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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Feb 09. 2020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당신에게서 내가 얻어버린 것




Stacey Kent - You Are There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가을이었다. 내가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모습일 때 나는 세상 어딘가에서 나와 닮은 사람을 찾고 싶었다. 느리고, 서툴지만,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 하는 그런 부족한 사람. 그날 저녁 서걱서걱 종이를 자르고 펀치로 옆구리에 구멍을 낸 뒤 뜨개질 실로 엮어 롤링레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랍 끝에 있던 크레파스를 꺼내 맨 앞에 '아날로그 롤링 레터'라고 적었다. 



  어디에서 그런 사람을 찾을까 고민하다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분명 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내가 딱 찾고 싶어 하는 그런 부족한 사람이겠다 싶었다. 며칠 뒤 몇 통의 메일이 와 있었고- 병적 증세로 나는 그들을 단숨에 영원의 친구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함께할 롤링레터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편지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날 설레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도 저와 같이 해주시겠어요?"라고 물었고, 그들은 "re:그렇다니까요?"라고 답했다(그들 중에는 내가 귀하게 캐스팅한 작가님도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 부족한 사람들끼리 영원의 편지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날로그롤링레터'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주기로 보내졌고 나부터 시작해 우편이나 택배를 통해 다음 분께 보내져 전국을(심지어 제주도까지) 돌고 돌아 다시 내게 왔다. 사람들은 겉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속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앞 친구의 고민에 모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조언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간이 모자라면 종이를 이어 붙여 따듯함을 따듯함으로 덮어주었다.

  한 계절이 지날 즈음 우편함을 드나들며 발을 동동 굴리는 일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아 '사라져버린 걸까...'하고 아쉬운 마음을 가지면, 떠날 때와 달리 몰라보게 두툼해진 롤링레터가 방긋- 웃으며 도착해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면, 그 순간 내 작은 방에 함께한 친구들이 가득 들어찼다. 그날은 밤새도록 울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하루라도 빨리 친구들이 편지의 모든 이야기를 읽고 위로와 사랑을 느끼길 바라, 다음날 나는 얼른 새 롤링레터를 만들어 지난 롤링레터와 함께 떠나보냈다. 



    난 항상 사람들에게 당부를 하곤 했다. "아날로그이다 보니 받는 속도도 느리고, 중간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거예요. 만약 사라지더라도 우리, 아쉬워 말자고요. 그게 아날로그의 매력(?)이기도 하고.. 중요한 건 우리 마음이잖아요?"하고. 그 말이 씨가 됐던 걸까? 그 해 겨울, 우린 모두 각자의 장소에서 매일 우편함을 들여다봤지만 아무도 아날로그롤링레터를 받지 못했다.

  


  예상했던 상황이었지만 가장 약해진건 나였다. 그리고 한동안 롤링레터를 만들지 못하고 망설이는 내게- '우리 다시, 마음을 나누자고' 용기를 불어넣어준 건 그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용기를 모아 다시 아날로그롤링레터를 시작했고, 이렇게 브런치에 매거진까지 만들었다. 앞으로 이 공간에 함께 편지로 나누는 시시콜콜한 삶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안에 담긴 희망들을 또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다.




  당신은 어쩌면 나를 낭만적인 망상 속에 사는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편지 조각일 뿐이라고, 그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행운스럽게도 이 낭만적인 망상 속에 빠져버렸으니 영원히 깨어 나지 않길 바란다고, 세상 어느 곳보다 따듯한 편지 조각 안에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우리를 위해 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왠지 그게,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일일 것 같아서다.


긴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올봄의 아날로그롤링레터





2020. 02. 09

따듯한 봄을 기다리며 

사랑을 담아,

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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