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목을 조금 길게 빼어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칼바람에 머리가 흐트러지듯, 께름직한 어젯밤 꿈이 자꾸만 당신의 머리를 들쑤신다. 더 이상 간절할 건 어디에도 없다고 여겨왔으나, 꿈 해몽을 떠올리다 밀려오는 간절함에 스스로 조금 놀라기도 한다.
- 인상도 좋으시고... 그런데 나이가 좀 있으시네요... 괜찮으시겠어요?
- 네.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 오후에 한 분이 면접 보러 오시기로 했어요. 결정되면 저녁쯤에 연락드릴게요. 합격하시면 내일 저녁부터 근무하셔야 하는데, 가능하시지요?
- 네.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예전의 당신에겐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면접자 서약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시간과 이름을 반듯하게 적고 서명한다. 활자화된 당신의 이름이 낯설기만 하다. 육 개월 전까지만 해도 결재 서류에 수도 없이 당신만의 서명을 했었다. 언제까지나 찬란할 것만 같던 이름. 그러나 기울어져 버린 그 이름을 공식적인 서류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참혹했던 순간이 다시 눈 앞에서 지나간다.
- 과장 박경수. 7. 30. 자로 사칙 제26조에 의거 해고함.
지울 수만 있다면 모든 곳에서 딜리트 키(delete key)를 눌러 삭제하고만 싶던 당신의 그 이름. 사라져도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텐데,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만 같은 고름처럼 여겨지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몸에 각인하듯 다시 또박또박 천천히 눌러 적는다. 하지만 이름에서 딱딱하게 굳어진 살과 같은 견고함을 알게 모르게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이름을 지워버리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박.경.수. 라,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로 발음한다.
당신은 점장에게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빠져나온다. 점장의 눈빛에서 비껴가던 경계심과 의구심을 곱씹는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가장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언젠가부터 당신에게 생겼다. 그가 질문을 몇 가지 하지 않았고, 당신의 대답은 고작 한 문장뿐이었음을 되뇌이며, 조금씩 낙망하는 자의 표정으로 변해 간다. 낯익은 우울감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에 심장은 초조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면접을 보기 위해 오늘 항우울제를 먹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그 자리에 서서 입안으로 약을 털어 넣는다. 우울감을 억누르기 위해 아버지의 신용카드를 떠올리며,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수많은 책을 둘러보다가 작가처럼 글쓰기라는 책을 집어 들고, 서점의 멤버십 카드라는 것도 처음으로 만든다. 소슬한 겨울의 도심지 거리를 걷다가 문득 휴대폰을 열어, 생일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면 동료들이 보내주던 스타벅스의 기프티콘이 남아있는지를 살핀다. 한 장이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근처 스타벅스로 향한다. 당신은 다 쓰지 못한 에세이를 저녁 시간까지 마무리할 결심을 한다. 내일이 마감일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글을 쓰는 동안 편안함에 가까운 감정과 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에 글을 통해 세상에 외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쓰다만 에세이를 다시 클릭한다. 당신은 스스로 안심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고심하며 글을 쓰고 있을 무렵 면접을 보았던 편의점 점장으로부터 합격 연락을 받는다. 누군가로부터 허락되어 졌다는 사실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잠시 둘러본다.
- 저, 합격했어요. 합격했다구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붙잡거나, 껴안기도 하는 상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한 시간 전에 완성했지만, 머뭇거리며 보내지 못하던 원고를 에세이 잡지사의 이메일로 발송한다. 정성껏 메일을 작성하고 인사를 하는 일도 빠뜨리지 않는다.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사실에 낯설기만한 성취감을 느낀다. 오늘 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당신의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 저 합격했어요. 아래 정류장 편의점에 야간 아르바이트...
- 고생했어. 아들. 아버지 들어오실 때 삼겹살 좀 사오라 해야겠다.
- 아니에요. 아르바이트가 뭐라고...
- 뭐냐니. 세상에 뭐든 단번에 되는 일이 어디에 있든? 살아보니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이 있던가. 가다 보면 나아지고 보이는 거지. 물고기들이 알 낳으려고 강물까지 거스르면서 얼마나 열심히 헤엄치냐.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말을 되뇌이며 문장을 끄적인다. 마치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어느새 당신은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에 애쓰는 사람이 되었다.
