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고단한 하루가 지나가는 당신을 본다. 당신의 미소 지은 한숨이 하루를 실어 보낸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달빛처럼 앉아 있는 당신을 본다. 나의 아랫입술에 악물린 자국이 새겨진다. 당신의 허락 없이 마음을 꺼내 든다. 당신의 자그마한 별빛이 되겠노라 숨죽여 읊조린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니까. (3월 6일, 봄의 초입에서)
자신을 위로해 주곤 했다는 그녀의 말이 멀어지다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다 가까워졌다. 기록의 대상이 그녀였을까. 그녀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그녀를 연민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를 향한 동일한 감정이 화학반응처럼 거품을 일으킨다. 현재와 과거가 혼재된 듯한 문장들에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조차 나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질서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유일하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예전에도 겪은 것만 같은 가파른 심장의 박동이었다. 심장의 떨림과 동일하게 변주하는 와이퍼를 따라 눈은 쌓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감정의 동력에 이끌려, 기억인지 상상인지 모를 잔상도 가물거렸다.
- 저... 약속했던 것처럼 주말에 볼 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기억이 떠오를까 해서... 친구가 멀리 가는데 작별 인사를 하고 싶기도 하고...
- ... 네... 알겠습니다.
기억상실을 핑계 삼아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감추려 애썼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지그시 바라봤다. 연약하지만 세상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그녀의 동그랗고 단단해 보이는 선을 만져보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그녀의 단단한 경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발끝에서부터 꿈틀거렸다. 기억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감정들이 내 안에서 살고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검은 우산을 현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책상의 조명만을 켜고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서랍을 열어, 빛바랜 노트를 다시 손에 쥐고서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좀 더 많은 흔적을 남겼었다면, 껍데기가 아닌 현재를 온전히 직시할 수 있었을까. 창 너머의 짙은 구름 사이에서, 하얀 물감이 번져가는 듯한 둥근달이 등장하고 퇴장하길 반복했다. 달은 아름다웠다. 검은 만년필을 쥐고서, 그녀의 목에 걸린 보름달 모양의 은빛 펜던트를 텅 빈 노트에 그렸다. 엉거주춤하게 앉아 누군가에게 펜던트를 걸어주던 기억의 그림자가 설핏 드리웠다. 어쩌면 나의 상상이 빚어낸 망상일지도 모를 의심스러운 잔상이었다. 구름 뒤에 가려진 달빛처럼, 어슴푸레한 윤곽만이 걸려있었다.
- 사랑이라는 환상을 걷다 보면,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 저릿한 마음이 들곤 한다. 연약한 손을 붙들고서 세상의 끝까지 달리다 보면, 세상과 함께 이 사랑도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에 잠기곤 한다. 격렬하게 지나온 환상과 함께 마침내 이 세상도 끝나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이런 희망과 환상을 경험한다. (4월 2일, 비 내리는 어느 봄날)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그녀의 신비로운 미소를 떠올리다 문장을 한 줄씩 써 내려갔다. 하지만 방금 쓴 문장들이 눅눅한 어느 페이지에 엇비슷한 모습으로 이미 존재할 것만 같은 기분에 노트를 빠르게 넘겼다. 그리고 짐작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 나의 문장 속에서 살았고, 사라진 그녀는 이나연씨라는 걸 기대를 섞어 예감할 수 있었다. 비록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스스로 확신할 수 있었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문장 속에서 그녀가 서 있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밤,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펜던트를 걸어주며, 내가 힘겹게 꺼내었을 말들을 익숙하게 발음했다.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백을 꺼내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 살아가다 보면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게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부분 사랑이죠. 나에겐, 당신이 그래요. (4월 5일, 연일 비 내리는 봄날)
하지만 그녀는 결혼을 했으며, 아이가 있었다. 그녀와 내가 사랑을 했다면, 결국 나는 어떤 모양으로든 베어졌을 것이다. 나를 베고 간 것들은 무엇인가. 그녀가 감춘 뾰족하고, 딱딱하고, 차갑게 날 선 무언가가 내 몸 안에 봉인된 채 방치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수없이 그이고 찔린 곳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핏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빙벽 속에서 단단히 얼어붙은 기억들도 마침내 녹아내릴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은 다시 살아나 동일하게 나를 그어대고, 깊숙이 찌를 것인가. 어쩌면 나의 기억상실은 살고자 하는 방어적인 작용인가. 기억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중단해야만 하는가. 하지만 비밀스러운 상징들을 찾아내고 번역하는 일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육체는 말과 기억보다 진실하니까. 움켜쥐고 있던 낯설기만 한 검은 만년필. 몇 번 쓰지도 않아 윤이 흐르는 만년필을 내려다보다, 만년필로 쓰기 시작한 페이지를 찾아서 펼쳤다.
