쳐나오는 일을 즐겁게 여기기까지 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태도에는 분명 긍정이 배어있다. 누군가 손님이 없는 그들의 가게에 들러 '손님이 왜 이렇게 없어요? 괜찮아요?' 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메뉴 연구하라고 하늘이 시간을 허락해 주는 건가봐요.' 라며 웃을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건 빛이고, 빛은 스스로 밝혀야 한다. 아무리 일상이 빠듯해도, 틈틈히 산책하고 사색하며, 쉰다는 핑계로 주말을 누워서 탕진하지 않는다면, 사십 대의 근육은 어느새 탄탄해져 있을 것이다.
죽은 땅에는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줘도 싹은 트지 않는다. 끊임없이 호흡하는 땅만이 결국 꽃을 피울 수 있다. 이것이 정원가가 아는 진리다.
하늘. 겨울 하늘은 어떻게 이리도 맑기만 한 걸까. 평상에 걸터앉아 하늘을 한참동안 올려다본다. 정원의 공기는 차갑지만, 불순물은 끼어들지 않는다. 두 팔을 하늘로 뻗어 마음이 기지개를 켠다. 멀리서 산허리를 넘어 기러기 세 마리가 삼각형 모양으로 바삐 날아온다. 내 품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만 같은 기분. 유심히 바라보니 좌측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금 느리다. 그래서 뒤쳐진다. 그러다 다시 대열이 맞춰지고, 또다시 그 아이가 뒤쳐지길 반복한다. 느린 아이가 순간적으로 힘을 내서 삼각형을 이루는 건 아닐 것이다. 그건 아마도 단단한 두 아이가 속도를 잠시 늦춰준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이 주는 축복의 결정체가 사랑이 아닐까. 사랑에 대해서는 사실 지금도 나는 눈꼽만큼도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랑은 정의할 수 없는 동사인 것은 분명한 듯하다. 한낱 필설(筆舌) 따위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 행동을 통해 표현되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생각. 그게 이성 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든, 자신을 향한 사랑이든, 온 힘을 다할 만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간절하게 그와 동화되길 바라게 된다. 기러기 두 마리는 뒤쳐진 한 마리의 눈으로 세상을 본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두 마리의 기러기는 스스로 단단해져야만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사랑은 자신을 향한 사랑이 아닐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을 전할 수 있고, 타인의 사랑이 흔들려도 스스로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갖지 못한 것을 타인에게 줄 수 없고, 스스로를 버린 사랑은 모래성처럼 비바람을 견딜 수가 없다. 사십 대가 되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정원일을 시작한건, 어쩌면 나를 향한 사랑의 행동이었다는 생각.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의 삶에 대한 연민으로 단단하게 붙잡아주고 싶었으니까. 결국 이러한 소소한 행동들의 변화가 일상을 바꾸었고, 달라진 일상이 나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의 인생이 되었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을 바꿀 수는 없어도, 적어도 자기 자신만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 공포와 증오, 그리움을 동력삼아 나아가는 대는 한계가 있으니까.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문 중. -
할아버지들은 오늘도 어딘가를 향해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씩씩하게 걸어간다.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팔십이 다 된 노인들이 저리도 활기찬 건, 내일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고,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길지가 않다. 쓰고, 가꾸고,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 삶이다.
죽음이 다가오길 기다릴바엔 나는 무엇이더라도 가능성에 걸고 싶다. 내 삶에 대해 책임져야 할 의무가 나에겐 있으니까. 그리고 이건 내가 시작한 이야기니까.
덧. 얼마 전에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삶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잠기게 되더군요. 그 영화를 보며, 나는 무엇을 했던가를 떠올렸습니다. 쓰고 가꾸고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희석된게 아닌가 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고, 그 힘으로 타인을 사랑하며 살아가길 소원해 보는 밤입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