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내 앞에 있었으나. 나는 봄이 왔음을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햇살이 앉은 도시의 거리를 내려다본다. 주말이라지만, 여전히 버스는 달리고, 거리는 사람들로 부산하다. 삶은 나와는 상관없이 그저 앞을 향해 달려간다. 두 달 이상, 네다섯 시간의 수면을 책임지던 오피스텔의 낯선 공간을 둘러본다. 만년필도, 식기도, 창을 지나는 노란 햇살도. 무엇하나 달라진 것 없이 고요하다. 일터의 프로젝트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갈된 나에게 세상은 도무지 관심이 없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이 사실은 언제나 진리였으나, 나는 자주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삶은 강물의 물줄기가 되어 각자가 흘러가는 거니까. 흘러가다 누군가에 의해 건져지는 일은 그래서 기적이라는 생각. 나에게 영감을 주곤하던 멀리 떠있는 팔공산의 능선과 가까이에 걸어가는 신천의 물줄기도 오늘따라 아무런 말이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이 괜스레 서운하고 서럽다. 테이블에 앉아 입을 반쯤 벌리고, 좀 더 먼 곳을 바라본다.
- 사는 일은 왜 이리도 고달픈가.
자학적 수치심인지, 자기폄하에 가까운 한탄인지 모를 쓸데없는 서러움에, 엄동설한의 나뭇가지처럼 마음은 툭툭 꺾인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건, 선택의 무게 앞에 나약해서다. 비록 내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회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나에게 주어졌으니,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스스로를 타이르며 벗어나지 않는 것 또한, 사실 나의 선택이다. 그러니 후회할 것도, 책망할 것도 없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선택의 책임과 결과의 무게를 견디는 힘이고, 그 힘은 정신력에 있다는 걸, 잘 안다. 정신이 나약하니, 일상은 혼탁하다. 잡스러운 생각에 어지럽고, 불필요한 인연에 기진하다. 읽지 못한 책을 펼치고, 차마 쓰지 못한 글을 써야 한다. 무엇보다 자연과의 교감이 필요하다. 자연은 마음의 소롯한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니까. 마음이 지치고 무겁다고 해서 무기력하게 있기에는 내가 가진 시간의 양은 희소하니까. 저물녘의 논두렁 길을 하염없이 걷던 기억이 아주 옛 일처럼 느껴진다. 다시 돌아온 나의 계절을 위해 얼음처럼 동결된 몸과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무기력감과 소모전을 벌이기에는 아깝기만한, 억장이 무너질 듯한 봄이 내 앞에 당도해 있으니까. 사십 대를 지나며, 같은 모습의 이런 다짐들이 부쩍 늘어나게 되는 건, 시간은 맹렬하게 추적해 오는데, 달릴 수 있는 내연기관은 노쇠해졌기 때문이다. 낡은 엔진의 기름 때를 시도때도 없이 닦아내 보지만, 세계와의 경계에서 사십 대의 피로와 패배감은 수시로 찾아와 겨울바람처럼 나를 뒤흔든다.