- 곳곳에 너는 존재하는데. 바다에 떠 있는 태양에도, 흩어지는 해초의 향기에도, 바스락거리는 여린 모래알에도,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에도, 어디에든 너는 살아가는데. 하얀 포말일 뿐인 나는 으스러져 내려도 이토록이나 행복하기만 한데. (12월 3일, 서늘한 겨울의 바다에서)
가까워지는 듯한 진실에 오한이 밀려왔다. 담요를 덮고 벽을 보고서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한 달 전, 나의 생일날, 나는 그녀로부터 검은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너무나 기뻐서 하얀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나는 몇 페이지에 걸쳐 시를 닮은 문장을 이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의지와 체념이 동시에 공존하는 시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년필로 쓰면서, 나는 조금 울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서로 다른 시간에 존재하고 있지만, 놀라우리만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창을 넘어 거실 가득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궤적을 따라 끊임없이 서성이는 달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 다시 돌아왔구나. 녹아내린 가슴의 구멍을 겨우 망각으로 봉합해 둔 것을, 기어이 녹슨 칼로 다시 헤집어 놓는구나. 그것조차 산산조각나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말 것을. 다시 죽으려고 돌아왔구나. 끝끝내 돌아왔어.
깜빡 잠이 들었다가 황막한 꿈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차가운 땀이 베갯잇을 적시고, 양손은 힘을 가득 준 채 말아쥐고 있었다. 형체는 없었으나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를 꾸짖는 듯한 푸르스름한 형상. 눈이 시려, 바로 뜰 수가 없었다. 이마 끝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생각에 잠겼다. 동우를 만나야 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나에겐 특별했을 그녀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의미였고, 메시지였을 테니까.
맥주잔을 따라 물방울이 미끄러졌다. 성난 사람처럼 맥주 한 잔을 한꺼번에 들이켜고 동우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 나연씨에 대해 전부 말해줘.
동우는 명태포를 찢어 한 조각을 입에 물고서, 맥주병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천천히 말을 꺼내었다.
- 이런 얘기를 너에게 하려니 어색하다.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나연씨와 나연씨 남편이 다시 합치게 되었다고. 그래서 잘 되었다고. 술에 꽤나 많이 취해서 사고가 나기 며칠 전에 너가 나에게 얘기해 준 거야. 그때 넌 영혼이 나간 사람같았지... 그때 넌 꼭 자신을 타이르는 사람같았어... 알 수 없는 얘기들로 횡설수설하기도 했고. 그리고 얼마 후에 너는 사고가 있었고.
- 나연씨랑 남편이 다시 합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 정말 하나도 기억 못 하는구나. 나연씨는...
그녀는 사라지기라도 하려는 듯, 모든 소리가 작았던 사람이었다. 움직이는 소리도, 목에서 길어 올린 소리도, 심지어는 숨 쉬는 소리조차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인 듯했다. 침묵을 통해서 삶을 비껴가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고요했다. 증권회사에 다니던 그녀의 남편은 유능한 분석가이자 투자가였다. 그는 자신의 판단대로 투자자들의 자금을 한 곳으로 집중했고, 터져버린 리스크는 투자금을 환수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소유하던 부동산들을 매각하고 대출을 받았지만, 임계점을 넘어버린 상황은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와 아이에게까지 피해가 미칠까, 그들은 법적인 이혼을 선택해야만 했다. 남편은 도망 치듯 전국을 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나연씨는 우리 회사의 디자인팀에 계약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년 정도를 떠돌던 남편은 대구의 작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악착같이 살아서 가정을 부단히도 지키고자 애썼다. 그녀 또한 그와의 약속을 지키며 묵묵히 기다리고 견뎠다. 그리고 그들만이 갈 수 있는 길을 가기 위해, 이제 다시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가냘픈 어깨와는 달리, 그녀는 여렸으나 단단했다.
