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기억을 지우거나 바꾸면,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을까. 캄캄한 어둠이 기억을 포함한 나의 모든 걸 삼켜주길 소원한다. 기억상실이든, 기억조작이든,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내 앞에 그토록이나 원하던 그 어둠이 일렁인다. 유일한 구원이라 여기지만, 솔직히 지금 나는 두렵다. 가느다란 빛조차 새어들지 않는 칠흑 같은 이 공간이. 허공일까, 바닥일까. 나는 날아올랐다. 아니 허공에서 허공으로 추락했다. 설핏 스치던 자홍과 청록이 얽힌 희미한 빛이 번쩍이다, 연가 등을 닮은 하얀 빛이 정수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꽤나 긴 세월인 듯 또는 찰나의 순간인 듯 느껴지기도 하던 광휘. 황홀함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빛들은 일제히 소멸했다. 손과 발의 윤곽은 가뭇없이 지워지고, 나를 둘러싼 세계조차 서서히 눈을 감았다. 압도적인 적막감 앞에, 그렇게나 간구했던 기억의 멸실되는 소리조차 들리는 듯했다. 쓸모도 없는 육안으로 처절하게 더듬어도 보지만,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차가운 한기만이 다리를 기어올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간의 생존 욕구는 인간을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공포와 절망감에 지질린 목을 움켜잡고서, 쥐어 짜내듯 절실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 여기 아무도 없나요. 제발 누가 나 좀 찾아줘요.
미친 짐승 같은 비명이 돌고 돌아 흩어졌다. 울음소리에 대한 안쓰러운 대답이었을까. 어느 순간 거리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푸르스름한 형상이 윤슬처럼 일렁였다. 양초의 심지처럼 파리하게 덩어리진 빛은, 어딘지 모르게 지울 수 없는 기억의 힘으로 힘겹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태우고 싶어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 모두 잊어. 이제 네 삶을 살아.
- 누구... 시죠? 여기는 어디죠?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
- 살아. 살다보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여겨질 테니까.
광림한 빛은 불가해한 말로 나의 몸을 희미하게 비추다가 한순간 파도처럼 쓸려갔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어조의 음성은 흔적도 없이 멀어지고, 아무것도 없는 듯한 공간에는 이내 친숙한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 아들, 깨어났네. 깨어났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후터분한 냄새와 벤젠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날카롭게 찔렀다. 눈꺼풀 너머로 명암의 움직임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형광등인 듯한 불빛이 명멸하다, 이내 나의 동공으로 쏟아져 내렸다. 구깃한 가운을 입은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어머니를 향해 연갈색 빛 입술을 차분하게 움직였다. 불투명한 거름망을 통해 가까스로 여과된 진득한 액체처럼, 언어들은 토막나고 끈적한 모습으로 나에게 건너왔다.
- 강수현씨. 들리시나요? 한 주 전에 교통사고로 인해 뇌출혈이 있었습니다. 일단 수술은 잘 되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만, 좀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당분간은 요양에만 힘쓰시면 됩니다.
아버지는 큰 빚을 진 사람처럼, 연신 의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순간 달리던 차량이 나를 온전히 피하지 못해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한 주간 죽은 듯이 누워만 있다가 비로소 나는 깨어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사고의 후유증인 듯,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최근의 기억들이 모두 사라졌다. 사고의 충격으로 인한 '해리성 기억상실'이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눈물이 가득 고인 어머니의 노쇠한 얼굴이 그저 낯설기만 하다. 얼마간의 시간이 나의 세계에서 완전히 잘려 나갔다. 존재하지 않으나 살아있었던 시간을 소생시키기 위해 시간은 얼마나 다시 필요한 걸까.
가까운 기억부터 떠올리다 보면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의사의 충고대로 다니던 회사에 병가원을 들고서 찾아갔다. 그곳에는 나의 하루 중 가장 긴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을 무렵, 다가오던 누군가의 눈동자를 지나치다, 다시 한 점에서 부딪혔다. 단정하게 묶은 까만 머리칼. 커다랗고 짙은 눈동자. 목까지 올라오는 회색 스웨터. 검은색 슬랙스 바지를 입고 까만 단화를 신은 한 여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동굴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얼굴에 차오르는 알 수 없는 열감에 당혹감을 느끼며, 마주친 시선을 떨어뜨려야만 했다. 열기에 녹아내릴까 발끝만 바라보며,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미동이 없었다.
- 저기, 안 타시나요? 몇... 층 가시나요?
- .....
