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아주머니... 아... 흑... 아주머니...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가...
- 선희야. 무슨 일이야! 울지 말고 말해봐.
- 할머니가... 아아... 안 일어나요... 아...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요.
책방의 현관문이 급하게 열리고, 보랏빛 티셔츠와 남색 반바지 체육복을 입은 도라지 꽃을 닮음 아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왔다. 저수지 건너편에 사는 선희였다. 엉거주춤 서서 창밖과 나를 번갈아 보며 다급하게 말하는 선희의 커다란 검은자위가 절실하게 말을 걸어왔다. 선희의 단속적인 언어가 건너올 때마다 나의 심장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반복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모든 감각은 사라지고, 오직 그 아이만 나의 눈꺼풀 안에 선명하게 자리하는 순간이었다. 열 살배기 아이의 붉게 익은 뺨을 따라 흐르는 거무스름한 눈물길은 무언가 큰일이 일어났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갑갑한 흉곽 너머의 중량감과 오돌도돌한 목덜미의 한기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이가 사는 거창댁 할머니 집을 향해 있는 힘껏 내달렸다. 자그마한 선희도 의지할 데라곤 이것밖에 없다는 듯, 있는 힘껏 나의 등을 보며 따라 달렸다. 겨우 저수지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아득하기만 했다. 폐부를 짓누르는 듯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선희의 집에 도착해서 구겨진 할머니를 발견했다.
- 할머니. 정신 차려보세요. 할머니. 들리세요?
선희의 할머니는 잠든 것처럼, 평상 아래에 모로 누워있었다. 아니, 누군가가 휘두른 폭력의 피해자처럼 할머니는 널브러져 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이가 군데군데 나가고, 절반은 연갈색 빛으로 녹슨 삽이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119에 신고를 하고서 창백한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 붙이고, 흔들어도 보았지만, 연약한 맥박만이 건너올 뿐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배워야만 했던 흉부 압박. 내가 알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할머니의 명치를 더듬더듬 살피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규칙적으로 힘을 주었다. 타들어 갈 듯한 뙤약볕에 나의 숨소리는 불규칙적으로 일그러져 갔다.
- 제발... 제발...
어떤 기도문이라도 되는 듯,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에서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물에 빠졌다 건져진 사람처럼, 땀은 끊임없이 솟구쳤고, 가무잡잡한 아이의 얼굴에서도 눈물과 콧물이 쉬지 않고 떨어져 내렸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아이의 눈동자와 진한 쌍꺼풀에서 주르륵 하강하는 물방울에, 나의 눈물도 의지와는 상관없이 덩달아 떨어져 내렸다. 스산하게 어른거리는 굴참나무들의 그림자 사이로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선희와 나는 하얀 벽면으로 둘러싸인 중환자실 앞 복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원래부터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말도 없었다. 같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 외에는 사실 어떠한 교집합도 없는 두 사람이 멀뚱히 앉아 있었고, 둘만 남은 듯한 세상은 완벽하게 적막했다. 선희와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지만, 그저 우연히 마주치면 대화랄 것도 없는 인사 정도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가끔 거창댁 할머니의 깊은 한숨을 동반한 넋두리, 그리고 타인의 삶을 쉽게 말하길 좋아하는 마을 아주머니들의 소란스러운 수다를 통해 선희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간간이 듣곤 했다. 바닥으로 사라질 듯 고개를 수그리고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선희를 설핏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깊이 숙인 어른들의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애잔함이 왜 어린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것인가. 애잔함은 여느 때보다 깊고 어두웠다. 습관처럼 하얀 천장을 향해 입을 반쯤 벌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김선희. 선희는 십 년 전, 마흔인 김병찬 아저씨와 서른여덟의 김미숙씨가 어렵게 얻은 딸이었다. 나는 이 년 전, 서른셋의 나이에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니던 회사를 뛰쳐나와, 연고도 없는 이곳 시골에서 카페 겸 책방을 열었다. 그때는 이미 김미숙씨가 집을 나가버린 상황이었기에 그녀를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이른 아침이면 마을 건너편에 있는 버섯 가공 공장을 향해 짙은 안개를 뚫으며, 자전거를 타고서 출근하는 여인들이나, 창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삼삼오오 밭일을 하러 가는 아주머니들을 보며, 그저 순박한 그녀의 모습을 나름대로 상상하는 게 전부였다. 