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아주머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 아...흑... 민수 학생이... 나와 술을... 마시다가... 나를... 겁탈하려 했어...
- 민수 형이요?...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 아... 아니... 울고 있어서...
- ... 네?! 그게 무슨 말씀이...
- 자기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울고 있었다구...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말을 딸꾹질까지 섞어가며, 그녀는 꾸역꾸역 발음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그녀를 대신해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신고하려 하자, 아주머니는 굽혔던 무릎을 일으켜 나의 팔목을 황급히 잡아당겼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민수 형을 향한 알 수 없는 연민이 느껴져 휴대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적의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아니 오히려 동정의 감정이 강하게 느껴지는 듯한 그 눈빛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흔적이 닿기라도 할까봐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엎어진 상을 바로 세우고, 깨진 유리와 사기 조각들을 쓸어 담았다. 그는 아주머니의 비명소리에 한순간 얼음기둥처럼 멍하게 앉아 있다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아주머니와 술을 마시다 술에 취한 것일까, 기분에 취한 것일까, 그는 무언가에 미쳤거나, 홀린 것 같다고 했다. 아주머니의 늘어진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하얀 목과 팔에서 번져가는 핏멍 주변을 흘깃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 그러게 왜 두 분이서 술을 드셨어요...
- 민수 학생이 힘들어 보여서... 그리고 상헌 학생은 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다면서...
책망하는 듯한 나의 말에, 아주머니의 대답은 목구멍 안으로 되돌아 들어가듯 흩어졌다. 그런 아주머니에게 미안함이 섞인 무안한 마음이 일어났지만, 이내 나와는 무관하다 여기면서 내 방인 2호로 들어갔다. 아주머니의 울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책상에 앉아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을 펼치고, 정체 모를 고양된 기분으로 노트북을 열어 관련 판례와 사건들을 검색했다. 민수 형의 행위는 강제추행에 해당했는데, 형량은... 초범이니 아마도 벌금형 정도가 될 거라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질문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선고했다. 친고죄 조항도 얼마 전에 개정되었으니, 내가 신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정의로운 일을 하게 된 것만 같은 기분에 평소와 달리 꼼꼼하게 형법도 살폈다. 부산하게 자료를 살펴보고 검색하다 문득 참고인 진술로 경찰서에 드나드는 내가 떠올라 잠시 동작을 멈췄다.
- 그래. 아주머니가 원치 않는데...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이내 법전과 노트북을 덮었다. 작은 창의 커튼을 닫고서 캄캄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마에 팔을 얹고서 민수 형이 없으니 내일은 늦잠을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겨울의 북풍을 따라 몸을 파르르 떠는 유리창의 비명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다가 설핏 의식이 들어서인지,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그런 일을 겪었는데, 잠이 올 리가 없지...
어슴푸레한 기척을 원씨 아주머니의 것이라 여기면서 어느새 나는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민수 형의 방에서 의자를 끄는 듯한 단속적인 소리가 건너왔다. 민수 형이라 단정지으며 잠을 깨우는 그에게 분노와 비난을 섞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금세 다시 꿈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그래. 형이 갈 곳이 어디에 있겠어.
검은 호수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민수 형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를 몇 번이나 불러보지만, 어떠한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서 있기만 한다. 회청빛 하늘과 검은빛 땅이 구분되진 않지만,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그에게 다가가, 소맷귀를 당기며 말을 건넨다.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캄캄한 입을 반쯤 벌린 그는 초점이 사방으로 번지는 듯한 까만 동공으로 이윽히 나에게 시선을 둔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이어서 위를 올려다보며 굳은 듯한 연보랏빛 입술을 서서히 움직인다.
- 미치기 전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
- 벗어나면 어디로 가려구...
- 글쎄... 지박령만 아니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넌, 나와는 상관없잖아.
- ... 그건...
어떠한 감정도 들여다 볼 수 없는 표정으로 그는 어떤 말을 더하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발아래로 뛰어내린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마치 하늘을 향해 추락하는 것처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를 내지르며, 팔을 뻗어 허우적인다.
- 형! 안돼!
