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아이... 씨... 다른 사람 생각도 좀 하지... 정말.
날카로운 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잠이 묻은 찡그린 얼굴로 짜증 섞인 신음을 뱉으며 반사적으로 벽을 향해 베개를 내던졌다. 나의 시계가 아닌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 방 민수 형의 알람 소리였다. 오 분 간격으로 찔러대는 소리에 장전된 분노가 벽을 꿰뚫었다. 벽은 군데군데 무언가가 묻어있었고 손때 묻은 유리창처럼 투명했다. 누렇게 빛이 바랜 벽은 공간을 구분 짓는 기능 외에는 그다지 다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신림동의 낡은 하숙집은 복도를 지나는 둔탁한 발소리까지도 방문을 넘어 건너오는 곳이었다.
- 나 들어왔어. 나 이제 나가.
마치 서로의 생사를 보고하고 확인해 주는 것만 같은 소리들. 때로는 옆 방의 통화 소리며, 코골이 소리며, 심지어는 야심한 밤중에 여학생의 울음소리까지도 들려오곤 했다. 가끔씩 나는 벽에 가만히 귀를 대고 대화 내용을 엿듣기도 했는데, 누군가의 비밀을 은밀히 공유한다는 알 수 없는 만족감에 몸을 부르르 떨 수도 있었다. 작고 낡은 공간 안에서 나와 그들은 서로에게 무심하면서도, 서로를 끈질기게 추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지만, 옆 방 1호의 민수 형은 독서실 아르바이트 때문인지 여전히 같은 시간에 기상했다. 계절과 시간의 노력이 드러나지 않는 신림동에도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때부터 새해가 될 때까지는 사람의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림자의 자취라는 것도 복잡한 세포들로 구성된 유기체가 활동한 흔적에 불과했다. 어차피 이곳에 사람의 온기 같은 건 없었으니까. 어느새 내가 신림동에 들어온 지도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몇 번의 계절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지나기도 했지만, 또 몇 번의 계절은 낮과 밤을 세어 볼 수 있을 만큼 더디게 흐르기도 했다. 시간에 비례해서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는 점차 사라져 갔지만, 나는 그것에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여전히 나의 성공이라 믿었으며, 새로운 번호들로 비워진 자리는 다시 채워지리라 확신했으니까. 낙관에 가까운 믿음은 어느새 오 년이라는 세월의 태엽을 감아버렸다. 오 년의 시간 동안 나는 겨우 사법고시 일 차 시험만을 두 번 합격했을 뿐이다. 자신감이 조금씩 두려움으로 대체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않았다. 이 길에서 벗어난 나를 상상할 수 없었고, 여전히 이 길만이 안전하다고 여겼으니까. 나의 막연한 낙관은 좁은 신림동의 거리에 동선을 그릴 수 있을 만큼 발자국을 규칙적으로 찍었다.
처음 신림동에 발을 들일 무렵, 학원과 가까운 아담하고 깔끔한 여섯 평의 원룸에서 살았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지원도 아닌 가족의 부푼 기대를 안고서 서울을 향했다. 간혹 대구에 있는 여자 친구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한 주씩 머물다 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살아가는 공간은 매년 조금씩 언덕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 갔다. 형편이 어려워지면 몸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나는 어느새 신림동의 정상을 향해 계단을 올라 몇 번의 캄캄한 골목을 지나야 도착할 수 있는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곳이 그러하듯 신림동도 자본과 출신학교의 압도적인 지배를 받았다. 가난한 자들의 특별한 출세길로만 여겨지던 국가고시는 어느새 보편적인 취업시장이 되었다. 좀 더 다양한 수업을 수강하고, 좀 더 좋은 곳에서 잠을 자며, 좀 더 나은 곳에서 밥을 먹을수록 시장에서 선택될 확률은 우상향했다. 신림동의 거주형태가 대한민국의 아파트와 조금 다른 것은 가난할수록 높이, 더 높이 올라가야 하는 것뿐이었다. 오 년의 시간은 자신의 맡은 몫을 다해 왔던 것이다. 통장에 입금되는 생활비는 줄어들었고, 생활도 쪼그라들었다. 가난이라는 건, 간명했다. 몸으로 대체해야 할 수고스러움이 많아진다는 것. 외부의 작은 변화도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것. 그리고 그런 충격에서 쉽게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어느 날 단지 그것뿐인 외부의 충격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내가 사는 거처의 변화 때문인지 여자 친구는 언제부터인가 발길이 뜸해졌고, 견고하리라 믿었던 약속마저도 부식되어 갔다.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왜 당연하게 여겨왔을까. 인간은 가진 것에 대해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질환을 가진 포유류였다.