어느새 입춘(立春)과 경칩(驚蟄)은 멀어지고, 춘분(春分) 마저도 지나가 버렸다. 사십 대의 시간은 빨리 흐른다지만,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한동안 절기 조차 잊고, 정원가가 아닌 노예처럼 살았다. 일의 노예였고, 인연의 노예였다. 아니. 그 무언가의 노예였다. 명분이 아무리 정의롭거나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져오는 수많은 결과들 앞에서는 초라해지고야 마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 연일 전쟁에 대한 속보로 세계가 소란스럽다. 타다 남은 뼛조각들 앞에서 어떤 명분을 봉헌해도 초라해질 뿐이다. 죽음이 죽음을 잇대어도 그 안에 개인의 삶은 없으며, 어떤 것으로도 보상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터의 일이나,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이 천사이거나, 악마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젠 누군가의 단정짓는 문장과 명분의 그림자를 드리운 말들이 거슬리며, 거슬리니 견디느라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사실 두 달간 내가 해 온 일과 관련해 정치도, 언론도, 사람들도, 말들은 자욱했으나 아득하기만 해서 그 말을 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개속을 헤매는 것처럼 의미가 희미하면, 길은 사라진다. 근본은 없고 책임은 전가되니, 말들은 허공에 흩어지고 행동은 속박된다. 추측성 말들을 추측성 말들로 되받아치는 일을 보고 있으니, 헛것이 헛것에게 스스로가 진짜라며 우기는 것만 같다. 헛된 말들의 사실을 확인하고, 의미없는 말들을 따라 서류를 작성하며, 근거없는 말들에 반박 자료를 만들지만, 무의미한 것에 흔들리니 내가 하는 일도 무의미할 수 밖에 없다. 한껏 고양된 숭고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어떤 사명감이나, 최소한의 의미조차 찾아볼 수 없을 때, 그 일은 마침내 무서워진다. 의미조차 알 수 없는 무서운 일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알아채기라도 할 때면, 스스로 경악하기도 한다. 그리고 경악스러운 덧없음은 그 자리에 초라한 시간의 봉분을 만든다. 일이든, 인연이든 모든 것이 죄다 그렇다.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 시간은 결국 무덤이 되고야 만다. 그런 말들의 무덤 안에서 마치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두 달 남짓 일에 매몰되었다. 두 달여의 기간 중 가장 목가적인 시간을 떠올리자면, 유감스럽게도 다른 사람들과 농담을 하거나, 한숨을 쉴 때였다. 밀도 높은 긴장감과 넘쳐흐르는 환멸이 일상이었으니까. 누군가를 혐오하고, 나를 싫어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데, 언제는 삶이라는게 나의 뜻대로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만두자. 여전히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고, 말은 무성하며, 일을 둘러싼 말들은 정쟁으로 변질되고 있지만, 얼마가지 않아 재미를 잃은 사람들은 다시 말을 만들기 위해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언젠가 이 시절을 떠올리며 어떤 말을 뱉고 남기게 될지 나는 벌써 두려워진다. 두려움과 공허함 안에서 나는 나를 지켜야 한다. 일이든, 인연이든 나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다시 전진할 수 있으니까.
사십 대이지만 아직까지는 안식이 체념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비록 봉분일지라도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춘분이 지났다. 낮과 밤이 같을 때, 꽃들은 세상 모르게 피어난다. 자연의 이치를 가시적으로 표현한 절기에는 삶과 의미가 담겨있다. 일이든, 사랑이든, 인연이든, 외부의 세계와 개인이 조화로울 때, 삶에는 봄이 찾아오고, 꽃이 만개한다. 단 한번뿐인 삶을 쓸데없이 무성하기만 한 말들이나, 아무것도 남지 않는 칼바람 사이에서 어쩔줄 몰라 방치할 때, 겨울은 겨울을 덧댄다. 언어를 이용해 자해하고, 타인을 해하며 혹독한 겨울을 이어갈 뿐이다. 여전히 일터는 소란스럽지만, 오늘은 불가능하더라도 더 늦기 전에 겨울을 끝내고 봄을 맞을 채비를 해야 한다. 자신과 세계 앞에 기울지 않은 저울만이 쉽지 않은 사십 대를 지탱할 테니까.
시골 아침의 첫 햇살을 쪼인다. 따갑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시골의 아침 햇살이 묵은 논을 비춘다. 땅이 녹은 묵은 논 사이를 오랜만에 있는 힘껏 달린다. 철없는 새싹들은 수줍고, 먼산의 낯빛은 순하다. 봄은 가까이에서 다가와 멀리서 성숙한다. 건너편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손을 들어 가깝게 안부를 물어온다.
- 잘 지냈는가? 한동안 안보여서 걱정했다.
- 별 일 없으셨어요? 회사 일이 바빠서 한동안 못왔어요. 저녁에 막걸리 사서 놀러갈게요.
봄을 닮은 다정함과 순수함이 담긴 언어. 단순하지만 진실되고, 투박하지만 화사하다. 안부는 있으나, 욕망은 없으며, 화려한 정치적 수사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전문 용어들의 현혹됨이 없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이고 환함인지. 하늘은 파랗고 산수유는 노랗고 매화는 하얗다. 하지만 채마밭이며 정원이며, 모든 게 엉망이다. 겨울의 사나운 바람은 오래 전에 다녀갔으나, 나는 이제서야 그 값을 치룬다. 지줏대들은 모두 쓰러졌고, 흙 위에 덮어두었던 보온 비늘은 찢기고 널브러져 있다. 정원등은 깨지고, 조형물은 흩어졌다. 정원가에게 있어 삼월은 가장 바쁜 시절인데, 나의 무심함과 회사에 매몰된 일상이 일을 키운 것이다. 무심함을 속죄라도 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 나... 다녀왔어.
