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톱을 바짝 세운 고양이에게 무슨 기습이라도 받은 것처럼, 열감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구름이 없어도, 겨울의 햇볕은 여리다. 아까운 주말의 아침인데, 옅은 햇살만큼이나 몸이 좋지가 않다. 한 해를 돌려보내기 위한 거창한 모임들에 연일 불러다녔다. 총기 흐린 눈으로 거울 속 한 사람을 바라본다. 전 날의 과음 탓에 얼굴도 부었고, 목소리도 부었다. 흉곽 너머에서 희미한 통증이 밀려온다. 내 안의 어떤 것들이 목구멍에서 역류해 올라오는 것만 같은 고통. 글을 쓸 때나, 얼마간 글을 쓰지 않을 때면, 비슷한 통점이 발 끝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여기저기서 검버섯처럼 피어나곤 한다. 하지만 사뭇 닮은 듯한 통증들의 모양과 온도는 확연히 다른데, 오늘 내가 견뎌야 할 통증은 유흥에 질척거리다, 사색하지 않음으로 인한 자책에 베인 상처다. 베어낸 살점이 내 안의 어느 부위에서 도려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럴 때마다 드는 기분은 무기력감과 자괴감이다.
'나, 이렇게 시간을 탕진해도 되는 건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겨울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정원가를 고통스럽게 한다. 시를 중얼거리다 놓아두었다. 단문을 끄적이다 내버려두었으며, 소설을 이으려다 그만두었다. 나무들과 오래 서 있지도, 산책도 하지 않았다. 건너편 할아버지들의 입담을 듣지 못한지도 오래다. 그래. 나는 며칠째 단 한 문장도 쓰질 못했고, 자연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시간을 허투로 소비하며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인데, 이런 중압감에 걸린 문장은 그저 입 안에서 맴돌다 넘어질 뿐이다. 나태함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는데 시간을 스치듯 지나쳤으며. 내가 올해 가까스로 한 일인 출간을 방패 삼아 핑계를 쫓으며 이리저리 시간으로부터 도망다녔을 뿐이다. 치졸한 자기합리화의 약은 이럴 때면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만둔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고통은 사는 일에,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곤 한다. 고통 속에서 단맛을 찾는 일이, 흐릿한 행복을 찾는 일보다 빠르다. 무거운 머리를 세우고, 주섬주섬 가방 안에 책과 노트북을 우겨넣고서 시골로 향한다. 나목(裸木)들이 줄지어 늘어진 풍경은 을씨년스럽기만 하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도로에는 차량들이 길게 정렬되어 있다. 대로를 따라 늘어선 불빛들은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다, 도미노처럼 밝혀지는 붉은 후미등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 빛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대열이었고, 나에게는 하나의 고난처럼 여겨진다.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고난과 의지에 합류한다는 근거없는 이유만으로도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이 일어선다. 그건 안심이었다. 그저 시골을 향해 출발한 것뿐이지만, 삶의 엄혹한 질서에 동참한 것뿐이지만, 어느새 마음은 고요하고, 정신은 자유롭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불가해한 영혼의 편안함이다. 이걸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십 대인 지금의 나는 행복한가. 사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눈곱만큼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런 기분과 닮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유희와 쾌락, 욕구의 해소는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떠한 고통도 없는 지금의 나를, 나는 행복하다 적겠다.
