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박경수님. 아. 하세요. 아.
- 아...
- 좀 심한데... 너무 방치하셨네요... 하나... 둘... 셋. 세 개나 되는데... 일단 입 헹구시구요.
어둡고 축축한 당신의 입안을 모두 들여다본 의사의 얼굴을 당신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혹시나 그의 표정에서 경멸이나 연민이 읽혀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은 벤젠 냄새가 가득한 의사를 슬쩍 바라본다. 감정이라곤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한 딱딱한 의사의 눈빛에 오히려 안도하며, 하얀 마스크 뒤의 가려진 얼굴을 조금 상상해 보기도 한다. 당신은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어떠한 감정도 전달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빛을 편안하게 느껴왔다. 그 안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르기에 지나칠 수 있는 순간들이 좋았으니까. 오랜만에 가져보는 편안함에 여유롭게 휴지를 두 장 뽑아 입술을 닦으며, 앞에 놓인 십사 인치 모니터에 시선을 둔다. 진료실로 들어오기 전에 당신의 치아를 촬영했던 엑스레이 사진이 눈앞에서 재생된다. 하얗게 채워진 치아들. 그리고 그사이에 텅 비어버린 세 곳의 까만 공간들이 휑뎅그렁해 보인다. 당신은 그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그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자그마한 당신을 발견한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모든 게 죽어버리고 가까스로 뿌리만 살아남아 언제 사그라들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여겨지는 모습이다. 축 늘어진 가운을 입은 의사가 고급스러운 검정색 만년필을 한 손에 쥐고, 재생되는 화면을 짚으며, 하나하나 가르치듯 설명한다. 그의 만년필을 따라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 가끔 의사를 향해 슬쩍 얼굴을 돌리기도 하면서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신호를, 그에게 슬며시 보내기도 한다.
- 앞에 화면 보시면... 거의 뿌리만 남은 거 보이시죠? 셋 다 못 쓸 것 같긴 한데... 가장 좋은 방법은 발치를 하고 임플란트를 하시는 방법이 있구요. 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남은 치아에 보형물을 만들어서 덧씌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까지 어떻게 참으셨어요?... 언제부터 이러신 거에요? 꽤나 아프셨을 텐데.
- 한... 육 개월 전부터... 좀 아프면 진통제 먹고... 그러면 괜찮아진 것 같아서...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 아픈 곳을 제대로 치료 하셔야지... 좀 미련하셨네요.
의사의 질문에 당혹감이 섞인 머쓱한 표정으로 당신은 기억을 더듬어 성의껏 대답한다. 뭔가 잘못이라도 많이 한 사람처럼 서술어는 흩어진다. 의사는 눈 주름을 잡으며 그런 당신을 가늘어진 눈으로 응시한다. 의사의 날카로운 표정에 짓눌려 고개를 조금 수그리고서 의사의 턱과 쇄골 사이의 중간 어디즈음에 시선을 고정한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그의 차가운 표정이 좋았다며, 순간 주눅든 당신은 생각한다.
- 임플란트가 나으려나... 덧씌우는 게 좋지 않을까.
자신 안에서부터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시 고민에 잠긴다. 그리고 큰 결심을 한 기분으로 고개를 조금 들어 천천히 입술을 열고 닫는다. 마치 자신의 결정을 순간순간 꺼내어 다시 확인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 덧씌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될까요?
- 흠... 가능은 합니다만, 어차피 거의 다 썩어서 없어졌는데, 새로 채우시는 걸 권하고 싶네요.
- 그냥... 덧씌우고 싶어요.
- ... 알겠습니다. 그럼 덧씌울 보형물을 만들려면 한 달 정도 걸리니, 그때 다시 방문하세요.
의사는 마뜩하지 않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하고, 차례를 기다리며 누워있던 옆 시트의 환자에게로 이동한다. 이어서 연노란빛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가 당신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보형물 제작을 위해 뿌리만 남은 치아의 형태를 정확하게 떠내야 한다며, 분홍색 반죽 덩어리를 입에 물고 있으라 지시한다. 그녀를 따라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반죽을 끼워 넣고 질끈 깨물어본다. 끈적하고 두텁한 감촉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듯 느껴진다. 당신은 흔적을 더듬고 헤매는 듯한 자신을 떠올리다 좌우로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움직인다. 남은 뿌리는 어떤 모습일까.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조금 궁금해 지기도 한다.