김미숙씨는 결혼을 하고 선희를 낳았지만, 선희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뭇없이 사라졌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허공을 향해 퍼트린 무성한 말들을 주워 담아 요약하자면, 김병찬씨가 술을 잔뜩 마시고 귀가한 날이면, 김미숙씨에게 어김없이 자행되는 김병찬씨의 폭력 때문이라고도 했고, 사업에 실패하고서 숨어 살 듯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나아질 것 같지 않은 현실과 꺾여 버린 장밋빛 미래 때문이라고도 했다. 반면, 김미숙씨에게 적의가 가득한 선희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대구에서 여성복 재단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간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서술어를 흐릿하게 떨어뜨리는 걸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희의 할머니는 김미숙씨가 돌아와 주길 간절히 바라는 눈치였다. 무슨 말이 진실인지 사실 나는 궁금하지 않았고, 판단하지 않았다. 사람은 모두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각자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니까. 진실은 오직 김미숙씨만이 알 테니까. 김미숙씨가 사라지고 이 년 간 술만 마시던 김병찬씨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만취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다가 신작로가 끝나는 길목의 다리에서 추락해 사망했다고 했다. 오직 들은 말들뿐이라 모든 걸 믿지는 않았지만, 선희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현실인 것만은 단 하나의 명징한 언어로 다가왔다.
차가운 벤젠 냄새가 잔뜩 묻은 견고하고 건조한 시선의 의사가 다가와, 연보랏빛 입술을 움직이며 거대한 침묵 안에 놓인 어색한 우리를 꺼내주었다. 내가 벤치에서 일어나자, 선희도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연하지만 혼자가 아닌 듯한 이 기분. 동질감과 엇비슷하게 닮은 듯한 감정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 연세가 있으신 데다가, 더운 날씨에 무리하신 것 같습니다.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심정지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서... 혹시 강시연씨께서는 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 이 아이는 손녀딸이고, 저는... 그냥... 건너편... 사람이에요.
- 아이 아버지나, 어머니는 안 계신 가요?
- 아버지는... 삼 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연락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더듬더듬 대답을 이어가면서 내 옆에 바짝 붙어 선 선희를 조심스레 내려다봤다. 선희는 의사와 나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떨어뜨릴 수 있는 한계만큼 최대치로 떨구었다. 고무줄로 질끈 묶은 아이의 동그란 머리가 애잔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엄마와 연락이 닿지 않는 모양새였다. 자그마한 아이의 어깨가 더 자그마해진 것만 같았다. 선희는 큰 눈을 제외하곤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모든 것이 다 자그마했다. 자그마한 것들은 자그마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연민을 불러내는 듯했다. 거친 잡초들 사이에서 얼굴을 겨우 내민 작은 풀꽃들, 호수 주변의 깎인 조약돌들, 캄캄한 하늘을 수놓은 작은 별빛들. 자그마한 것들을 볼 때면, 어렴풋하게 가슴이 저며오곤 했다. 나 스스로가 작아졌기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환자들의 안정을 위해 면회는 한 주에 한 번만 허용된다는 안내 직원의 무표정한 말을 끝으로, 선희와 나는 병원을 나섰다. 어느새 하늘은 회청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병원을 나오니 다리의 힘줄이 모두 끊어지는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요란스러운 소리가 나의 복부에서 새어 나왔다. 점심을 거르고 저녁이 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을 생각했다. 내 배가 고프고서야 비로소 아이의 허기를 헤아림에 조금의 자책과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한 팔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서 걷는 주눅든 선희에게 말을 건넸다.
- 선희야. 배고프지? 우리 밥 먹고 가자.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니?
- 저는... 괜찮아요...
선희는 큰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조금 먼 곳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희미하게 가로로 저었다. 주변을 살피다 파란색 간판에 하얀 글씨로 우연이라고 적힌 퓨전 중화요리 식당으로 아무 말 없이 아이를 데리고 가, 탕수육과 짜장면을 주문했다.
- 선희는 참 기특하다. 어떻게 나에게 달려올 생각을 다했어?
- ... 할머니가 가끔 말씀하셔서... 할머니에게나, 할머니 없을 때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건너편 책방 아주머니 찾아가라고...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마을에서 제일 젊고... 도와줄 사람이라고...
- 그랬구나... 선희는... 부먹이야? 찍먹이야?