- 나... 지친다. 나를 사랑하는지도 너에게서 느껴지지 않아. 우리 그만 헤어지자. 미안해.
- ..... 괜찮아. 잘 지내.
여자 친구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자음과 모음을 짧게 조합해 매너 있는 답을 했고,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시간이 조금 지나 어느 날의 한밤중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문을 닫아버리듯 전화를 끊었다. 동일한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다 결국 그마저도 차단되었다. 처음 느낀 감정은 분노도, 배신감도 아니었다. 그건 홀가분함이 섞인 안도와 간헐적 쾌락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녀와 보낸 고시원에서의 은밀한 밤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곤 했다. 그게 외부의 충격이 낳은 결과의 전부였다. 나는 달려야 하니까.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니까. 나는 성공할 테니까. 그러나 이후에도 한 번 정도 그녀에게 더 전화를 걸었고, 결과는 동일했으며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혼자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 묵은 쓸쓸함과 인간에 대한 불신의 냄새가 내 몸에서 검버섯처럼 피어났다. 다만, 나는 몰랐다. 아니, 그 냄새를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
강제적인 기상이었지만 떨어진 눈꺼풀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학원에서 받은 예상 문제를 풀어볼 요량으로 두툼한 자료들을 챙겨 가방에 넣고서 독서실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아침 밥을 먹기 위해 거실로 나가니, 고시원 주인장인 원씨 아주머니와 민수 형만이 적막 속에 앉아 있었다.
- 학생도 갈 때가 없어?
원씨 아주머니는 민수 형과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번갈아 보더니 쌀밥과 콩나물국을 내어주었다.
- 잘 잤어? 우리가 있어서 아주머니가 외롭지 않은 건데, 괜히 그러신다.
민수 형은 쌀알을 가득 넣은 입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밥알 몇 개가 밥상으로 튀는 모습에 일그러진 나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민수형은 여느 때처럼, 밥 한 공기를 더 받아서 먹었다. 민수 형과 같은 부류로 엮여 한꺼번에 비벼지는 듯한 언짢은 기분이 들었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서, 국을 뜨는 아주머니만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딱히 다른 호칭이 떠오르지 않아 비록 아주머니라 부르기는 했지만, 사실 아주머니는 민수 형보다 불과 육 년만을 더 살았을 뿐이고,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 혼자 살았다. 아주머니도 과거에 고시 공부를 하다가 결국 이곳에서 하숙집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민수 형은 부산에서 대학을 마치고 신림동에 들어와 어느새 십 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었다. 아마 신림동에 처음 입성하던 스물여덟의 그 또한 열정과 자신감이 넘쳤겠지만, 십 년의 세월은 신림동에서 살아가는 일을 기약 없는 일상으로 구축한 듯 보였다. 무심한 세월은 그들을 무기력하게 했고, 이곳에는 그들을 늘어지게 붙잡고 있는 어떤 인력이 작용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독서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삼 년도 더 지난 문제집을 다시 풀거나, 오래된 판례집을 펼쳐 밑줄이 그어진 문장에 다시 밑줄을 그으며 읽기도 했고, 간혹 독서실 아르바이트가 쉬는 날이면, 그 전날 밤부터 친구들을 만나는 건지, PC방에서 시간을 때우는 건지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다. 아주머니나, 그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였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나는 궁금해하거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그들과 나에게 경계를 긋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 독서실 문을 열어야 해서 나 먼저 간다. 천천히 먹고 와. 아. 상헌아... 혹시 학원에서 예상문제 나왔어? 몇 달 후면 1차 시험이니 아마 지금쯤 나올 시기인 것 같긴 한데...
- ... 아... 아니. 아직 나온 건 없어요.
- 그렇구나. 나오면 나도 좀 보여주라. 커피 사줄게. 독서실에서 보자.
- ... 네. 이따 봐요.