빨간 후미등 불빛은 각자가 향해야 할 곳으로 우회전을 하거나, 자회전을 하거나 또는 직진을 하며, 의도와 목적을 분명히 한다. 세상에 산재한 삶의 의지를 목도하는 기분.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니라 여겨지는 일상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누군가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색을 함으로서, 동시에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태생적인 감수성의 그늘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워져도 상관없을 어떤 시간들이 비로소 내가 쓴 감성으로 인해 서랍에 가지런히 보존된다는 사실에 나는 사뭇 만족스럽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숭고함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의미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가고 있다는 나의 의지가 느껴지기에, 비록 비루한 취미이지만 다행이라 여긴다.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듯한 망막함만큼, 사람을 두렵게 하는 건 없으니까. 이야기가 끝이 없거나,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때, 이야기는 무서워진다. 수많은 선택과 불확실한 결과들, 짓누르는 인내와 뼈를 깎는 헌신들, 뻐근한 사랑과 허망한 이별을 아무런 의미없이 작별해야 한다면, 살아야 할 이유조차 온데간데 없이 멀어지고야 만다. 지난한 삶의 고행은 어쩌면 의미찾기의 다른 이름이다. 특히나 하얗게 잿더미가 된 듯한 겨울은 의미를 향한 정신적 노동을 조금만 게을리해도 몸도, 마음도 쇠락해지기 십상이다. 사십 대에 정원가가 된 후로 겨울이 찾아올 때면, 분주하게 정원일을 할 때 생산되었던 지난 계절의 정신적 풍요로움은 가뭇없이 사라지곤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정신적으로 충만하거나, 자유로운 것은 아니니까. 나태함에는 나태함의 관성이, 부지런함에는 부지런함의 관성이 있음을 이젠 잘 안다. 그래서 주말에 침대에 누워있는 일이 두렵고, 버겁기만 하다.
'내가 두려운 것은 오직 한가지. 나의 고통이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
겨울에 정원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늘을 바라보는 일인데, 그럴때면 주어진 계절의 몫을 깨닫곤 한다. 겨울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인데, 상실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한다. 하지만 의지를 조금 내어볼 수 있다면, 잃어버린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은 아마도 잃고 나서야 외양간의 소중한 의미를 깨우친 농부의 마음이라는 생각. 캄캄한 겨울에 정원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별로 없다. 기도라도 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날씨를 점치는 일이 고작이다.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비도, 눈도 멀기만 한데, 올해 십이 월은 너무 가물어서 생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무자비한 바늘같은 바람만이 세차게 오고가고, 미약한 태양은 세상을 품어낼 힘이 없으며, 얼음같은 땅은 실핏줄조차 뻗어나갈 길이 없다. 채마밭에는 생명의 기척이 털끝만큼도 남아있지 않으며, 빗자루를 닮은 나무들만이 온힘을 다해 우듬지를 하늘에 펼친다. 자그마한 습의 흔적조차 없는 이번 겨울은 가히 잔인한 시련이라 적어야 할는지도. 다가올 봄에 꽃이 피어나긴 할까.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긴 할까. 이미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사나운 불확실성에 게으른 정원가는 눈을 감을 뿐이다. 사십 대를 지나면서 신체와 감정의 노화 뿐만 아니라, 세월이 쌓은 퇴적층의 두께 때문인지, 사소하지만 기쁜 일에 대해 예전처럼 크게 기쁘지가 않음을 느낀다. 나이가 들수록 불확실하거나 고통스러운 부정적 감정들을 훨씬 많이 경험하는 것만 같은데, 그건 기쁘거나 즐거운 일은 쉽게 소멸하거나, 미소하게 느껴지지만,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신에게만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하는 질문에서부터 확산되고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 인정과 욕망의 해소, 건강과 화목. 이런 것들은 사실 소유했을 때는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망실했을 때는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무탈하게 생활할 땐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지만, 긁힌 상처에는 아주 쉽게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고, 수많은 도움에는 익숙하지만, 단 한번의 거절에는 쉽게 서운해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기에 행복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거나, 항상적이지 못하다. 고통은 선명한 현실이 되고, 행복은 희미한 과거로 치부된다. 행복은 가깝고 고통은 멀리 있으나, 행복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고통에는 눈을 부릅뜬다.
행복은 왜 나만 피해가는가하는 가여운 자기연민은, 그래서 사실 망각이 펼쳐놓은 최면이다.