- 나를 짖이기고 지나가는 삶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그런 삶의 멱살을 붙잡고서 따져 묻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삶은 그저 흘러갈 뿐이다. 다만, 그저 떠다니는 것과 헤엄을 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당신은 편의점에 처음 출근해서 점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해야 할 일과 야간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일, 긴급할 경우 눌러야 하는 비상벨의 위치까지 세심하게 설명을 듣는다. 오랜 직장생활을 통해 몸에 밴 의무감과 책임감을 따라 성실하게 해야 할 일을 한다. 일이 손에 익숙할 무렵부터 한밤에 손님이 없을 때면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눈에 띌 만큼의 특별한 변화가 당신에게 일어나진 않았지만, 당신의 일상에는 터무니없는 낙관이나, 완전한 비관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비록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희미하고도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움직이는 박경수라는 사람만이 살아갈 뿐이다.
한밤의 두 시경, 세상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당신은 카운터에 기대어 책을 읽는다.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서 편의점에 들어선다. 그녀는 꽤나 많은 양의 술을 마신 듯 뺨이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울기라도 했는지 눈 아래가 검푸르게 번져 있었다. 그녀는 검붉게 실금이 간 눈동자로 당신의 가슴 어딘가에 흐릿한 시선을 두고서, 자신의 발음을 다시 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리게 입술을 움직인다.
- 어서요세요.
- 저기. 에세 원... 한 갑 주세요.
당신은 뒤돌아서 당신의 얼굴 위쪽으로 디스플레이 되어있는 담배를 찾아 그녀를 향해 다시 돌아선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당신의 눈동자와 한 점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카운터 위에 펼쳐진 책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 그녀는 중얼거린다.
- 다른 사람의 정수리를 보면... 왜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요.
- 네?... 저도 이유는 모르지만, 사실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 작가 지망생이신가 봐요?... 책이... 하고 싶은 게 있으신 듯해서 부럽네요.
- 아... 그냥 읽어보는 거라서.
당신은 그녀의 모습에 걱정 섞인 안쓰러움이 일어 생수 한 병을 집어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는 우는 듯, 웃는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잇는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 당신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버릇이 생겨났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많은 사연들을 공감하거나, 최소한 이해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 외로움이랑 고독이랑은 다른 거 아세요? 외로움은 말이죠. 외부의 자극이 없어서 괴로운 거고, 고독은 내부의 자극과 왈츠를 추는 중인 거에요. 그런데 아저씨는 나와는 다르게 왈츠를 추는 것 같아요. 박완서나 김훈 작가가 사십 대에 등단한 거 아세요? 술에 취해서 그런지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피곤하실 텐데... 수고하세요.
- 아니에요.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좀 앉았다 가셔도 되세요.
그녀는 나가려다 말고 테이블에 앉아 당신이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푸념 섞인 이야기들을 쉬지 않고 꺼낸다. 칠 년을 만난 남자 친구가 바람을 펴서 최근에 헤어진 이야기부터, 이상한 직장 상사로 인한 심각한 스트레스와 대학 시절 자신의 꿈이 방송작가였던 이야기까지, 그녀는 두서는 없었지만, 동화책을 읽듯 많은 사연들을 읊어주었다. 당신은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그녀에게 한마디를 전한다.
-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그녀가 돌아간 후 잠시 기지개를 켜고 목뼈와 척추뼈를 주먹으로 두어 번 두드린다. 비록 술에 취했지만, 평범한 얼굴의 다정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를 생각한다. 작가 지망생이냐고 질문하던 그녀의 말에 어색하기도 했지만, 풍선처럼 기분이 떠오른다. 그리고 남은 근무시간 동안 더 이상 손님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금 웃기도 한다. 당신은 다시 책장을 넘긴다.
그녀는 저녁 여덟 시가 되면 어김없이 편의점에 들러 햇반이나 과자 같은 것들을 고르곤 한다. 그녀는 손님이 없을 때면 테이블에 앉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나, 친구들과 나눈 대화나, 지금 살아가는 곳과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곳에 관한 생각들을 말해 주곤 한다.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밉지 않은 얼굴로 조금은 당차 보이는 행동들이 당신에겐 부럽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편의점에 오지 않아 당신은 걱정과 궁금함으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래서 조금 화가 나기도 했는데, 화가 난 자신이 또한 이해할 수 없어, 피식 웃기도 한다. 당신은 언젠가부터 다시 웃기 시작했다. 웃음은 과거가 아닌 현실에 근거한다.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는 저녁 여덟 시에 편의점을 방문한다. 당신은 그녀가 반가운 마음이었으나, 애써 숨기며 인사한다.
-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오지 않으셔서 조금 걱정했어요.