여느 때처럼 군용 담요 같은 싸구려 소재의 검은색 점퍼에 여기저기 올이 풀린 회색빛 폴라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은 그는 갈색빛으로 녹슨 낡은 대문을 밀고서 골목을 향해 사라졌다. 민수 형이 나가자 학원에서 받은, 정확하게는 비싼 수강료를 지불하고 수업을 듣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예상 문제지가 가방 안에 잘 들어 있는지가 궁금해졌고, 궁금증은 초조함으로 번져갔다. 그 순간 TV가 켜지고 채널이 이리저리 돌려지는 소리에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까끌까끌한 밥알을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넘겼다. 채널을 돌리던 아주머니는 브라운관을 응시한 채 무심히 말을 던졌다.
- 민수 학생... 언제부턴가 눈이 풀렸어... 가끔씩 살펴봐.
독서실에 도착하니 카운터의 유리창 너머로 민수 형이 보였다. 그는 몸이라도 아픈 건지, 피곤한 건지,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양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잘못한 사람처럼 조용히 카운터를 지나, 나의 지정석인 A-10호에 유령처럼 착석했다. 독서실도 하숙집만큼 적막하긴 마찬가지였다. 반대편에 앉은 여학생의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간혹 들려왔고, 가습기의 기계음만이 무심하게 독서실을 채우고 있었다. 예상 문제가 궁금하긴 했지만 민수 형이 혹시나 보게 될까봐 일단 유보하고, 부족한 행정법을 보충하기 위해 텍스트와 판례집을 펼쳤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민수 형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야쿠르트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며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야쿠르트의 유통기한을 설핏 살폈다.
- 언제 왔어? 상헌아... 오늘 독서실 일찍 문 닫는 날이잖아... 마치고... 소주 한 잔 할 수 있어? 형이 살게.
- 아... 아니요. 친구가 놀러 오기로 해서...
- 그렇구나... 그런데... 너 얼굴이 왜 그리 어두워? 어디 아파?
- 아침부터 머리가 좀 아파서...
- 엎드려서 잠이라도 좀 자. 몸 상할라.
그의 텅 빈 듯한 눈빛에서 어렴풋이 슬픔 같은 게 느껴졌지만, 나의 슬픔이 아니기에 모른 척, 못 본 척 그냥 흘려버렸다. 난 그와 나를 구분 짓고 싶었기에 그와 가까워질수록 그의 초라한 군청색이 나에게 묻을 것을 경계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끔 표정이 구겨지곤 했고, 구겨지는 나를 스스로 의식하곤 감추려 애쓰기도 했다. 아프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화장실에라도 갈 때면 의식적으로 미간을 더욱 찌푸리고 다녔다.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독서실 옥상을 향해 콘크리트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갔다. 육중한 철문을 밀어내자, 날카로운 한기가 가디건 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도미노처럼 촘촘히 붙어 앉은 고시원들과 서점들, 밥집들 그리고 그 사이로 얽히고설킨 소로를 따라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는 무표정한 사람들을 내려다볼 때면, 왠지 모를 안도감 비슷한 걸 느끼곤 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회색빛 풍경들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어느 정도 안정감을 주는 것만 같았다.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고, 허공을 향해 희뿌연 연기를 몇 번 뱉어낼 무렵, 마침내 나를 찾았다는 듯한 민수 형이 옥상 문을 열고 다가왔다. 나만의 시간을 강탈당했다는 듯, 나의 표정이 또다시 일그러지고 있음을 느꼈다.
- 상헌아. 두통이 심하면 이거 먹어라. 두통약이야. 독서실에 상비약이 있어서 가끔 꺼내 먹는다. 독서실 총무로 있으면 이런 것도 좋은 점인 것 같다.
그는 여느 때처럼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내가 관심도 없는 이야기나,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를테면 종교에 관한 것들, 귀신에 관한 것들, 내세에 관한 것들.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 자의 말이라는 건, 죄다 허공을 향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형체가 없는 것들 뿐이었다. 오늘은 유난히도 흥분한 표정으로 지박령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의 경련을 감추려 아랫입술을 말아 꼭 다물었다.
- 지박령, 같다.
- ... 뭐가요?
- 저 사람들도, 나도 말이야. 신림동의 지박령들... 여기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지박령은 자신이 무언가에 미쳐있다가 갑자기 죽어버려서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른대. 그래서 죽은 자리에서 살아있을 때의 행동을 의식 없이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그런 지박령에 씌인 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맴돌게 된다고 하더라. 자신이 왜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지.