한때는 정원가란 장미꽃에 얼굴을 들이밀고, 단정한 앞치마와 함께 품위있는 나무쟁반을 허리에 끼고서 나비와 종달새들과 노니는 사람이라 여기기도 했었다. 정원가가 되고 몇 해가 지나는 동안, 그런 낙관적인 환상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으나, 이번처럼 오랫동안 정원을 비워둔 적은 없었기에 어지러운 풍경은 사실 재앙에 가까운 충격이었다. 말 그대로 환장할 것만 같은 봄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정원일을 왜 하는가.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던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백여 년 전에 한 말이니, 주어가 여성에 국한될 필요는 없을 듯하고, 목적어인 소설은 그녀에게 이루고 싶은 갈망이었으니, 꿈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좋을 듯하다. 정원은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인 것이다. 자아를 들여다보고,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 나는 이곳에서 현재를 고민하고, 이상을 그린다. 나는 여전히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고요한 시골에서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내가 기른 채소와 과일들로 하얀 쌀밥을 지어먹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산책을 하거나, 오래된 나무 냄새를 맡으며 글을 쓰는 삶을 꿈꾼다. 지금은 평일에는 도시에서, 주말에는 시골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모든 일상이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그려본다. 그릴 수 있는 미래가 있어 다행이라 여기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꿈을 미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라는 말로 오늘의 행복을 훗날로 미룬다. 행복하지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다고 자위한다. 이별이 두려워 사랑하지 못하고, 세상의 시선이 불편해 나를 지워버린다. 경험에 의지하면서, 동시에 경험에 구속된다. 비일비재하게 떠올리는 무서운 일들이지만, 더 무서운 건, 그걸 가끔 의식조차 하지 못할 때이다. 주로 일터에 매몰되었을 때, 이런 일이 생기곤 하는데, 글을 쓰며, 다시 이상을 의식하고 다짐하곤 한다.
의식하고 다짐할 수 있는 공간이 나의 정원인 것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돈이 나의 일터인 것이다.
노랗게 살이 오른 산수유를 한참동안 바라본다. 무엇부터 해야하나.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평상에 걸터앉아 애꿎은 발만 구를 뿐이다. 내가 영혼이 없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삼 십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는 수많은 식물들이 언어를 만들며, 각자의 소명을 다했던 것이다. 나무들은 땅 속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 올리느라 분주했을 것이고, 씨앗들은 중력을 거스르며 몸을 비틀었을 겄이다. 새순은 시시각각 살이 오르고, 햇살은 하루가 다르게 도타워졌을 것이다. 얼마나 기다리던 소리였는데,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와 줄 언어였는데, 나는 진실과 생명이 가득한 언어 대신, 헛것들의 소리에 귀기울이느라 부산했다. 자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 꽃을 피웠고, 나는 눈에 보이나 허황된 말들로 시간을 죽였다. 하는 일의 허무함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매화 사이에서 분주하게 꿀을 나르는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점차 요란해 진다. 문득 꿀벌들은 모르겠지만, 분명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 의미있는 일을 하면서도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매화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데, 나는 두달 남짓, 일의 그림자에 숨어 자기만의 방을 미루었다. 하지만 소속감과 사회적 관계, 매월 정확한 날짜에 정확하게 지급되는 보수가 있어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앞으로는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별 것 아니라고 여길지는 몰라도 그런 기대감이 알게 모르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동력이 되곤 하니까. 지금 나에게 지난 두달 여의 시간이 이렇게나 허무하게 다가오는 건, 낮이 사라져서도, 밤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십 대에 있어 일과 삶의 균형은 남아있는 나날의 모습을 결정한다.