황막한 꿈에 퍼뜩 놀라 안광을 희번뜩였다. 차가운 땀이 베갯잇을 적시고, 힘을 가득 준 양손은 꼭 말아쥐고 있었다. 이마 끝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다리는 소리는 그곳엔 없었다. 오히려 형과 나 사이에 놓인 얇지만, 두꺼운 벽이 마치 동굴 같은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
크리스마스의 오전 열한 시는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열한 시일뿐이었다. 어쩌면 거실에서는 민수 형과 아주머니가 마주 앉아 TV를 보고 있을지도. 민수 형에게 나는 오늘 여자 친구를 만난다고 했으니, 지금은 있지도 않은 여자 친구를 만나러 나가야 했다.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을 외출 준비를 하고서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숨 쉬는 소리마저도 들릴 것처럼 고요했다. 민수 형의 방 앞에서 잠시 서성거리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고, 불안 섞인 기대와 함께 문에 바짝 귀를 가져다 대었다. 텅 빈 항아리처럼 문 너머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관에도 그의 낡은 프로스펙스 운동화는 보이지 않았다.
- 어젯밤에 들어온 게 아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귀에 새끼손가락을 넣어 이리저리 돌렸다. 잠긴 안방 문이 딸깍하며 열리고 푸석한 얼굴의 원씨 아주머니가 거실로 나왔다.
- 상헌 학생. 일어났어?
- 네. 저... 어제 밤에 민수 형이 들어왔었나요?
목에 나사 하나를 잃어버린 인형처럼 아주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얼굴은 광대뼈가 보일 만큼 앙상해져 있었다. 민수형에 대한 두려움일까. 민수형에 대한 걱정일까. 아니면, 동질감에 가까운 연민일까. 어제 그녀가 내게 보여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문득 떠올랐다.
- 크리스마스인데, 혹시 오늘도... 나가니?
금이 간 유리잔처럼 불안이 가득한 그녀의 물음에 약간의 망설임과 조금의 걱정스러움이 일어났으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밥을 차려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그녀를 뒤따랐다. 아주머니를 향한 조금의 미안한 마음은 결국 그 문을 넘지 못했다. 헤어진 여자 친구가 지난해 선물해 준 회색빛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골목길을 따라 아래로, 그 아래로 내려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알기에 그는 갈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신림동을 맴돌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지박령에 가까운 사람. 큰 차도에 이르러 조금은 텁텁해진 공기의 밀도를 느끼면서 도서관 운영시간을 검색하니 오늘은 휴무일이었다. 오늘만큼은 모두가 하나가 된 듯한 전 인류의 휴무일. 당연한 휴무일을 연락 없이 문을 닫아버린 단골 점포라도 되는 듯 나의 입에는 어느새 짜증이 물려 있었다. PC방과 당구장 앞에는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어제 DVD방에서 마주친 사람도 있었다. PC방 앞을 지나다가 앉을 곳을 찾지 못한 잠자리처럼 근처를 맴돌고 머뭇거렸다. 발걸음을 돌려 모여있는 사람들을 지나 PC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DVD방에서 마주친 그 사람의 눈빛과 닿았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내가 어제 그를 향해 느꼈던 동일한 안도감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의 눈빛으로 인해 온라인 영상 강의를 시청할 결심으로 들어가 정해진 38번 자리에 앉았다. 민수 형이 혹시나 있을 까봐 주위를 살피다 게임에 몰입한 사람들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게임에 빠진 사람들의 웃음과 탄식, 욕설과 조롱들로 가득한 들뜬 모습에 자꾸만 시선이 빼앗겼다. 결국 나는 요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긴다는 스타크래프트 자유의 날개에 로그인했다. 오늘은 전 인류의 휴무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게임에 그다지 흥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승부욕이 있는 나는 게임에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가상이긴 하지만 자유를 위해 누군가의 건물을 파괴하고, 자원을 빼앗으면서 나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일을 즐기며, 마치 현실인 것처럼 몰입했다. 대화창에 하나씩 떠오르는 비속어들은 나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는 그들의 고통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내가 패배할 때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화창에 동일한 비속어를 나 또한 입력했다. 비속어들이 주는 쾌감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리라 여겨졌다. 가장 때 묻지 않은 근원적인 언어는 인간의 본능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충족시키는 것만 같았다. 주문받은 컵라면을 전해주기 위해 간혹 오가는 PC방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힐끗 쳐다보다, 나도 손을 들어 컵라면을 주문했다. 나의 자리 38호에 라면과 단무지를 올려다 주는 아르바이트생의 옆모습을 힐끔 올려다봤다. 어떤 샴푸와 향수를 사용할까. 남자 친구는 있을까. 이곳에서 살아갈까. 오늘 같은 날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에게 호기심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나는 수험생이었고, 무엇보다 가난했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경멸 섞인 표정이 떠올라, 이를 지우기라도 하듯 다시 게임에 몰입했다. 나의 자유를 위해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기 위한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인간보다는 게임이 훨씬 믿을만한 존재라 여기면서.
- 지금쯤 민수 형은 하숙집에 있겠지. 지박령처럼.