예상과 진실이 오차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실제화된 서글픔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돌아가서 그녀를 두 팔 벌려 안을 수 없음을 명확하게 인지하게 되었으니까. 기억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추측은 선명해지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 힘껏 껴안을 수 없음에 대한 좌절감이 뼛속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망각의 크기만큼, 어쩌면 나는 행복했던 것이다. 밤이 달을 지운 것도 아닌데, 캄캄한 밤을 속절없이 원망하는 것이다.
검은 만년필을 서랍에서 꺼내 잉크를 채우고 촉을 닦았다. 휴지에 번져가는 거무스름한 잉크처럼 추측의 도움을 받은 기억의 영역이 확장되는 만큼, 세상은 생경하게 물들어 갔다. 슬픔을 그녀에게 헌화하듯 문장을 쓰려했지만, 격렬하게 밀어내는 듯한 마음에 어떠한 획도 그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의 나 또한 밤이 이울도록 쓰고 지웠을 것이다. 사무치게 밀려오는 어떤 뜨거운 것이 자꾸만 뺨으로 흘러내렸을 테니까. 책상에 엎드려 두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 안에서 한 여자가 아스라이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슬픈 빛이 되어 끝없이 명멸하던 그녀는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그녀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에 서서 처음인 듯 말해야만 했다. 검정색 롱코트를 걸치고, 체크무늬 목도리를 목에 두르며, 창백한 거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명확한 건 어디에도 없었지만, 필연적으로 나는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했으며,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녀를 이제 보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발끝까지 몸서리치는 내가, 희뿌연 거울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거울이 반영하지 못한다는 일 퍼센트의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거울에게 중얼거렸다. 으스러지고 조각난 기억과 형용할 수 없는 지금의 감정으로 그녀를 안아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의지가 장전되어 있다고, 거울을 향해 읊조렸다. 기억은 더 이상 쓸모없는 현실일 뿐이었다. 거울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거리 위로 하얀 밤이 어둑하게 번져갔다. 세상을 모두 덮어버릴 듯한 아득한 흰 눈송이들이 거리를 지우고 있었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육각형의 결정체를 바라보며, 차라리 나의 기억도 눈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마음만은 눈구덩이 속에서도 드러난 나무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그녀와 걸었을 기찻길 옆 담장을 따라 걸었다. 흰 눈의 아우성이 나를 붙잡듯 뒤따랐다. 우리는 수도 없이 이 길 위에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녀와 나의 눈동자와 입술, 코끝이 닿는 지점에서 서녘 하늘은 붉게 번져갔을 것이다. 연결된 두 손을 따라 흐르는 저릿한 감정의 전류를 서로에게 전달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서 눈송이를 받아먹었을 것이다. 초연한 확신들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너는 그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그녀의 집 근처 카페에 앉아 무슨 말을 건네야 하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를 고민하며, 무엇이 되었든 완벽하게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예감했다. 카페의 문이 열리는 풍경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의 시선은 흔들리며 일어나고, 다시 가라앉았다. 그럴 때마다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쏟아졌다.
- 달빛을 닮은 펜던트를 당신의 가느다란 목에 걸어드렸습니다. 당신이 선물해 준 만년필로 수많은 사랑의 언어를 담아 당신에게 선물했었습니다. 이 길을 우린 수도없이 함께 걸었습니다. 길을 걷다 주홍빛을 만나기라도 하면 당신의 머리결을 만지고, 당신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포개었습니다.
당신에게 이미 했을 질문을 다시 질문하고 싶습니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내가, 당신은 더 이상 보이지가 않으십니까.
