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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May 06. 2022

이혼. 따로, 또 같이의 언어.


밤 10시. 늦은 밤 퇴근을 하고서, 복숭아 나무 

세그루를 심었어. 복숭아 나무를 서재터에 심기 위해

달렸길은 달콤한 복숭아의 하고는 나의

입안으로 설레임과 함께 미끄러져 내렸지. 아직은

세살 밖에 되지 않은 나무들이었지만, 그들은

끝내 복사꽃을 품어 내었고, 그건 끈기있게 생을

유지하며, 잉태해 낸 미스틱한 아름다움이었어.

낮과 밤의 자리가 바뀌며, 빛과 어둠은 반복될 것이고, 

그 음율을 따라 분홍빛 복사꽃도 이곳에서 묵묵히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겠지. 앙증맞고 어여쁜

복사꽃이 속살거리는 소리를 떠올려봐. 어때?

너무나 사랑스럽지 않아? 복사꽃의 치명적인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의 꽃말은 어쩌면 당신과

나에게 가장 필요로 하였던 용서와 희망이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니? R. 당신과 나를 평온의 길로

손짓하여 주던 단어들, 그래서 그렇게나 처절하게

찾아다니며, 부여잡아야 했던 그 희소한 단어들.

이제는 용서와 희망이 당신과 나에게 고요히 내려앉아

옭아매던 가시덩쿨을 하나하나 헤쳐 나가며, 그곳에 

복사꽃을 피워 내었어. 횡포하였던 계절을 지나

우리는 소담한 복숭아 나무 언덕에 서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지. 분홍빛 복사꽃이 청아한 바람에

흩날리며, 우리의 머릿결을 훑으면서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고, 당신과 나의 시간도, 그렇게

다정하게 흘러가고 있었어. 당신과 나는 많은 시간을

잃은 듯 하였지만, 결국 우리는 부여된 사명에 한발

한발 가까워지고 있었지. 그래. 칠흑의 터널에서

이 된 빛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우린 하나의 눈으로

보고 있었고, 계속 걸을 수 있었어. 당신과의 인연을

닿게 해 준 우주의 호흡고맙게 생각 해.

그리고 R. 당신에게도. 아주 많이 말이야.


기억나? 당신과 나의 시선이 처음으로 한 곳을

향하였그날을 말이야. 맞아. 1999년의 어느

화사하였던, 완벽한 3월의 봄날이었지. 학교 연못의

표면을 따라 부서지는 햇살은 윤슬을 빚어 눈이 부신

황금빛을 선물해 주었고, 흩어져 내리는 벚꽃 비에

흠뻑 젖은 아름다운 소들이 캠퍼스를 채웠었지.

하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스냅 사진들이 연이어서 

느리게도 지나 가는 듯 하였고, 정작 색깔이 고갈된

흑백 사진들일 뿐이었지. 그날의 난, 그래. 눈꺼풀에

무거운 추를 올려두고, 사라져만 가는 찬란한 풍경들

조차도 아쉬울 것 없다는 듯, 그냥 터벅터벅 걷고만

었지. 나의 발이 나를 끌고갈 뿐이었어.

걷는 것 외에는 나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듯 말이야. 나는 마치 늦은 밤, 현관 입구에

세워진,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정색 우산 같았어.

가뭇없이 사라지것들 조차 날카로운 종이의

모서리가 되어 나의 살결을 베어내고 있는 잔인한

3월이었지. 해결하지 못한 것들의 꼬리는 길게도

늘어져 있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데도 나에게

다가와 자꾸만 문을 두드리는 것들로 나의 시야가 

흐려지기만 하던, 개와 늑대의 시절이었어.

사실 그 시절 당신이 나를 불렀을 때, 누군가가  

입구에서 얼쩡거리다 말아버린 듯 무심하게

다가왔었지. 당신이.. 그래. 저기요. 라며 나를

붙잡았었어. 하얀 도라지꽃을 닮은 앳된 여학생이

싱긋 웃고 있었어.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당신에게서, 시트러스 향이

흘러 나왔지. 사실 당신에게서 피어난 향기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큼한 내음이 나의

코 끝을 간지럽혔었어. 누군가가 마치 워터포그를

만들어 준 것처럼 말이야. 우산없이 벚꽃 비를 맞으며, 

당신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마침내 광활한

우주에티끌보다도 작은 우리가 서로에게 닿는

순간이어. 찰나의 진공 상태는 아마도 기적이라

불러야 옳을거야. 동아리 신입 회원을 모집하고 있던

당신은, 투명하였던 외모와 달리 진중한 어투를 가진

선배였어. 몇 문장이 오고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난 녹색빛 윤기가 흐르는 둥글고도 낮은 산을

보고 있었어. 당신에 대한 존경은 이때부터 시작해서

끊김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주면 고마울 것 같아.