- 자. 입 벌리실게요. 아 하세요. 아.
- 아...
간호사는 당신의 상처를 확인이라도 하듯 입안을 꼼꼼히 살펴보며 보형물을 조심스레 들어낸다. 그렇게 당신이 가진 상처의 형태를 들고서 간호사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진다. 당신은 굵게 흘러내리는 침을 닦으며, 소독약 냄새를 풍기면서 뒤돌아가는 간호사의 단단해 보이는 등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할 일을 다한 자의 냉랭한 뒷 모습에 마음이 조금 서늘해진다. 누군가의 차가운 등은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설게만 다가온다.
당신은 알코올 냄새가 가득한 그곳을 빠져나와 접수 창구의 대기석에서 기다리며 믹스커피를 태운다. 회사에 다닐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믹스커피를 퇴사한 후부터 즐겨 마신다. 가격이 저렴하기도 하지만, 믹스커피가 주는 달작지근함에 알게 모르게 위안을 느끼곤 했다. 종이컵에 담긴 갈색빛 위안을 몇 번 홀짝이자, 데스크의 간호사가 목을 길게 빼어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 박경수 님.
당신을 부르는 무미건조한 표정의 간호사에게 아버지의 낡은 신용카드를 건네며 진료비를 결제한다. 신용카드를 내려다보다 문득 아버지의 노쇠한 얼굴이 떠오른다.
- 저기... 육 개월 할부로 해주세요. 육 개월까지는 무이자인 거죠?
- 네.
간호사는 어떠한 감정도 섞이지 않은 언어로 대답하고, 언어만큼이나 건조한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린다. 이어서 무이자 할부임을 확인하라는 듯, 그녀는 영수증을 데스크 위에 올린다. 한 달 후인 토요일 열한 시에 진료 예약을 하고서, 진통제가 섞인 처방전과 영수증을 들고 병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온도에 당신은 입술을 악다문다. 의식과는 무관하게 자주 이런 행동을 하곤 하는데, 잇몸으로 파고드는 묵직한 압력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곤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생존을 확인한 것만 같은 비슷한 기분을 당신은 어렴풋이 느끼곤 했으니까. 사실 이런 행동은 반년 전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나, 무언가를 실행할 때, 또는 무언가를 단념해야 할 때. 그럴 때면 입술에 파르스름한 자국이 깊이 남아있곤 했다. 하지만 지금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악다문 흔적들이 당신의 입술을 숱하게 다녀가고 있음을. 그리고 그건 견디고자 하는 수많은 몸부림이었음을. 당신은 알지 못한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라 생각하면서, 당신은 정지된 화면처럼 스산한 거리에 서 있다. 병원에서 나오긴 했으나, 주말이기에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전의 당신은 가득한 주말 약속으로 휴식이 부족함을 오히려 걱정하곤 했으나, 더 이상 주말을 간섭할 타인은 주변에 남아있지 않다. 겨울철이라 공사 현장에서 인력을 구하지도 않았으며, 아무렇게나 먹어버린 나이로 인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 하나 수신되어 있지 않은 액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금세 다시 닫는다. 당신은 예정된 대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이팟을 귀에 꽂고 지하철역까지 걷는다. 거리의 사람들을 힐끗 바라보기도 하고,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차가운 정오의 햇살이 길 위로 어질머리 나게 쏟아져 내린다. 햇빛에 둘러싸인 창백한 건물들의 윤곽들을 바라보다 하얀 숨을 길게 내뿜는다. 당신은 저 덩어리들 안에서 한 때는 모니터 앞에 앉아 품위 있게 서류를 작성했으며, 수신된 메일에 매너 있게 답신했으며, 점심을 먹은 오후에는 짧은 기지개를 켜며, 가끔 재미없는 농담을 팀원들에게 하곤 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빛나는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후회와 원망으로 얼룩진 자신을 여전히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러다 한결 정신과라는 병원의 간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순간 우울증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말을 치과 의사에게 하지 않았음을 기억해낸다. 불안은 스스로를 향한 말을 만든다.
-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당신은 지난 반년간 렉사프로라는 항우울제를 복용 중이다. 항우울제가 며칠 분량이 남았는지를 머릿속으로 세어 보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 초조해진다.