아브라카다브라의 주문을 외우듯, 비록 흐릿한 기억이지만, 선연하게 솟구치는 나의 감정들이 확신에 찬 문장으로 나를 인도했다. 이윽고 하얀빛을 가득 이끌고서 나타난 그녀가 시간이 정지한 듯한 모습으로 문 앞에 고요히 서 있었다. 세상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오직 그녀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긴장이 배어있는 표정으로 그녀는 서서히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 대리님. 잘 지내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 덕분에 괜찮습니다. 바쁘신데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남편이 와서 집에서 짐을 싸고 있어요. 내일 대구로 내려가요.
그녀의 담담한 어조와 무감한 표정 앞에서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인 만년필만이 불안하게 회전했다. 목구멍에 걸린 말은 삼켜지지도 뱉어내지도 못한 채, 틀어박혔다. 세상은 일제히 적막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만년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가 완강해 보이는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 동우 대리님이 만년필을 잘 고르신 것 같아요. 동우 대리님과 제가 한참을 고민했었는데, 잘 어울리세요.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듯한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지만, 마치 두터운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서 그녀의 말이 건너오는 것만 같았다. 왠지 그 말이 진심 같지 않았으나, 동시에 엄청난 자만으로 무장한 나의 착각인 것도 같았다. 순간 서슬 퍼런 칼날로 관자놀이를 도려내는 듯한 현기증이 일어났다. 만년필의 머리를 으깰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누르고 있던 엄지손가락은 갑작스레 힘이 빠지고, 기억이라 여겨지는 총알이 뇌리를 겨냥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아쇠는 당겨졌다. 심장을 토할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기억과 진실이 해리되고 있었다. 파편화된 조각을 어설프게 끼워 맞춘 기억과의 적나라한 조우는 허상일 뿐이었음을 알게 되고, 꺼진 나트륨 등에 깜빡이며 불이 밝혀지듯, 기억의 편린들이 자신들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나는 꿈을 꾸지 않았으나, 기나긴 꿈 안에서 살았던 것이다.
왜곡된 기억의 조각들이 깨어진 타일처럼 떨어져 나가고, 거칠기만 한 벽면들이 정렬되었다. 나는 내 멋대로 믿은 것뿐이었을까. 그녀는 나에게 어떠한 것도 숨긴 것이 없는 듯했다. 단지, 나의 마음을 헤아려 거품을 걷어내듯, 불필요한 말을 덜어냈을 것이다. 그녀의 말과 나의 기억을 거울이라 여겼다. 거울 속 일 퍼센트의 은폐된 진실을, 존재하지도 않는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헤매었던 건, 결국 나였으니까. 그녀는 친구가 다시 돌아온 듯해서 기쁘다고 말하지만, 무서운 기대 위에 세워진 현실은 아프기만 했다. 나의 것이 아닌 은빛 펜던트는 시리게도 그녀의 목에서 반짝거렸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릿한 영상이 지나갔다. 꽃잎을 닮은 모양의 펜던트를 건네며 마음을 고백했던 날, 굴욕 섞인 변명처럼, 언제까지나 좋은 친구로 남겠다며, 너스레를 떨던 내 손에는 볼품없는 은빛의 꽃잎 모양 펜던트가 다시 쥐어져 있었다. 달과 꽃의 잔상이 서서히 자신들의 자리를 바꿔앉았다.
- 처음 볼 때부터, 나연씨 목에 걸린 펜던트가 아름답다 생각했어요. 남편분이 선물해 주신 건가 봐요.
- ..... 네. 달이 참 아름답다면서...
그녀는 가녀린 손을 내밀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낙망한 자의 버림받은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침착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내 내 손에서 빠르게 미끌어져 내리는 그녀의 차가운 손. 깃털보다 가볍게 작별의 말을 전하는 그녀의 옅은 입술. 이 모든 일이 소름끼치는 데자뷰를 겪는 듯했지만, 그 익숙함에 더욱 절망했다. 입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수증기를 따라 작별의 말을 건넨 그녀는 저쪽을 향해서, 무거운 찰나를 견디지 못한 나는 이쪽을 향해 걸었다. 멈춰서 뒤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팔을 길게 올려 천천히 흔들었다. 굵은 눈꽃에 가린, 뜻 모를 그녀의 미소에 가슴이 아렸다. 거세진 눈발과 함께 저녁의 어스름이 이르게 밀려왔다. 눈에 덮여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담장 길을 다시 되돌아 걸었다. 나의 발자국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나의 발자국을 찍고 있었다. 이가 부딪히고, 더운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기억의 착오가 아닌, 그녀의 상실때문이었다.