얼음 기둥 같은 그녀는 경직된 고개를 그저 희미하게 저을 뿐이었다. 그녀와 나를 사이에 두고서 엘리베이터의 문은 서서히 닫히고 멀어졌다. 하지만 짧은 마주침에도 불구하고 끝내 발견되는 것들이 그곳에 남았다. 그녀의 확장된 동공과 손에 쥔 서류들의 미세한 떨림, 슬픔을 가득 진 듯한 동그란 어깨, 하지만 안도하는 듯한 그녀의 옅은 미소. 닫힌 문 너머에서 한 줄이 되어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음이 가까이 다가왔다.
- 팀장님.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 이만해서 천만다행이네. 푹 쉬고 건강하게 돌아와.
- 강 대리님,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나연씨는 지금도 얼굴이 사색을 하고 있어요. 아, 나연씨는 사무용품 사러 갔을 텐데 기다렸다 보고 가세요.
- 고마워요. 조금 더 온전해지고 출근해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무실을 나오며 입안에 가시라도 박힌 듯, 더듬더듬 발음했다.
- 이.나.연.
내 기억의 퍼즐 조각에는 없는 이름. 서랍 속에 묵혀둔 숙제라도 되는 듯, 이나연이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하지만 존재는 실존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일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았던 그녀의 잔상이 이나연이라는 이름을 금세 지워버렸다. 이나연이라는 사람보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성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이성을 향한 인간의 본능인가, 아니면 인연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그런 것인가. 이런 와중에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도 모르게 마치 행복하다는 듯, 마치 한심하다는 듯, 실없는 사람처럼, 가느다란 바람이 빠지는 풍선처럼, 어느새 나는 가늘게 웃고 있었다. 회사 로비를 빠져나가려 할 때, 회사 친구인 동우가 황급히 달려와 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 야. 여기까지 와서는 연락도 없이 그냥 가냐?
- 어... 동우야. 잘 지냈지? 미안하다. 사고 때 휴대폰이 완전히 망가졌어.
-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기억이야 곧 돌아오겠지. 괜찮으면, 차 한잔하고 가.
회사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동우와의 최근 기억도 망실되었다. 몇 년 만에 친구를 우연히 만난 듯한 기분에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어색한 마음에 머뭇거리며 웃어야만 했다. 기억과 동시에 친밀감조차도 함께 분실된 것만 같았다.
- 동우야. 너 말고 내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또 있어?
- 아마... 너랑 같은 팀에 이나연씨가 회사에서는 가장 친할걸? 내가 알기에는...
- 이나연씨라는 분은 내가 최근에 알게 된 사람인가? 그래서 그런지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 이나연씨가 우리 회사에 입사한 게 일 년 좀 넘었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네.
- 동우야... 지난 일 년 동안 나는 어떤 사람이었어?
- 너? 음... 너는...
지난 일 년간, 마지막 햇살이 창가에 머무를 무렵이면, 매일 누군가를 만나는 사람처럼, 너는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계약직으로 입사한 이나연씨를 동생처럼 각별하게 챙겼다. 커피를 마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그녀부터 찾았다. 그녀가 작성한 서류를 먼저 살펴보고,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비밀처럼 나직히 조언해 주곤 했다. 부서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그녀 곁에 바싹 붙어 앉아 혹시라도 느낄 소외감을 차단하려 애썼다.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처럼 좋아하는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고, 약속은 가급적 피했다. 그런 너는 언제부턴가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달그림자 같은 음영이 얼굴에 길게 드리웠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건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었다.
동우 또한 어떤 이정표라도 되는 듯, 이나연이라는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이나연씨를 한 번 만나봐. 도움이 될 거야. 연락처 알려줄게. 무척 반가워할 거야. 우리 셋이서 꽤나 친하게 지냈으니까.
- 고맙다. 그런데 네 얘기를 듣고 나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사실 더 모르겠어. 내가 아닌 것도 같고...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라니...
- 그냥 그렇게 보였다는 의미야.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면 괜찮아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와 휴대폰에 저장된 열한 자리 숫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녀의 숫자는 잠겨버린 기억의 자물쇠를 얼마나 열어줄 수 있을까. 열한 개의 숫자를 기도하듯 읊조렸다. 마치 어떤 두려움을 물리기 위한 의식처럼.
- 혹시 이나연씨... 되시나요? 저 강수현입니다. 저... 아시지요?
- ... 네. 강대리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 네. 기억은 없지만... 저랑 나연씨가 친했다는 얘기를 친구인 동우에게서 들었습니다.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기억이 없으니, 제가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침묵. 커다란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것만 같은 어떤 모양의 침묵이었는데, 그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불투명한 침묵의 정체를 더듬거릴 무렵, 수화기 저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침묵을 부수며 천천히 흘러나왔다.
- 네... 아이를 돌봐 줄 어머니가 병원에 계셔서 주말에나 시간이 날 것 같아요.
- 감사해요. 저는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럼 주말에 뵙겠습니다.