- 에이. 그럼 히키코모리 같은 사람들, 역 근처에 노숙자들, 만날 PC방에 앉아 게임하는 사람들. 뭐 이런 사람들 죄다 지박령에 씌인 거게요.
- 그럴지도... 살아가기 위해 미치지 않고서는 못 버티는 거지. 혼백에 씌인 노예인지도.
- 무슨 말도 안되는...
나는 따져 묻듯 대꾸를 했지만, 그가 오히려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기에, 조금 당혹스러움이 일었다. 그는 심각하게 지박령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특정한 장소에서 지박령에 씌이는 상황을 동티났다고 말하고, 특정한 장소에 얽매여서 계속 머무르며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일어나게 하는 죽은 자의 혼령을 지박령이라 부른다고 성의껏 설명해 주었다. 지박령들은 주위의 다른 영혼들을 보지 못하기에 혼자서 한 곳을 헤맨다고 덧붙이며, 넋이 나간 것처럼 학원 근처를 배회하는 수염이 길게 자란 아저씨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아저씨도 지박령에 씌인 거라며, 자신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거라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궁금하지도 않은 것들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그를 흘려버리듯 띄엄띄엄 보다가, 담뱃불이 꺼지자 피로한 표정으로 그만 내려가자고 그에게 짧게 말했다. 그는 내려가면서도 정말 무언가에 씌인 사람처럼, 아니면 나에게 동의나 공감을 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내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알려 주었다.
- 나는 내세가 있다고 믿거든... 그래서 두렵다... 넌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고 싶어?
- 전... 현세도 모르겠어서... 내세까지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다시 태어난다면... 그냥 부유한 집 자식으로.
- 나는... 지박령만은 되고 싶지 않은데... 지박령이 왜 무서운지 알아? 그건, 언제 끝날지조차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무서운 거지.
무례한 사람으로 보여지기는 싫어서 약간의 점잖은 제스처를 섞어 대꾸했다. 내심 유난히도 길게 뻗어있는 계단을 원망스럽게 여기면서. 내가 거창한 답변이라도 해주기를 기대한 건지, 나를 보는 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가, 이내 다시 벌려졌다. 즐거운 약속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의 동공이 잠시나마 선명해지는 것만 같았다.
- 내일 크리스마스인데 별일 없으면 관악산에 같이 오를까? 날이 춥긴 해도 공기는 신선할 거야.
- 아... 내일은 여자 친구를 만나기로 해서... 죄송해요.
- 아니야. 괜찮아... 상헌아. 사람답게 사는 일이 뭐 별거 있나 싶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걸 먹고, 좋아하는 걸 보며, 가끔은 주변도 살피며,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런데 그게 나에겐 왜 이리도 힘든 일인 거냐.
오늘따라 유독 그늘과 얼룩이 깊이 드리워진 그의 표정 때문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순간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그의 지루한 말이 길어질까, 이내 머리를 저으며 내가 있어야 할 A-10호에 앉았다. 착석해서 행정법 판례에 수도 없이 적힌 각하와 기각, 그리고 인용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형식적 요건이 결여된 소장은 각하된다. 모든 요건을 갖추었더라도 주장의 내용에 이유가 없다면 기각된다. 그의 형이상학적인 태도를 생각하다, 각하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럼 난... 지금은 기각 상태지만, 인용되기 위해 타인들이 쉬는 날에도 이곳 A-10호에서 벗어나지 않고 앉아 있다. 붉은 색 펜을 들어 인용이라는 단어에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렸다. 스스로 안심이라도 하듯, 옅은 한숨을 내어 쉬었다.
겨울의 마지막 햇살을 따라 파르스름한 어스름이 창틀을 넘어 내려앉았다. 독서실을 그냥 빠져나오려다 밀대를 밀어 바닥을 닦고 있는 민수 형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 크리스마스 잘 보내요.
- 그래, 너도 잘 보내.
황막한 시간에 적막한 독서실에서 청소하는 그의 뒷모습이 처연하면서도, 저 뒷모습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 여겼다.
- 휴...