지난해 늦가을에 심어두었던 튤립과 무스카리, 수선화에서 도톰한 싹이 올라왔다. 릴리는 올해도 조금 늑장을 부릴 듯하지만, 늦게 피어나는 만큼 그 아름다움은 놀라우리만큼 반갑다. 지난해 심은 나무작대기 같던 산수유 두 그루도 걱정과 달리 첫 겨울을 잘 이겨내고, 노란 꽃을 건강하게 피워냈다. 매화는 자신의 시절을 충분히 누리며 만개하려 하고, 자두와 살구, 앵두와 복숭아, 벚나무와 목련도 새순에 살이 바짝 올라 봄을 터트릴 준비를 마친 듯하다. 겨울은 여지없이 죽음을 불러오지만, 단호하게 흙으로 돌아간 죽음은 이렇듯 다시 봄을 소생시킨다. 자연이 말해주는 생의 진실이지만, 안타깝게도 자주 잊고 살아간다. 묵은 논은 죽어 있지만 곧 살아날 것이며, 살아있어도 다시 죽어야만 하는 냉정한 순환의 법칙을 자연은 침묵과 행동으로 가르친다. 묵은 낙엽과 지푸라기를 걷어내고, 채마밭을 일구며 생각한다. 찰나에 불과한 이 삶에서 사십 대인 나에게 차마 놓을 수 없는 일터는 어떤 의미인가. 나는 무엇을 잘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저 관료제적 습성이나, 숨어있는 욕망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꿀벌처럼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이미 늦었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조직에도 수많은 일이 있기에 지금이라도 나를 객관화하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 실패하고 깨닫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면, 시간이 느린 청춘일 때가 가장 좋겠지만, 가을에 접어든 사십 대에도 의미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십 대는 겨울을 준비하고, 다시 봄을 피워낼 수 있는 결정적 시기이니까. 욕망이 충족될 때 사람은 기본적으로 행복이라 기만된 일시적 만족감에 도취된다. 하지만 이러한 만족감도 나이가 들수록 줄어들 수 밖에는 없는데, 욕망이 기본적으로 줄어들 뿐만 아니라, 줄어든 욕망조차 충족될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타들어갈 듯한 사랑도 없으며, 인간관계와 삶에 대한 열망도 식었으며, 낙관과 용기도 옛 일이 되고, 심지어 친구나 가족들도 사라진다.
잔인한 운명에 저항하며 나를 지킬 수 있는 방을 만드는 일. 그리고 그 방을 만들기 위해 최소한의 현재를 희생시키는 일. 사십 대인 내가 정원을 가꾸는 이유다.
시골의 이른 밤은 고요하지만 소란하고, 캄캄하지만 환하다.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첩된 이 기분이 사뭇 만족스럽다. 할아버지들과 마시는 막걸리도 무겁지만, 가볍다.
- 할아버지, 겨울은 풀 한포기도 없이 너무 스산해요.
- 꽃이 없긴 왜 없나. 이 사람아. 겨울 꽃도 있어. 저거 설강화라는 꽃인데 겨울에 한참 추울 때 핀다. 저거 캐다가 심어라. 겨울도 환해지게.
1월에 핀다는 설강화. 휴대폰을 열어 검색해 본다. 차가운 눈밭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꽃을 피우는 모습때문에 꽃말이 희망과 순수라고 한다. 내 삶의 겨울이 조금씩 다가오지만, 내가 만들어가는 자기만의 방에서 나는 조금씩 성장한다. 겨울이라도 꽃이 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타협하며, 나의 사십 대를 가꾸어 간다. 뒤돌아보면 헛되다 한 것들조차 지금의 나로 키워온 것이니, 사실 세상에 헛된 것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헛되다 여긴 것에서 무언가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삶의 기쁨과 슬픔은 모두 눈부신 일일 거라는 생각. 겨울에도 꽃은 피어난다. 다만 내가 몰랐을 뿐.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할 길이 있다면, 화려한 도시의 아스팔트보다 소박한 들길이었으면 좋겠다. 가끔 활짝 핀 야생화 앞에서 쪼그려 앉아 삶을 나누며, 하루를 감사하게 닫을 수 있는 길이길 바라본다. 봄이 왔음을 이제야 알겠다.
덧. 오랜만에 시골에서 묵은 밭을 정리하고, 서재를 청소했습니다. 겨울이 있기에 봄은 더 아름다운 듯합니다. 봄처럼 화사한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