어제처럼 오늘도 희뿌옇게 번지는 달을 보며 PC방을 나섰다. 여전히 하숙집은 침묵과 어둠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원씨 아주머니도 몸이 안 좋은지 안방에서 잠시 나와 얼굴을 비춘 게 전부였다. 숨소리마저도 들릴 것 같은 적막한 하숙집은 마치 유령들이 사는 것만 같았다. 어젯밤 꿈이 잔상처럼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 내일 독서실 문은 누가 열지... 내일은 나타나겠지.
팔을 베고 벽을 바라보며 모로 누웠다. 내일부터는 예상 문제를 풀어보고, 그다음 날은, 또 그다음 날은... 나름의 계획을 떠올리다 잠에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쿵 하는 둔탁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 문을 열고 나갔다. 아주머니도 들으셨는지 놀란 얼굴로 안방에서 뛰쳐 나왔다.
- 민수 형 방에서 들렸어요. 들어왔나봐요.
- 형. 저 상헌이에요. 안에 계신거 알아요.
소리가 문 너머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주머니는 안방에서 1호실 열쇠를 가져와 방문을 열어젖혔다.
- 아... 악
아주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민수 형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으니까. 이미 굳을 대로 굳어버린 형 옆에는 유서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단 두 줄밖에 되지 않는 유서에서 왜 나는 나를 읽는 것만 같았을까.
- 죄송합니다. 갈 곳이 여기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경찰 조사를 받았다. 최근 그의 행동에 대한 것과 특별하거나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적은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 그리고 책상을 옮겨서 그 위를 딛고서는 동안 전혀 기척을 못 느꼈냐는 질문. 겨우 얇은 벽 하나인데 정말 아무것도 몰랐냐며 다그치는 듯한 질문. 간단한 질문 안에 나를 향한 질타와 그로 인한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명치가 갑갑해지고, 입술은 어렵게 떨어졌다.
- 그는... 평소에도 내세나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으며, 최근에는 지박령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해서 항상 허공에 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아주머니를 겁탈하려다 여의치가 않아 그만두고 뛰쳐나갔었다는 부분을 강조했다. 비록 벽은 얇았으나 잠이 깊이 들어 어떠한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나의 말이 끝나고 키보드를 한참 두드리던 담당 경찰관의 손가락이 멈추자, 출력된 조사서가 내 앞에 놓였다. 서명란에 싸인하라는 경찰관의 지시에 따라 이름을 적으면서, 내가 답한 내용들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비겁함, 자괴감, 책임감, 거짓, 그리고 죄책감. 이런 말들이 조사서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경찰관은 자신의 사건 보고서를 잘 마무리한 듯 숨을 조금 길게 내쉬고 그만 가봐도 좋다면서 무덤덤하게 인사했다. 너무나 빨리 끝난 참고인 조사에 쓸쓸한 기분이 되어 경찰서를 빠져나와, 신림동의 오르막길을 오르며 누군가의 불행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의 불행은 많든 적든, 안도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나는 쉽게 잊어버린 채, 더 많은 타인의 불행이나, 더 많은 나의 욕망을 찾아다니느라 지난 세월의 대부분을 허비해 온 것만 같았다. 독서실 앞에 다다르자 1층 공동 현관 입구에 아르바이트 구함이라는 전단지가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차분하게 눌렀다. 각하된 자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 이 주임... 이거 내가 오늘까지 고치라 했는데, 왜 안 고쳤어?
- 아... 죄송합니다. 다시 기안하겠습니다.
- 자네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이번에 승진해서 이주임 위에 있어... 다시 해서 올려.
