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서로를 할퀴고, 싸우는 방법조차도 몰랐기에서로에 대한 차가운 배려로 무덤 속의 까만 침묵을
선택했었지. 정말 무덤과도 같은 나날이었고, 참으로 버거웠었지. 당신은 괜찮았어?
미안해.아주 많이 말이야.
법원의 하얀색 내벽에 심플한 빨간 플라스틱 벤치에앉아 당신이 나에게 했던 말은 아마도 생이 점멸하는순간까지도 잊을 수 없을 거야. 당신은 말이야..음..우리처럼 행복하고, 평온하게 이혼하는 사람들은 없을거라 했었지. 그러고보니 그곳에 있던 부부들은 말없이 굳은 돌이 되어서로 떨어져 앉아 자기 앞에놓여있던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 빠르게 흘러가길 바라는듯 하였어. 우리는, 그래. 다정하게 붙어앉아 속살거리며, 서로에게 웃어주었지. 우리의 대화는기억이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지금 돌이켜보니그런 몽환적인 드라마는 아마도 당신과 나만이연출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누군가에겐 백색의 지옥같은 공간이었겠지만, 당신과 나에겐 복사꽃 만발한언덕에서 새롭게 시작될 서로의 삶을 나누는공간인듯 하였어. 사실 판사가 무엇을물어보았는지잘 떠오르지가 않아. 하지만 결혼식의 주례 앞에서 대답하듯, 당신과 내가 자신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던 잔상들은 나의 호주머니 속에서소중히 자리하고 있어.그건 아마도 우리 스스로를 향한다짐이었던 것 같았어. 아이들을 잘자라나게 할 것이고, 각자의 삶을잘 살아내겠다는 다짐말이야.하지만 그순간의 '네'라는 나의 대답은 단단하였지만,조금은 슬픔과 두려움이 섞인..뮈랄까. 생각해보니 잘익은 거름과도같았어. 이것저것 섞여 냄새는 고약한 듯 하였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내 삶에 건강한 살을 덧붙여 줄 것만 같은 것이었어. 당신과 나의 짧은 대답은 우리의 새로운 삶을 견디게 하고, 살아내게 할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당신의 용기에나는 항상 감탄해 왔던 것 같아.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아이들을 향한 나의 마음에 대한 단호한 신뢰. 항상 당신은 옳았어. 맞아. 인정할게. 당신은 선언과도 같았어.
법원을 나온 우리는 그리고뭘 했더라.아..맞아. 우리는 왈츠가 흘러나오는 근처까페에서솔티라떼를마시며, 구운빵 한조각을 나누어 먹었지. 짭쪼롬한 맛을 시작으로 달콤하게 끝을 맺어가는 맛. 그래. 당신과 나를 닮은 맛이었지.끝내 가닿게 될 달큰한 맛이었어.그때 흘러나오던 음악이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에서해변의 붉은 노을빛처럼 퍼져나가던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었어.우울과 슬픔이 짙게 배어있었지만,희망의 꼬리를 놓지않았던 사분의 삼박자의 멜로디는 살며시 다가와 우리의 손을 잡아주었어. 어쩌면 우리는서로에게 고독한자유를 허락한 것인지도 모르겠어.각자의 시간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곰팡이들을스스로가 치유할 시간이 필요하였고,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용기를 내었던거야.당신과 나는 서로를이해한다는 공허한 언어를 뱉어내기 보다는한줌의 고요한 침묵을 손에 꼭 쥐고는 운동장을나란히 걸으며, 서로가 넘어지거나,쓰러지지 않는지 지켜봐주면서, 몇년전,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였지. 당신과 나의 용기에, 그리고 아이들의 사랑과이해 속에서 우리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이제는 입안으로삼킬 수 있을 듯 해.
평온을 찾은 당신을.나도 이젠 따라가 보려 해.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용서하였기에 우리들의 머리위로 복사꽃이 소복히 내려앉았어.당신과 함께,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고 싶어서 무대를 만들어보았지. 검은 밤을 밀어내는 환한 달빛 아래에서 복숭아 나무들의 박수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쇼스타코비치'의 왈츠에 맞추어 발을 옮기는 우리를상상해봐. 때로는 따로, 때로는 같이사뿐사뿐옮겨가는발자국들은 어느새 사분의 삼박자 음표가 되어, 우리의 삶을 왈츠로 그려주리라 나는 믿어. 당신이 있기에 나는 확신할 수 있어. 친애하는 R.교집합인 목적을 가진,인생의 동지인, 당신에게 맑은 존경을 보내. 주말이다가오면 당신과 아이들을 볼 수 있어서 설레고 좋아.고마워. 아주 많이말이야. 그리고 다지켜내지 못 한 약속이라 미안해. 새로운 우리의 약속을 이 편지에 명징하게 담아내 보았어. 우리가춤을 추며, 운동장에서 얼마만큼 나아갔는지에 대하여 이젠 두려워하며 방황하지 않으려고 해.그건 아마도 우리의 아이들이, 그리고 당신과 나의 생이 소멸하는 그 순간에야 알 수 있을테니 말이야. 중요한 것은 당신과 내가 서로의 발을 밟지 않으려 존중하며, 지금도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일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