그와 마주칠 까봐 하숙집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편의점으로 향했다. 컵라면과 과자, 콜라를 가방에 욱여넣고 독서실에서 조금 떨어진 DVD방을 향해 삭막한 거리를 걸었다. 그로 인해 쓸데없이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되었다고 중얼거리면서도,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이니까. 애쓰며 살아가는 나를 위해 영화를 보는 일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면서. 영혼이 지나가듯 나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가벼웠다. 아니, 약간의 설렘이 동력이라도 되는 듯,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크리스마스이브임에도 빨갛고 노란 불빛의 깜빡이는 전구나, 그 흔한 징글벨의 멜로디조차 들리지 않는 신림동의 거리는, 간혹 백 팩을 짊어진 노쇠해 보이는 사람들만이 오갔다. 대부분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지만,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듯 입술을 악다문 딱딱한 표정으로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안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의 기척을 느끼려 애쓰고 있다는 걸. DVD방에는 사람들의 촘촘한 발자국이 비슷한 모양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서 나는 알 수 없는 유대감과 친밀감을 느꼈다. 수험생이라는 영혼의 동질감과 갈 곳 없는 물리적 한계는 강한 교집합으로 작용했다. 한동안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집어 들어 카운터에 올리고, 상기된 표정의 DVD방 사장에게 계산을 했다. 두루마리 화장지 두 개가 놓여있는 한 평 남짓한 방에 몸을 구겨 넣었다. 세상이 인간의 욕망으로 망했다. 사람들은 계급화된 열차에 탑승해 주어진 역할만큼을 살아갔다. 그 열차는 같은 경로를 반복해서 돌고 돌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이곳이 열차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 안에서 나는 어디즈음에서 살아가는 걸까. 민수 형은 기차의 끝 어디즈음에서, 나는 중간 어디즈음에서 살아가는 거라 단정짓다가, 지금 민수 형은 무얼 하고 있을까를 문득 생각했다. 이내 두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영화에 몰입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나는 방에서 나와 성인물 코너 주변을 기웃거렸다. 사람이 들어오면 점잖은 듯 다른 곳을 살피는 척하면서.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중얼거리면서.
DVD방에서 나와 캄캄한 하늘의 흐릿한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반투명한 구체가 내가 서 있는 이곳의 하늘만을 덮고 있는 것만 같았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달빛은 쓸쓸하면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끌리듯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게 끝날 것만 같은 상상을 하게 하는 힘. 날카로운 바람에 내맡겨진 우듬지가 가로등 불빛을 찌를 때면, 그 아래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척이는 고양이들만이 자지러지듯 울어대었다. 만취한 사람들, 각하와 기각, 열차의 맨 뒷칸, 민수 형, 그리고... 나. 이런 단어들이 고양이 울음을 따라 연상되며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허함이 떠밀려왔다. 지구의 중력과 달의 인력 사이에서 그 무엇에도 속하지 못한 척력에 이끌려 하숙집을 향해 올랐다. 내일은 구립 도서관에 가서라도 오늘 낭비한 시간을 메우자고 위안 섞인 다짐 같은 것을 나직이 읊조렸다. 어떤 경건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한 듯 특별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걸었다. 그리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골목길의 끝에 다다르자, 그 기분도 함께 끝이 났다. 이곳이 지금의 나에겐 끝인 것이다. 칼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종잇장처럼 요란하게 울부짖는 녹슨 대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스스로를 위로하듯 담배를 하나 꺼내 물어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을 빨아당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끝이 날까. 나도 민수 형처럼 우물 같은 캄캄한 눈빛이 되어 갈까.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기분의 고점과 저점으로 피로함은 언제나 찰랑거리며 넘쳤다. 스산한 대문을 지나 현관문을 여니 거세게 태풍이라도 몰아친 것처럼 거실은 난장판이었고, 목을 움켜쥔 듯한 적막감만이 요란하게 흘렀다. 사기 밥그릇은 자기 자리가 아닌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고, 접시와 술잔은 처참하게 깨져있었다. 낡은 카페트 위로 반찬인지 안주인지 모를 찬들이 널브러진 모습은 참담했다.
- 끄억, 끄억. 으흐흐흑...
기괴한 소리를 따라가 보니 원씨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주저앉아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시위대 옆을 지나다가 달걀 세례와 물 세례를 동시에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2부에서 완결됩니다. 곧 뵙겠습니다.)
덧. 수없이 퇴고했지만, 공모전을 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인 듯합니다. 서랍에서 가만히 잠들어 있는 너석들이 안타까워 다시 업로드합니다. 가다보면 언젠가 닿을 수 있는 곳이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