사고가 있었던 날, 그녀를 향해 나는 마지막 선언이라도 하듯 그녀의 견고했을 마음을 구걸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절된 절망의 힘으로 나는 처절하게 질주했을 것이다. 사고의 원인을 이젠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픈 영화 속 비련의 남자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타오르는 분노로 나는 거리를 헤매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사뿐히 날아가는 나비처럼, 나는 정신없이 춤을 추며 붉은빛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날 밤, 나에게 있었던 일은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분노와 집착이 집어삼킨 기억의 멸실이었고, 삶의 반납이었다. 순간의 푸른빛을 지나 귀를 찢을 듯한 경적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번개처럼 번쩍이던 하얀빛을 지나 캄캄하고도 깊은 우물 속에서 검푸르게 피어나던 또 다른 빛을 마주했다.
압도적인 어둠 안에서 들려오던 묵직한 목소리는 또 다른 나였을까. 존재한 기억을 품어 안으려 한 게 아니라, 갖고 싶은 기억을 나는 만들어 왔던 것인가. 지금도 끈질긴 집착에 이끌려 끝없는 고통을 재생시킨 것인가. 그녀를 위하는 일을 통해 그녀의 일부를 소유한 듯한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던 것인가. 그녀에게 특별해진 듯한 환각에 스스로 취했던 것인가. 상실을 감내할 수 없어 지워버린 기억과 그 시절을 제 멋대로 맞춰버린 퍼즐 같은 기억을, 나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강요하며 지금껏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인가. 거절된 고백이 삶의 어처구니없는 마감으로 나를 이끌었던 것인가.
캄캄한 허공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붉은빛을 향해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시 발을 내딛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인가. 나에게 남은 건, 깊은 절망과 흐릿한 기억과 가져본 적도 없으면서 잃어버린 듯한 상실뿐이었다. 6차선 도로의 가장자리에서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몇 번의 신호가 바뀌는 동안 까맣게 뚫려버린 눈으로 물끄러미 신호를 건너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를 날카롭게 꾸짖던 꿈을 떠올리며, 푸른빛을 향해 한 발을 더 내밀었다. 세상은 질퍽한 길에서 변함없이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나를 닮은 잔상이 일렁이는 거울을 쓸쓸하게 바라봤다. 기억이 만들어질 수 있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여전히 기나긴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기분 때문인지, 실재하는 목소리가 간절히 필요했다. 휴대폰을 열어 동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수현아. 어쩐 일이야.
- 그냥... 동우야. 만년필 고마웠어. 이제 기억이 조금씩 떠오른다.
- 만년필? 무슨 만년필?
- 내 생일이라며 너와 나연씨가 같이 선물해 준 만년필.
- 어... 아닌데. 그건 나연씨가 선물한 거잖아. 네가 한동안 얼마나 자랑을 했었는데. 그 만년필 사실 나연씨가 하고 있는 달 모양 펜던트랑 세트처럼 보이기도 하더라. 나연씨 취향이 그런가 보다 했지.
얼마간의 왜곡과 오해가 있기에 어쩌면 건널 수도 있었을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건 그것대로 내버려둬야 하는데, 비처럼 퍼붓는 눈발을 헤치며 그녀를 향해 미친 듯이 차를 몰아간다. 기억은 온전히 믿을 수 있는가. 세상에는 아무리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해도 돌아서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자석의 이끌림처럼, 살다보며 어찌할 수 없는 것들도 있는 것이니까.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운명은 어디까지일까.
- 모두 잊어요. 이제 당신 삶을 살아요.
- 아니, 나는 그럴 수 없어.
찢어질 듯한 경적음과 함께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억과 캄캄한 어둠이 눈보라와 함께 밀려왔다.
(윤회. 완결.)
덧. 현재의 왜곡과 오해, 기억의 조작과 상실. 그런 것들이 있기에 어쩌면 한 시절을 온전히 지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의 심장을 널뛰게 하는 이 일은 시간이 흐른 후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요.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