- 어제 회식 때문에... 사실 회식 마치고 잠시 들를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갔어요. 박경수씨가 나를 걱정해 줄까. 어떨까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홍소를 터트린다. 당신은 그런 그녀가 얄밉기도 하지만, 그녀를 따라 입을 가리고 웃으며, 가슴팍에 붙은 명찰을 매만진다.
- 주말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 같이 하실래요?
- 저와 말씀이세요? 왜...
- 밥을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녀는 당신에게 주말에 저녁을 함께 먹자는 제안을 했고, 당신은 조금 두렵기도 했으나 주말에 보자는 답을 한다. 생경한 설렘과 떨림으로 당신은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애써 잠든 꿈에서 연수를 다시 만난다. 꿈에서만 만나게 되는 그 사람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당신은 여느 때처럼, 많은 사람들을 나이프로 찔렀고 쓰러트렸으며, 마지막으로 그녀를 마주한다. 그녀의 냉소가 얼굴에 비추어지자, 당신은 주저하지 않고 연수를 찌른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당신의 어깨를 가까스로 붙잡은 그녀는 당신의 발 아래로 스르르 주저앉는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을 들으며 하얀 식탁보에 턱을 괴고 앉는다.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다 나직이 읊조린다.
- 햇살이 저렇게나 아름다운 걸, 왜 나는 몰랐을까.
당신은 잠에서 깨어 옅은 미소를 짓는다. 이후로 연수에 관한 꿈은 의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기억에서 사라진다. 당신의 몸엔 많든 적든 힘이 생겨난 듯했고, 서술어는 명확해져 갔으며, 행동에는 자존감이 묻은 절도가 설핏 비치곤 한다.
약속된 일요일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잊고 있었던 치통이 다시 느껴졌기에 달력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으로 글을 쓰는 일이 일상화된 당신은 노트를 펼치고 볼펜을 집어든다.
- 뿌리만 가까스로 남은 치아에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부서지고 깨진 것들에 더 이상 기대하거나 연연해할 필요가 있는가. 잔해를 뚫고 솟아나는 것은 결국 새순인 것이다. 그만하자. 나는 더 이상 남아있는 나날에 대해 낙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고민하던 당신은 예약한 치과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 안녕하세요. 다음 주 토요일에 진료 예약한 박경수라는 사람인데. 혹시 예약을 바꿀 수 있을까 해서요. 덧씌우기로 했었는데, 임플란트로 변경하려구요. 가능할까요?
- 잠시만요. 아. 선생님 나오시네요. 잠시 바꿔 드릴게요.
- 전화 바꿨습니다. 아... 네. 박경수님. 가능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셨어요?
- 버리지 못하면 바꿀 수도 없을 것 같아서요.
- ... 그렇게 하시죠. 비용이 좀 더 필요하고, 하시게 되면 이삼 주 정도 더 늦어지는데, 괜찮으시겠어요?
- 네. 괜찮습니다. 임플란트로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전화를 끊고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려다 말고, 식탁에 앉아 어머니가 차려둔 밥을 먹고서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출근 전에 우체국에 들러 공모전에 응모할 단편소설을 보내야만 한다. 당신은 계단을 내려가며 이어진 비탈길을 내려다본다. 어느새 얼어붙은 눈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봄의 기운이 곳곳에 스며든 듯 아스팔트 가장자리의 작은 틈을 따라 새싹은 솟아나고 있었다. 계단 끝에서 연수인지, 아니면 연수를 닮았을 뿐인지 알 수 없는 한 여성이 당신을 향해 올라오고 있음을 발견한다. 조금 두려운 마음이 일어서지만, 피하지 않고 계단을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는다. 아주 당당한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수긋한 어깨로 그녀를 지나쳤으며,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고서 버스정류장을 향한다. 누군가가 뿌려둔 살굿빛 연탄재가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지만, 여전히 다정하다 생각하면서. 오르막길이기도 하고, 때론 내리막길이기도 한 이 길을 그저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 여기면서.
그런 당신의 입술에는 더 이상 악물린 자국은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한 손에는 서류봉투가 꼭 쥐어져 있다. 그 안에는 어쩌면 희망이라 불러야 할 수도, 또 어쩌면 의지라 불러야 할지도 모를 당신만의 소설이 가지런히 담겨 있다.
(임플란트 완결)
덧. 맡은 일을 쳐내지만, 쌓여만 가는 일에 지치는 일상이지만, 쉴 때마다 소설을 퇴고할 수 있는 순간이 있어 고맙기도 합니다. 이 시간이 부디 의미가 있기를 바라봅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