아이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또다시 큰 눈만 깜빡였다. 모든 감정과 생각이 저 큰 눈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것 같았다. 먹기 편하게 부어 먹자며 소스를 탕수육에 들이붓고, 짜장면을 비벼서 건네주었다. 처음엔 조금씩 조심히 먹더니 이내 입 주변에 짜장 양념을 잔뜩 묻히며 자그마한 분홍빛 입술을 야무지게 움직였다. 아이의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누군가가 나의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주는 것만 같았다.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충만함에 가까운 이 감정. 막연하지만, 혼자가 아닌 듯한 이 기분. 노트에 기록해 두고, 살아가면서 가끔씩 서랍 속에서 꺼내보게 될 특별한 순간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아이의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말은 사실이라 여겨졌다.
뜻밖의 하루를 뒤로하고 택시의 가죽시트에 몸을 구겨 넣고서 고개를 돌려 선희에게 시선을 두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선희의 눈은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더 깊어진 것만 같았다. 차창 밖의 키 큰 관목들과 키 작은 잡목들이 우리를 뒤따르며 소곤거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눈을 감아야만 했다.
쏟아질 듯한 무수한 별빛과 온 힘을 다하는 듯한 개구리의 울음소리만이 까만 여름밤을 밝히고 있었다. 선희네 집에 도착해 형광등을 켜지만 황막한 집을 대변이라도 하듯, 파리한 불빛은 반복적으로 비틀거렸다. 무언가가 목구멍에 걸려 호흡을 갑갑하게 만드는 듯해서 너는 괜찮냐는 듯, 선희를 가만히 바라봤다. 선희는 나의 시선을 피하는 듯 보였으나, 아이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가득 찬 두려움과 쓸쓸함이 비집고 새어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조그만 선희의 머릿속에는 지금 무슨 생각들이 지나가고 있을까. 흰색 벽면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초라한 단층 주택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궁금한 것도 없었지만, 처음 느껴보는 알 수 없는 감정들 때문에 여기저기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 음... 선희가 너무 어려서 혼자 있기에는 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은데... 나랑 있는 게 불편한 게 아니라면...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떨까 해서.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까만 눈동자를 이윽히 들여다보았다. 얼굴을 덮고 있던 석고 반죽이 떨어져 나간 듯, 아이의 근육이 느슨해지고 검푸르게 질린 입술이 조금 벌어지며, 선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되지 않는 아이의 속옷과 양말, 옷가지와 필요한 물품들을 가방에 담아 집으로 향했다. 저수지를 가로지른 선선한 미풍이 나와 선희의 목덜미로 스며들었다. 집에 도착하니, 한낮의 긴박했던 일을 재생이라도 하듯, 연둣빛 책방 문은 열려 있었고, 이십 오도에 맞춰진 에어컨은 지금껏 가동되고 있었다. 반가운 건지 배가 고픈 건지, 하얀 여름이가 꼬리를 세차가 흔들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여름이의 명랑한 목소리는 집이라는 안정감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는 듯했다. 비로소야 밀려드는 안도감과 더해진 자그마한 체온에 깊은 여름의 밤은 평온했다. 카운터 위에 단정하게 놓여있는 쪽지와 현금을 집어 들었다.
- 싯타르타. 한 권 가져갑니다. 책방지기님.
쪽지를 선희에게도 슬며시 보여주었다. 좋은 사람들이라는 듯 싱긋 웃어 보이자, 선희도 처음으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종이책을 찾는 천연기념물 같은 이들에게선 많든, 적든 여전히 믿음 비슷한 류의 마음이 생기곤 했다. 대기업을 뛰쳐나와 글을 쓰며 시골에서 책방을 시작할 때도 불안함이 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이런 다정한 마음들을 우연과 필연, 그 어디즈음에서 만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흔들리는 나를 발견할 때면, 어디선가 그런 작은 마음들이 나타나 나를 붙잡아주곤 했다. 선희의 옅은 미소에서 그러한 능력이 배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씻으라며 이 층 욕실로 올려보낸 선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삐죽삐죽하며, 다시 일 층 책방으로 내려왔다.
- 저... 아주머니... 죄송한데, 비누가 없어서...
- 비누?... 아... 바디워시로 씻으면 돼... 나도 얼마 전까지는 비누로 씻었는데, 바디워시로 씻으면 향기가 더 좋은 거 같더라. 그걸로 한번 씻어볼래?