잃고싶지 않은 R. 나의 선배.


우리의 심장이 서로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 건

아마도 내가 스산한 서울의 밤 아래에서 독서실에

다녀오던 날이었을거야. 당신이 보내준 회색빛

털장갑과 고슬고슬한 털실들로 덮여있는 머플러가

고시원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몰라. 존경하고, 좋아하던 선배였던

당신이 보내온 털 장갑과 목도리가 상자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지. 경련이 멈추지 않는 손가락과 떨리는

마음을 가다 다듬으며, 당신의 전화번호를 힘겹게 

꾹꾹 눌렀었어. 화기 너머에서는 가녀렸지만,

따듯한 당신의 목소리가 빛이 되어 달려왔었지. 

크리스마스 이브인데도 공부하고 있냐며, 건강

잘 챙기고, 나를 항상 응원한다고 하였어. 잔하게

번져가던 당신의 목소리는 파장을 따라 나의 귓가를

토닥였었고, 기습적인 당신의 마음은 날아올라

나의 심장에 날개를 달아 주었어. 불안과 외로움이

잠시나마 나를 놓아 주었기에 감정이 정제된

맑은 눈물이 투둑하며 떨어져 내렸지. 그래. 짜지않은

무색무취의 눈물들 말이야. 당신이 보고 싶었고, 

당신에게로 도망치고 싶었었지만, 이 시절의 터널을

온전히 뚫고 지나가, 그 끝에서 당당하게 당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였지. 텅빈 거리에 남겨져 있던

나의 가난하였던 2004년의 크리스마스는 250km의

거리를 날아온 풍요로운 당신의 눈빛으로 빛을 밝히고

있었어.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에서는 달큰한 향이

났었는데, 당신도 그랬었니? 그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결국 당신이 되었었고, 신림동 고시촌에도

몸서리치도록 시렸던 겨울은 그렇게 물러나 주었지.

나의 봄을 당신의 가냘픈 손짓으로 불러주었어.

가냘펐지만, 강건하고, 담대하였던 당신의 손은

이른 봄을 불러내기에 충분하였지. 지금도 당신의

손은 품위있고 멋있어. 아주 많이 말이야.


이혼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부부관계를

소멸시키고,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는 법적

행위라고 되어 있었어. 적절한 정의인 듯 해.

부모관계의 소멸은 있을 수도, 또 있어서도 안되는

절대적인 영역이니 말이야. 나는 오래전 그 시절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들이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르겠어.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들며, 침몰해가는

모습들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내 자신이 끔찍하다

생각하였어. 아마도 그건 내가 겪어내고, 견뎌내었

경험들이 빚어낸 썩어버린 빵과도 같았지. 내가 

두려웠던 것들. 이를테면, 알 수 없는 날선 감정들,

무참하게 흘러가는 시간들, 망망한 검은빛 바다와

같은 그런 거대한 것들. 안타깝게도 이러한 집합 속

점점 당신이 포함되어 었지. 가닿기도 전에 내가

먼저 허물어져버릴 것만 같은, 넘어 수도, 가닿을

수도 없는 거대한 산과 같은 당신이 그곳에 있었어.

슬프게도 유약하였던 나의 마음이, 단단하였던 당신의

마음이, 끝내 서로를 외면한 것인지도 모르겠어. 

우리는 서로를 할퀴고, 싸우는 방법조차도 몰랐기에 서로에 대한 차가운 배려로 무덤 속의 까만 침묵을

선택했었지. 정말 무덤과도 같은 나날이었고, 참으로 버거웠었지. 당신은 괜찮았어?

미안해. 아주 많이 말이야.