약속을 정하고서 전화기 너머로 사라진 그녀를 조금 더 붙잡아 두었다. 돌봐야 할 아이가 있는 기혼의 여성. 가냘프지만 묵직함이 배어 나오는 억양. 삶의 고단함과 어떤 서운함이 섞인 낮은 목소리. 곰곰이 그녀를 생각하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애써 단념하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고등학생 시절 문학반 활동을 하면서부터 일기의 형식을 빌려 끄적이던 습관이 나에게 있었기에, 조금의 기대감으로 책상 서랍들을 열었다. 그리고 맨 아래 서랍 속에서 빛바랜 갈색 노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작의 문장을 살핀다. 푸르스름한 물 자국이 번진 마침표들이 군데군데 찍혀 있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페이지에는 무엇을 썼던 것일까. 베일 듯한 단면 사이로 숨어버린 이야기들에 괜스레 가슴이 저며왔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이야기는 기형도의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기형도의 시를 필사하며 나는 무엇에 아팠으며, 어디에 갇혔던 것일까. 추상적인 시구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언어들이 기호와 상징이 되어 노트에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고고학자처럼 어렴풋한 흔적들을 발굴하고, 해석하려 애썼다. 나는 고달픈 글쓰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닿으려고 시도했던 것일까. 동우의 말처럼,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친한 친구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을, 나는 잃어버린 걸까. 아니, 지워버린 걸까.
- 밤하늘에 너의 이름을 걸어둔다. 별빛 하나가 나에게 내려앉는다. 나의 눈동자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별빛에 내 마음은 시리게도 반짝인다.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끝없이 펼쳐진 까만 밤하늘을 줄지어 수놓는다. (1월 28일, 어느 겨울날)
노트에 적히지 않은 별빛을 닮은 이름은 누구일까. 초승달 문양이 새겨진 낯선 만년필을 거꾸로 세워 책상을 반복적으로 두드리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스치듯 지나간 그녀를 다시 떠올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어느 고즈넉한 대웅전 앞의 항아리에 누워, 기어이 피어난 하얀 수련을 보는 것만 같았으니까. 자그마한 수련을 보면 차오르곤 하던 아련한 마음이, 그녀를 향해서도 느껴졌으니까. 정처 없이 회사 근처를 맴돌면 우연히라도 마주칠 수 있을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또 싫어할까. 수신자 없는 노트의 문장들이 왠지 그녀를 향해 쓰인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과거의 내가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떠올리며 미리 써놓은 예언서처럼. 반복되는 것만 같은 사랑과 이별에 관한 어느 유행가의 가사말처럼. 마침표도 없이 돌고 도는 듯한 문장들의 궤적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처음 본 그녀에게서 동시에 일어서는 설렘과 두려움. 이 모순적인 감정의 실체를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막 갈아 둔 먹빛이 되어 내 안에서 자꾸만 달무리처럼 번져갔다. 지워진 기억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거실 창에 사선으로 매달린 겨울의 진눈깨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세상은 질퍽한 거리에서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뒤를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기억이 사라져 뒤를 버린 듯한 나는, 어떠한 기약도 없으면서 기대 섞인 예감에 이끌리듯 막연히 회사로 향했다.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 막연하게 회사 정문을 응시했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간혹 낯익은 이들의 얼굴이 보여 반가운 마음이 되어 조금 웃기도 했지만, 그녀를 놓칠세라 다시 고개를 수그리고 살짝 치켜뜬 시선만을 그곳에 두었다. 커피와 얼그레이, 그리고 자몽차를 연이어 마시는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비례해서 초조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진눈깨비는 어느새 굵직한 습설로 바뀌어 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물과 눈이 뒤엉킨 사이로 며칠 전과 같은 복장인 그녀가 회사의 회전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퇴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그녀는 코트를 걸치고, 가방을 들고서 정문을 벗어났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을 펴 창에 대었다. 나의 손바닥을 지나 그녀는 우산도 없는 채로 거리를 향하고 있었다. 의지가 간섭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향해 있는 힘껏 내달렸다. 말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은 마음에 널뛰는 심장을 움켜쥐고서 전력으로 질주했다. 유전자에 내재한 본능이라 설명하는 것 외에는 나조차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몸이 시키는대로 뛰어갈 뿐이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머리 위로 다급하게 우산을 세워 펼쳤다.
- 저기... 비가 이렇게나 내리는데... 저는 괜찮으니 이거 쓰고 가세요.
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나 나를 잠자코 바라보다, 이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뺨을 따라 주르륵 흐르는 그녀의 눈물에 어쩔 줄 몰라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 반복했다. 반가움이 묻은 떨리는 목소리를 그녀는 입술을 열어 고요히 밀어내었다.