살아가면서 마주해 달려오는 시련과 고통들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리 도망쳐도 부지불식간에 나의 목덜미를 휘어잡고서 가차없이 뺨을 후려치던 순간들. 그리고 그것들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심지처럼 작은 의지들이 수없이 실뜨기를 해왔다. 시련이 있었기에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감빛 스웨터같은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시련은 새장처럼 나를 가두어 자유를 억압하곤 하는데, 공포, 두려움, 고독, 비참함. 이런 것들이 나의 주변에 벽을 세웠다. 새장 안에서 굴복하든지, 그곳에서 벗어나든지. 그건 내가 가진 조금의 의지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시련과 고통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질문 같은 것이다.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삶을 완성시키는 불가결한 질료라는, 이 끔찍한 진실을 되뇌인다. 수많은 겨울의 낮과 밤을 지나, 어느날 겨울의 끝에서 봄비가 일렁인다면, 나는 단언코 행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단지,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봄과 함께 해야할 일을 하며, 정원을 가꾸는 의지가 강렬해질 것이라는 믿음만이 있을 뿐이다. 뜨락을 덮어둔 비닐이 세찬 바람에 찢겨 나부끼기에, 찬연한 봄을 위해 다시 단단히 고정시킨다. 이건 반드시 내가 완수해야만 하는 일이다.
겨울이 깊을수록, 봄의 축복은 가깝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니까.
건너편 할아버지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턱을 조금 들어 조금 먼 곳을 살펴본다. 여느 때처럼 세 사람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조붓이 술잔을 기울이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간다.
'추운데 다들 잘 지내셨어요?'
'매일 불피워두고 모여서 막걸리 한잔하느라, 우리는 추운지도 모른다. 이러라고 겨울이 있는거고, 이렇게 있다보면 겨울도 금세 지나가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고.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정할 삶의 현자들이 할아버지들이라는 생각. 그들에게서 겨울의 시련이나, 고통은 보이지가 않으니까.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힘은 고통을 잘 견뎌 내는 정신적 충만함에 있는 것만 같다. 똑같은 겨울의 중심에 서 있는 정원가이지만, 할아버지들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계절을 견뎌내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으며, 묵묵히 살아갈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차가운 계절을 탓하고, 바쁘다는 변명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무심한 삶에 대해 낙관에 가까운 기대를 하지 않고,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을 향햬 매몰되지 않으면 고통은 줄어든다. 행복이라 착각하는 수많은 욕망의 해소를 위해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소진 활동이 아닌, 얼마되지 않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쓸때, 삶은 고요하다. 지금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일, 내적인 충만함을 위해 독서를 하는 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대화 안에서 의미를 찾는 일. 행복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은 모르지만,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상태는 고작 이런 것들이 아닐까. 행복과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근거없는 낙관만큼이나, 모호한 문장은 없는 듯하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와 그 의지를 놓지 않으려는 정신적, 육체적 강건함이 삶을 관통하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방정식을 허공에 끄적인다.
서재에 가만히 앉아 빛을 잉태한 투명한 어둠을 응시한다. 찰나의 감정과 이어지는 사유를 끄적이며, 내 고통의 근원을 탐구한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수줍게 적은 자그마한 편지. 나의 어깨를 잡는 연약한 손길. 우체부의 낡은 오토바이 소리. 누군가의 다정함을, 나는 그리워 한다. 그렇지만 다정함을 그리워한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리움은 반드시 이유가 있으며, 나는 이유를 낚기 위해 시간을 잘게 분절해서 사용해야 한다. 내 고통의 근원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에도 게으른 나를 발견할 때이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는 것도 아니며, 삶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멈춘 좌표 안에서 나도, 나의 삶도 동결되는 것 뿐이니까. 얼어붙은 시간은 나에게 어떠한 우연과 필연도 허용하지 않으며, 의미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사십 대의 시계는 빠르게 배터리를 사용하고, 텅 빈 시간은 그저 속절없이 흘러간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삶은 강물이다. 너무나 거대해서 흘러간다는 걸 누구나 망각하고 살아가지만, 언젠가 그 누구도 예외없이 바다를 맞닥뜨리게 되고, 시간에 배반당한 듯한 표정을 짓게된다.
'나, 무얼하며 살았던가.'