민수 형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 방에는 그와 비슷한 모습의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일상은 형의 죽음 전과 후가 다를 것도 없는 모습으로 흘렀다. 아주머니는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동자로 밖만 바라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을 회복했다. 망각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컸던 그날의 사건도 여타의 일만큼이나 기억 속에서 쉽게 사라졌다. 여전히 시간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독서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험을 봤고, 결과에 낙담했지만, 그런 감정조차 옅어져만 갔다. 낙담과 시간의 깊이만큼 근거 없는 낙관과 자기합리화는 짙어져만 갔다. 그러나 폐지가 예정되었던 마지막 사법시험을 끝으로 나는 삶의 핸들을 비틀 수밖에 없었고, 이 년 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급발진 차량은 어딘 가에 부딪치지 않고서는 멈출 수가 없는 거니까.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다시 오 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렀지만, 사실 나의 일상은 주물을 뜬 것처럼, 십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사이 세 번의 연애를 했고, 세 번 모두 비슷한 이유로 무감하게 이별했다. 혼자라는 건 주말에 드라마를 시청해야 하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음을 알려 주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것도 없었기에 연애와 결혼에 관한 생각은 몇 번을 접어서 서랍 속에 넣었다. 매년 같은 계절이 오면 그 시절에 해야 하는 계획서와 보고서를 복사하고 붙여 넣은 후 조금 수정했다. 문단의 시작을 몇 칸 띄워야 하는 지와 마침표의 위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기에 이를 좀 더 세심히 살핀 후, 기안을 상신하고 보고했다. 몇 번 정도 법적인 용어를 들어 상급자의 의견에 반하는 내 생각을 설명한 적도 있었지만, 현실을 몰라서 그렇다는 질책만이 되돌아온 경험들을 통해 이제는 그냥 하라는 대로 생각 없이 일을 했다. 사실 내가 모른다는 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 또한 후배들에게 현실을 요구하고, 그들의 부족한 인사성에 가끔 언짢아지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 여기며 나의 할 일을 했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다른 누군가를 험담하면 그저 동조하고, 그것의 진실과 거짓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집단에서 배제되지 않고, 번창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동조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그를 대체할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으니까. 승진에서 누락된 누군가와 징계를 받게 된 누군가, 작은 실수로 전보 조치를 당한 누군가. 그리고 누군가의 이혼과 불륜, 질병 등에 관한 비밀스러운 사생활에 관한 것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을 때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경박스러워 보이지 않게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서 대화에 참여했다. 그 누군가를 나는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하지만, 단지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 여기며, 나의 승진 가능성을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보며 잠시 점쳐 보기도 했다.
무심히 지하철을 타고, 본능적으로 지하철에서 내린다. 어제와 같은 명도와 채도로 동일한 동선을 오늘도 그린다. 출근길이든 퇴근길이든,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다른 모습이지만, 데자뷰처럼 그들은 언제나 같은 행동을 한다. 그래서 가끔 기억이 뒤섞여 헷갈리기도 한다. 그들을 바라보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나도 그들처럼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지하철에서 나와 신림동에서 보았던 희끄무레한 달을 바라보며 걷는다. 얇고 두꺼운 벽으로 이루어진 이 도시는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날 것 같진 않다. 신림동 하숙집을 올랐던 좁은 골목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기만 하다. 신림동을 빠져나올 때처럼, 상황과 조건과 타의에 의해 비로소 끝이 날 수 있을지도. 오늘처럼 팀장에게 비난을 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건조한 패배감을 느끼며 게임에서 대화창을 열 듯, 민수 형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박령은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로 죽어버린 영혼이기에 그는 지박령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미치지 않고서 자신이 죽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지금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민수 형이 아닌 내가 이미 지박령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가끔 민수 형이 홀연히 나타나 나에게 야쿠르트를 주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때 민수 형의 제안처럼, 형과 소주를 한 잔 나누었다면 그와 나는 지금 어땠을까. 물론 그런 일은 이제 일어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는 나에게 야쿠르트를 건넸고, 두통약을 주었으며, 술 한잔 나누며 대화하기를 원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얇고도 두꺼운 벽을 세워 단절했고 그를 가두었다. 아니, 나는 나를 가두었다.
- 지박령, 같아.
- ... 뭐가요?
- 저기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매일 똑같잖아. 미친 것처럼 똑같아. 그런데 이해가 되. 무언가에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구청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을 무렵 최근에 입사한 신규 직원이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의 삐쭉삐쭉한 모습에 그 시절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볼우물이 팰 만큼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그가 조금의 관심도 없을 내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십 년 전, 독서실 옥상에서 본 나의 눈빛과 닮았음을 의식했다. 패배자를 보는 듯한 조금의 동정 섞인 경멸의 눈빛. 시간도, 거리 때문도 아닌, 알게 모르게 우리 사이에 구축해 놓은 두꺼운 벽이 굴절시킨 눈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달려가고 벗어나려 노력했다 여겼으나, 결국 같은 곳에서 맴돌았던 것이다. 내 안의 소중한 것과 주변의 특별한 것들은 모두 잿빛으로 타버리고 나에게 남은 건, 시간의 의무를 이행한 세월의 잔해뿐이었다.
쿵...
(완결)
덧. 건조하고 파편화된 현대의 개인을 표현해 보려 했는데, 글은 참 어렵습니다. 계속 걷다보면 무엇인가에 닿으리라 믿으며, 그냥 걸어가보겠습니다. 연일 날이 차갑습니다. 건강 잘 챙기셔요.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