- 오늘은 주말이니까... 월요일에 병원에 가도 괜찮겠지.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뜻밖에도 당신은 정신과 전문의의 지시를 나름 잘 이행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당신의 자살 시도 이후 정신과에 처음 방문했던 날,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어머니와 당신은 나란히 의사 앞에 앉았다. 어머니의 투박한 손은 당신의 손등에 포개어져 있었고, 어머니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의사의 고조곤한 목소리를 따라 어머니는 소리를 조금 높여 울기도 했고, 조용히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당신의 가장 밑바닥에서 흐르는 어머니를 향한 죄의식 때문인지, 단조로운 일상에는 새로운 규칙과 약속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별것 아닌 약속들을 지켜내려 나름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당신은 불안하다.
당신은 지하철을 기다리다 화려한 표정을 한 금발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광고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지하철의 광고 모델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옛 연인을 떠올린다. 반년 전, 차가운 얼음 단면처럼 당신으로부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던 연인. 그녀에게서 맡아지던 달콤한 향기를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녀가 애착했기에 당신이 백화점에 몇 번이나 찾아가 직접 고르기도 했던 화장품 회사의 광고라는 걸 기억한다.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버릇처럼 다시 이를 악다문다. 이내 몸을 돌려 지하철의 스크린 도어로 향한다. 당신은 스크린 도어에 비친 자신을 여전히 낯설어한다. 나무 기둥의 작은 구멍처럼 움푹 들어간 눈, 부풀어 오른 듯한 광대뼈, 말라버린 연갈색빛 입술. 삶이 가차없이 짓이겨버린 자의 모습이라 중얼거리며,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달려오는 지하철을 빤히 바라본다. 지하철의 전조등 불빛을 보며 선로로 뛰어내리는 상상을 가끔 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저 순간일 뿐이다. 당신의 고통은 사라지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이 회복될 수 없는 실패작이라고 여긴다. 세상 모두가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떨쳐낼 수 없을 만큼 확고하게 몸에 들러붙어 당신과 함께 지금도 살아간다. 하지만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삶을 반납하려던 당신의 의지는 더 이상 선명하지는 않다. 희미해진 이유가 죽음에 닿으려는 시도조차 다시 실패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항우울제 때문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눈물 때문인지는 사실 당신도 잘 모른다. 다만, 당신은 그저 살아갈 뿐이다. 묵묵히 견디면서. 그 무엇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당신은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지하철 안에 들어설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것만 같아 큰 숨을 몰아쉬곤 한다. 버릇처럼 아이팟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는다. 음악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다. 사분의 삼박자의 리듬을 따라 혼자서 왈츠를 추는 상상을 하며 조금 서글픈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조금 우울한 이 음악을 예전에도 듣곤 했지만, 그때는 들으면서도 기분 좋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그건 왈츠의 상대가 있었으니까. 소개를 통해 이 년 정도 연애를 했고 결혼을 약속했으며, 미래를 함께 준비하던 연수라는 연인이 당신에게 있었다. 왈츠를 출 때 그녀의 손끝에서 건너오던 부드러움과 그녀의 눈빛이 꿰뚫는 갈망에 당신은 스스로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끼곤 했다. 당신도 한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믿어 의심치 않던 미래가 있었다.
일 년 전, 당신은 제1금융권의 은행에서 나름 유능한 인재로 인정받으며 자신의 자리를 탄탄하게 지키던 사람이었다. 유쾌한 사람이었고, 여러 모임에서도 분위기를 이끌었으며, 준수한 외모와 세련된 언변 덕분에 여직원들로부터 인기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당신에게는 한 치의 의심도 끼어들 수 없는, 연인과 함께 할 장밋빛 미래가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걸 다 가진 듯한 당신의 등에서는 어떠한 자책도, 후회도 묻어있지 않은 부러질 것만 같은 꼿꼿함이 있었다. 결혼을 반년 앞둔 어느 날, 당신은 주식 전문가로 여겨지는 친한 동료로부터 유망한 회사의 주식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 대출을 받아서라도 전부 투자해라. 몇 배가 뛸지 몰라.