법원의 하얀색 내벽에 심플빨간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 당신이 나에게 했던 말은 아마도 생이 점멸하는 순간까지도 잊을 수 없을 거야. 당신은 말이야..음.. 우리처럼 행복하고, 평온하게 이혼하는 사람들은 없을 거라 했었지. 그러고보니 그곳에 있던 부부들은 말없이 굳은 돌이 되어 서로 떨어져 앉아 자기 앞에 놓여있던 견딜 수 없는 시간들빠르게 흘러가길 바라는 듯 하였어. 우리는, 그래. 다정하게 붙어앉아 속살거리며, 서로에게 웃어주었지. 우리의 대화는 기억이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런 몽환적인 드라마는 아마도 당신과 나만이 연출할 수 것인지도 모르겠어. 누군가에겐 백색의 지옥같은 공간이었겠지만, 당신과 나에겐 복사꽃 만발한 언덕에서 새롭게 시작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공간인 하였어. 사실 판사가 무엇을 물어보았는지 떠오르지가 않아. 하지만 결혼식의 주례 앞에서 대답하듯, 당신과 내가 자신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던 잔상들은 나의 호주머니 속에서 소중히 자리하고 있어. 그건 아마도 우리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었던 것 같았어. 아이들을 잘 자라나게 것이고, 각자의 삶을 살아내겠다는 다짐 말이야. 하지만  순간의 '네'라는 나의 대답은 단단하였지만, 조금은 슬픔과 두려움이 섞인..뮈랄까. 생각해보니  익은 거름과도 같았어. 이것저것 섞여 냄새는 고약한 듯 하였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내 삶에 건강한 살을 덧붙여 줄 것만 같은 것이었어. 당신과 나의 짧은 대답은 우리의 새로운 을 견디게 하고, 살아내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당신의 용기에 나는 항상 감탄해 왔던 것 같아.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아이들을 향한 나의 마음에 대한 단호한 신뢰. 항상 당신은 옳았어. 맞아. 인정할게. 당신은 선언과도 같았어.

법원을 나온 우리는 그리고 뭘 했더라.아..맞아. 우리는 왈츠가 흘러나오는 근처 까페에서 솔티라떼를 마시며, 구운빵 한조각을 나누어 먹었지. 짭쪼롬한 맛을 시작으로 콤하게 끝을 맺어가는 맛. 그래. 당신과 나를 닮은 맛이었지. 끝내 가닿게 될 달큰한 맛이었어. 그때 흘러나오던 음악이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에서 해변의 붉은 노을빛처럼 퍼져나가던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었어. 우울과 슬픔이 짙게 배어있었지만, 희망의 꼬리를 놓지않았던 사분의 삼박자의 멜로디는 살며시 다가와 우리의 손을 잡아주었어.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고독한 자유를 허락한 것인지도 모르겠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곰팡이들을 스스로가 치유할 시간이 필요하였고,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용기를 내었던거야. 신과 나는 서로를 이해한다는 공허한 언어를 뱉어내기 보다는 한줌의 고요한 침묵을 손에 쥐고는 운동장을 나란히 걸으며, 서로가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는지 지켜봐주면서, 몇  ,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였지. 당신과 나의 용기에, 그리고 아이들의 사랑과 이해 속에서 우리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이제는 입안으로 삼킬 수 있을 듯 해.

평온을 찾은 당신을. 나도 이젠 따라가 보려 해.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용서하였기에 우리들의 머리 위로 복사꽃이 소복히 내려 앉았어. 당신과 함께,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고 싶어서 무대를 만들어 보았지. 검은 밤을 어내는 환한 달빛 아래에서 복숭아 나무들의 박수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쇼스타코비치'왈츠에 맞추어 발을 옮기는 우리를 상상해봐. 때로는 따로, 때로는 같이 사뿐사뿐 옮겨가 발자국들은 어느새 사분의 삼박자 음표가 되어, 우리의 삶을 왈츠로 그려주리라 나는 믿어. 당신이 있기에 나는 확신할 수 있어. 친애하는 R. 교집합인 목적을 가진, 인생의 동지인, 당신에게 맑은 존경을 보내. 주말이 다가오면  당신과 아이들을 볼 수 있어서 설레고 좋아. 고마워. 아주 많이 말이야. 그리고 다지켜내지 못 한 약속이라 미안해. 새로운 우리의 약속을 이 편지에 명징하게 담아내 보았어. 우리가 춤을 추며, 운동장에서 얼마만큼 나아갔는지에 대하여 이젠 두려워하며 방황하지 않으려고 해. 그건 아마도 우리의 아이들이, 그리고 당신과 나의 생이 소멸하는 순간에야 알 수 있을테니 말이야. 중요한 것은 당신과 내가 서로의 발을 밟지 않으려 존중하며, 지금도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일거야.

당신과 나는 지금껏 잘해왔고, 우리는 앞으로도  할 수 있을거야. 걱정마.

당신과 나는 그 무거운 이름만큼이나, 행복하여만 하는 부모이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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