바디워시와 샴푸를 챙겨주고 다시 일 층으로 내려와 책방을 정리했다. 매일 그날의 결제된 금액을 계산하고 판매된 책과 음료의 목록을 정리해서, 그다음 날 필요한 재료와 도서를 거래업체에 주문했다. 몸이 아파도 정해진 일상을 빠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별 것 아닌 일상이지만 한 번이라도 지켜내지 못하면, 삶이 무너질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 일상을 모른 척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나의 일상을 갑자기 비집고 들어온 처음 겪어보는 생경한 아이의 일상을 먼저 생각해야만 했으니까. 문득 삼 학년인 선희의 등교와 학교생활이 궁금했다.
- 선희는 지금 방학이지?
씻고 나온 선희의 머리칼을 헤어드라이기로 말리며, 말을 꺼내었다. 선희는 키가 작은 나무처럼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주의 깊게 들으며 말하는 듯,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마치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질문인 것처럼.
- 이번 주까지는 방학이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학교에 가야 해요
- 그렇구나. 선희야. 요즘에는 방학 숙제라는 게 있니? 아줌마 어릴적에 학교 다닐 때는 탐구생활이니, 뭐니 해서 개학할 무렵에 엄청 바빴거든.
- 그런 숙제는 없는데... 숙제는 몇 가지 안 되어서 다 했는데... 아... 한 가지는... 아직 못했는데...
- ... 학교 알림장이라 하나? 혹시 괜찮으면, 그거 좀... 보여줄 수 있겠어?
선희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한 나비처럼 머뭇머뭇하다가 가방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빛바랜 종이를 마디게 펼쳤다. 수도 없이 접었다 펼친 듯한 선명하게 접힌 선을 따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미세한 떨림과 함께, 이 숙제는 반드시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며, 선희는 말끝을 힘없이 흩트렸다.
- 좋아하는 사람과 소풍이나, 여행 다녀온 후 감상문 적기.(그림을 추가해도 좋음.)
고개를 숙이고서 선희의 흔적이 진하게 밴 노르스름한 종이를 뚫어질 듯 내려다봤다. 안 해도 되는 숙제가 어디 있을까. 어디선가 본 듯한 쓸쓸함이 읽히는 종이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고개를 들어 선희의 얼굴을 살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를 일으켜 잠을 청했다. 엄마라도 찾아오면 내어주던 방으로 선희를 데려갔다. 에어컨을 취침 모드로 틀어주고, 어색한 말투로 잘 자라고 인사를 했다. 뒤돌아 나와 문을 닫고서, 잠시 기댄 채 천장을 바라봤다. 무슨 큰 일을 치룬 사람처럼, 깊고도 길게 큰 숨을 두어 번 내어 쉬었다.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여름의 노란 햇살이 바닥을 지나 비스듬하게 침실로 스며 들었다. 멀리서 하얗게 색칠한 뭉게구름이 파릇한 산허리를 넘어 다가왔다. 아침부터 요란스레 울어대는 매미 소리에, 듣기 좋은 다른 소리가 섞여 귀를 두드렸다. 육 년 전, 신혼 초에나 들을 수 있었던 부엌 개수대에서 물이 흐르는 투명하고도 깨끗한 소리였다. 부엌으로 나가보니 의자에 매달리듯 올라선 자그마한 선희가 피곤한 나머지 어제 내가 하지 못한 설거지를 신중한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 선희야. 잘 잤어? 설거지는 왜 하고 있어. 내 살림이니 내가 할게.
-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냥... 눈이 일찍 떠져서. 그런데 쌀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어서.
- 아... 나는 아침에 토스트 구워서 커피 마시는데, 선희는 밥을 먹는구나... 선희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밥을 먹어야겠다. 내가 밥하는 동안 선희는 밖에 가서 여름이 아침밥 좀 챙겨줄래? 여름이 밥 먹이고, 목줄 풀어서 산책도 좀 하고 와.
- 여름이랑... 할머니 집에 다녀와도 되나요?