그를 믿었고, 그의 말을 신뢰했으며, 스스로를 자신했다. 당신은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주식을 분석했다. 동료의 말은 모두 옳은 듯 여겨졌다. 당신은 충분한 연봉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꿈꾸는 미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여겼으며, 타인의 소유가 아닌 당신이 소유한 고급 아파트에서 그녀와 함께 잠에서 깨어나 찬란한 햇살을 맞이하고 싶었다. 신뢰하는 동료와 사랑스러운 연인을 떠올리며, 모아 둔 결혼 자금과 당신이 근무하는 은행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받은 자금을 모두 유망하다는 주식에 투자했다. 화려한 미래가 한순간 손끝에 닿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날부터 투자한 주식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대한 당신의 집중력은 떨어졌으며, 논리적인 판단력은 흐려졌다. 붉은 화살표와 푸른 화살표가 교차할 때마다 당신의 명치를 헤집어대는 차갑고도 뜨거운 손을 느꼈으며, 하루의 절반 이상을 화살표의 방향을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이 투자한 기업과 경쟁 관계에 있는 외국계 기업의 갑작스러운 연구의 성공과 제품의 발표로 주가는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손실을 되메우기 위해 카드대출을 받았고 가입한 보험까지 해지했지만, 무심하리만큼 하락세는 멈추지 않았다. 객관적인 정보보다는 다시 오르리라는 정체 모를 낙관이 당신의 선택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내의 공금을 아무도 모르게 가져다 쓰고, 금세 반환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주식은 바닥을 향해 질주했으며, 당신의 지성 또한 가장 낮은 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급기야 당신은 주식을 추천했던 동료 직원의 멱살을 움켜잡고서, 비명을 닮은 듯한 소리를 내지르고야 말았다.
- 너 때문이야. 전부 다 너 때문이라고. 책임져. 전부 책임지라고!
- 이거 안 놔?! 네가 결정했으면서, 왜 남 탓이야!
직원들과 은행을 방문한 사람들은 경악스러운 시선으로 일제히 당신을 쳐다봤다. 그 일이 있은 후,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하지 않은 말들은 화장실에서, 옥상에서, 탕비실에서 은밀하게 떠돌며 부딪치다가 날카로워지고 있음을 당신은 의식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적으로 공금을 유용한 사실이 결국 드러나고야 말았다. 금방 메꿔 넣겠다고 상급자에게 사정을 부탁한 덕분인지, 그동안의 정 때문인지, 아니면 당신에 대한 연민때문인지, 회사는 당신을 경제사범으로 신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사칙 제26조와 부칙 징계 양정기준에 의거 해고되었음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미래를 약속한 연수 또한 이별을 통보했다. 당신에게 이젠 미래가 없다고, 그녀는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약속은 약속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견고할 것만 같던 의미 또한 잃어버렸다. 약속이란 그렇게나 허무한 것이라고 당신은 중얼거렸다. 당신이 온전히 가졌고, 당신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으리라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서 철저하게 시선을 거두고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그들이 지나가는 육중한 무게를 그저 숨죽여 들어야만 했다. 당신의 꼿꼿하던 등은 부러진 것만 같았다.
땅에 몸을 바짝 붙이고 뱃가죽을 쓸어 담으며 기어가 누군가의 발목을 처절하게 붙잡아야만 했던 시간. 냄새 나는 구정물이 말라붙어 그 누구도 곁을 주지 않던 시간. 작아지고 작아지다, 결국 캄캄한 우물 속으로 가느다란 신음조차 끝끝내 사라져만 가던 시간. 한 치의 의심도 없던 미래가 사정없이 당신의 뺨을 후려치던 시간. 당신은 연수가 떠난 그날, 치사량의 수면제를 삼켰다. 바깥 세계와 완벽하게 단절되고 있음이 느껴졌는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살고 싶은 마음이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꼼짝할 수 없는 나무토막이 되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수면제는 가느다란 빛조차 새어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당신을 인도했다. 캄캄한 어둠은 당신의 손과 발의 윤곽조차 지워버렸다. 압도적인 적막감에 모든 사물이 사라지는 소리마저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우물인 듯한 캄캄한 공간을 처절하게 더듬거려봐도,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나는 차가운 한기만이 다리를 기어올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신은 절망감에 지질린 표정으로 목을 움켜잡고서, 절실하게 쥐어 짜내듯 소리를 내질렀다.
- 누가... 나 좀 찾아줘요.
- ...
- 누가 나 좀 찾아달라고!
-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언젠가는 생각할 거야.
덧. 누구나 살아가면서 선택을 하고, 선택의 무게에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무게에 짓눌리기 보다는 다시 일어나 걷는 일이 삶을 조금은 더 전진시킬 수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어느새 2월입니다. 회사일이 너무 급박하게 흐르다보니 브런치에 잠시 소홀해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도 곧 지나가겠지요.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