무정형의 빛이 산허리를 푸르스름하게 감싼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되었다지만, 인간이 발명한 시계의 태엽이 재배열 되는 소리에 흥분하는 것뿐이다. 박명의 빛을 데려온 붉은 저 태양은 어떠한 소란도 없이 어제와 동일하게 찬연하다. 그건 말라버린 나뭇가지들도, 비상하는 왜가리도, 배고픈 고라니도,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크든, 적든, 순수한 시간의 흐름은 기계적인 시계 따위에 있지 않다. 공간의 이동에서 태어난 우연과 필연, 그로인해 변화된 내 안에서, 순수한 시간의 흐름은 발견할 수 있다. 사십 대가 되어 자주 잠식당하는 불편한 최면 중 하나는 지금껏 무얼하며 살았기에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을까하는 쓸모도 없는 자책이다.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이 그저 빠르게 증발해버린 유리잔에다, 유해하기만 한 자책을 가득 따르는 것이다. 새해의 첫 날, 나는 시간을 낚고 자책을 지우기 위해 가까운 포항의 어느 책방으로 향한다. 좌표의 이동이자, 온전한 시간의 흐름이 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를 지나간다. 시간을 온전히 사용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기분에 차안 가득 평온함이 흐른다. 포항의 단아한 책방에는 갓씻은 푸성귀처럼, 싱그러운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책 읽는 자에게서 맡아지는 고요의 향기. 그 향기는 아무리 맡아도 지루하지가 않다.
'결례가 아니라면 제 책을 새해 선물로 드려도 될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는 그토록이나 보고 싶던 다정함을 만나고야 만다. 비로소 평온한 시간의 흐름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 모든 만남은 떠내려옴과 건짐의 오래된 신화라는 '쿤데라'의 말을 되뇌인다.
그들은 떠내려 온 나를 건졌으며, 아마도 이 순간은 오랫동안 행복이라는 이름이 되어, 다시 찾아올 정체 모를 고통을 밀어내 줄 것이다.
바닷바람을 따라 비릿한 냄새가 나를 간지럽힌다. 주차장을 향해 계단을 오르며, 책방에서 만난 맑은 순간을 떠올린다. 새해의 다짐같은 것을 끄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단을 오르는 다리에 조금 더 힘을 주어본다. 계단을 오르는 일은 목적성과 의지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일인데, 새해의 첫 날에 만난 계단은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압도적인 중력을 거스르며 계단을 오르다 보면, 너무 힘이 들어서 가끔은 주저앉아 쉬기도 하지만, 우리는 계단을 쉴 새 없이 오른다. 때로는 고되고, 슬프기도 하지만, 올라야만 하는 일이니까. 사무실을 향해 오르는 계단, 누군가를 만나거나, 보내기 위해 오르는 계단, 사랑하는 이를 축복하거나 애도하기 위해 오르는 계단, 광활한 세계와 자유를 바라보기 위해 오르는 계단. 이 모든 계단이 시작된 곳은 어렴풋하지만, 모든 층계의 하나하나에는 한 시절의 땀과 눈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올해도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금의 슬픔과 조금의 의지를 담아 나는 올라야 할 것이다. 오르지 않으면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건 내가 시작한 이야기니까. 늘 그랬다. 힘겹게 올라도 결과는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계단이었으니까. '릴케'의 말처럼, 계단을 오르며 우리가 완수해야 할 고통과 시련은 그 얼마일까. 하지만 우리가 오르고 내리던 흔적들이 우리의 한 시절을 건널 수 있게 했음을 또한 잘 안다.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계단을 오르는 고단한 눈빛에도 따뜻한 햇살은 언제나 머물렀다는 걸. 그리고 어쩌면 그게 행복이라는 걸. 나의 계단은 오직 나만이 오를 수 있다. 그래서 특별하고 아름답다. 그러니 가슴펴고 당당하게 오른다. 며칠 후, 책방에서 만난 그들의 메일이 나의 발 아래로 배달되었다.
'그날 저희 자매는 밤 늦도록 작가님의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뜻깊은 하루를 선물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카프카는 그의 마지막 일기에서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냥 오는 것은, 이유도 없이 가는 것은, 그저 다시 오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만이 삶을 채우는 것이다. 정원은 언제나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기에, 끊임없이 가꾸어야 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흔들리면서도 전진한다.
이것이 삶의 행복이다.
덧. 온도가 연일 영하로 내려갑니다. 지금 가진 것의 소중함을 깨달으니 따듯함이 느껴집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