- 그럼. 가서 필요한 게 있으면 좀 더 챙겨오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선희의 발걸음에 어떠한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름이의 목줄을 잡고서 걸었다 뛰었다 하며 할머니 집으로 향하는 선희를, 커다란 정사각형의 고정창을 통해 내려다보았다. 아이같았다. 선희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아이다운 분홍빛 미소를 입가에 가득 바르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음을 알기에 조금 서글픈 마음이 일었다. 덩치가 큰 리트리버이기 때문인지, 선희가 또래 아이들보다 작아서인지, 선희와 여름이의 크기에서 어떤 차이도 느껴지지 않아 조금 서운한 감정도 일었다. 처음 본 열 살배기 다운 모습에 발끝까지 이어진 실핏줄마저도 저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직하게 흐느끼는 듯한 내 안의 감정들과 감각들. 선희와 여름이를 감싸안은 노르스름한 햇살에 눈이 시렸다,
계란 프라이와 소고기를 넣어 미역국을 끓여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엄마 외에 타인과 마주 앉아 밥을 먹은 기억이 흐릿하기만 했다. 조금 어색하기도 했으나,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듯한 하얀 식탁보가 유난히도 아름다웠다.
- 수요일은 책방 정기 휴일이니, 우리.. 그날 대구에 있는 이월드로 소풍 갈래? 날씨도 너무 좋을 것 같은데?
- 아주머니... 괜찮으시면...
선희는 습관처럼 큰 눈을 깜빡이며 잠시 먼 곳을 보다, 혀끝에서 되돌아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선희는 밥알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조심스레 밥을 먹었다. 밥공기를 다 비워갈 무렵 몇 번이나 입술을 움직이다 멈추기를 반복하다, 조심스레 나에게 질문을 했다.
- 그런데 아주머니... 저... 오늘은... 무슨 요일이에요?
- 오늘은 월요일이야.
월요일이라 말해 주자, 선희는 잠시 셈을 하는 듯하다가 숨기듯 웃으며, 미역국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아이의 모습에 생경하기만 한 설렘과 충만함이 만져졌다. 나도 다시 달력을 바라봤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눈을 떠보니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만이 있었습니다. 가끔 슬퍼 보이기도 하지만, 다정한 책방 아주머니와 대구에 있는 이월드라는 곳으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방학이지만, 평일이라 아이들이 적어서 놀이기구를 기다리지 않고도 탈 수 있다며, 아주머니는 뛸 듯이 좋아하셨습니다. 표를 끊고, 들어가니 신기한 세상이 있었습니다. 아주머니와 저는 먼저 케이블카를 타고 타워로 올라가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건물이 장난감처럼 보였습니다. 저기 어딘가에서 엄마도 작은 모습으로 있을 것 같았습니다. 너무 자그마해서 엄마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놀이기구는 역시 후룸라이드라며, 아주머니는 즐거우신지 제 손을 이끌고 빠르게 걸으셨습니다. 쌩하며 내려올 때 차가운 물줄기에 옷과 머리카락이 젖어서 우리는 서로를 보며 크게 웃었습니다. 문득 아빠와 이곳에 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하다 아빠한테도, 아주머니한테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범퍼카를 탔습니다. 아주머니는 저에게 일부러 부딪치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저도 슬쩍 아주머니에게 부딪쳤습니다. 자꾸만 웃음이 났습니다. 아주머니는 어른인데도 오늘만큼은 이상하게 저와 같은 나이의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키가 작아 많은 걸 탈 수는 없어서 동물원에도 갔습니다. 동물들이 더위에 지쳐 보여 마음이 안 좋았지만, 먹이도 사서 주었습니다. 사막여우는 두 마리가 멀리서 이곳까지 왔는데, 한 마리가 아파서 한 마리만 있었습니다. 남은 한 마리는 아픈 친구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혼자라 무서워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병원에 계신 할머니가 빨리 나아서 집으로 돌아오시길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아주머니와 저는 다양한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뷔페식당에 가서 누가 많이 먹는지 내기를 했습니다. 제가 이겨서 아주머니에게 꿀밤을 줘야 했습니다. 그런데 꿀밤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 ‘김선희’의 여름방학 숙제 중. -
덧. 어느 덧 경칩이 지났습니다. 매년 찾아와 주는 봄이 고맙습니다. 정신없는 일상이다보니, 요즘은 부쩍 별일 아닌 일에도 고맙기도 하고, 즐겁기도 합니다. 기적이나 행복이 뭐 별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매년 찾아와주는 산수유 꽃이 기적이 아닐까요.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