- 강대리님, 제가... 이나연이에요.
- 아... 반가워요.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커피에서 일어나는 하얀 김이 기억의 실오라기처럼 떠오르다 공중으로 흩어졌다. 마치 흐릿해져 버린 나를 보는 것만 같았으나, 지금의 나는 커피처럼 따뜻했다. 그녀와 마주 앉아 지나치게 뜨겁다는 듯, 두 손으로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수련이 피어난 듯한 그녀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녀가 이나연씨라는 사실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았던 그녀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몸 안 가득 전류를 저릿하게 흘려 보내는 것만 같았다. 빗방울이 사선을 그으며 간절하게 매달린 창밖의 풍경은 연회색 장삼 빛으로 가득했다.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옆 모습은 성당에 걸린 경건한 초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나의 숨소리는 경건함을 비집고서, 고해하듯 미세하게 떨렸다.
- 우리가 친했다고 들었습니다.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염치불구하고, 혹시 생각나는 일들이 있으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깊은 우물 안에서 힘겹게 길어 올린 듯한 묵직한 숨을 길게 내어 쉬며, 그녀는 커피로 축여진 연한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마치 희망을 말해 줄 것만 같아, 그녀의 입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 대리님은 친절한 분이셨어요. 그게 연민이든, 우정이든, 인간애든, 그것이 어떤 마음에 근원을 두었든, 저는 참 고마웠습니다. 고단한 시절이었지만, 대리님이 아침마다 건네주는 커피 한 잔에 힘을 내어볼 수도 있었으니까요. 사내 식당의 위치조차 모르는 저를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알려주셨지요.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저에게 먹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어봐 주기도 하셨어요. 간혹 제가 일이 많아 퇴근이 늦어질 때면, 마치 대리님도 일이 많은 것처럼 남아계셨지요. 덕분에 소등된 캄캄한 사무실과 복도가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가끔 늦은 퇴근으로 버스가 끊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항상 집까지 데려다주곤 하셨어요.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날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대리님은 저에게 의지가 되는 분이었어요.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친오빠처럼. 대리님은 자상한 분이었고,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녀의 목에 걸린 보름달 모양의 은빛 펜던트에 시선을 붙잡히고서,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가까이에서 아주 오랫동안 들은 듯한 목소리. 멀리서 아득한 울림처럼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 그녀의 언어를 따라 몸에 밴 습관처럼, 목을 길게 빼내고서 고개를 그저 주억거렸다. 그녀는 더할 얘기도, 덜어낼 얘기도 없다는 듯, 그저 커피를 마시며 어느 순간 밀도 높은 침묵에 잠겼다.
-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나 봐요.
- 계약기간이 만료되어서...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 이것도... 이미 제가 알고 있었던 일이겠지요?
- ... 네.
-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런지, 꿈속에서 살아오다 잠에서 깨었는데, 다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요. 바쁘실 텐데 제가 시간을 많이 빼앗은 듯해서 죄송합니다. 댁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 아니에요. 버스가 자주 있어요.
- 제 기억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래요... 비가 어느새 눈으로 바뀌었네요.
차창 밖을 가만히 응시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설핏 훔쳐보다, 그녀의 무릎에 놓인 가방에서 보르헤스의 픽션들이라는 책을 알아봤다. 읽어보지 못한 책인데 읽은 듯한 기분이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삶을 환(幻)이라 여겼던 사람.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사력을 다해 글을 썼던 사람. 그래서 무참한 삶을 건너올 수 있었을 사람. 나의 기억이 돌아와도 한번 절단된 그 시절은 환상처럼 느껴질 것만 같았다. 환상이라면 그냥 지나쳐도 괜찮을 것같은 생각을 하다가, 누군가가 책망이라도 하듯, 가슴에 알 수 없는 통증이 저려왔다.
- 보르헤스를 좋아하시나요?
- 삶이 환상이라고 말한 작가라며, 대리님이 읽어보라고 권해 준 책이에요. 평소에도 누구에게나 사는 일은 고통스러운 거라면서, 저를 위로해 주곤 하셨어요. 이 책도 아마 그런 마음에서 주신 게 아닌가 해요. 어려워서 아직 반도 못 읽었지만...
조금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에 그녀와의 추억을 되찾고만 싶은 의지가 다시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비록 환상처럼 여겨지더라도 분명 간직하고 싶은 꿈이니까. 우듬지에 걸린 눈들이 하얗게 타오르며 바람을 흔들었다. 나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생시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2부에서 계속.)
덧. 기억이 사라지면 한시절 사랑했던 시간도 무의미해지는 걸까하는 질문에서 예전에 써본 소설입니다. 쓰나미처럼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이 빨리 끝이 나길 바라봅니다. 온전히 글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길.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