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울 때마다 생각해. 그 다큐멘터리에서 한 노인이 시청자들에게 읊조렸던 말.
"잊지 마.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너와 편지를 주고받지 않은 동안 나는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았던 것 같아. 맨몸으로 노트르담도 가고 히말라야도 가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토마토 축제도 갔었지. 두려워해야 할 거야. 거기서 나는 너만큼 아주 멋진 사람들을 만났거든. 하마터면 내가 유령인 걸 잊어버릴 뻔했어. 하지만 검은 밤이 되어 촛불 앞에 앉으면 주술처럼 너와 나눴던 편지들이 떠오르는 거야.
너는 내가 없이도 잘 지내지. 참 유감스러운 일이야. 나처럼 유령이 되어 시베리아 열차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공허한 눈밭을 바라보거나 몽골 사막에서 수많은 별빛 냉기 아래 벌벌 떨고 있어야 하는데. 너는 내가 없이도 잘 지내고 있어. 하지만 서랍 깊숙이 넣어둔 파랑새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못하지. 그들에겐 생명이 있으니까. 우리의 추억엔 봄의 낯섦과 여름의 유혹과 가을의 서툼과 겨울의 뜨거움이 있으니까.
지구불시착에서 알게 된 이랑 노래를 하루 종일 듣다가 친구의 부친 상 소식을 연달아 들었어. 지선이 아버지는 말기암으로 현종이의 아버지는 또 어떤 암이신지 내일 가봐야 알겠지. 63세. 이젠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야. 아버지. 아버지.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던 죽음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아뿔싸, 내가 시력이 안 좋아졌던 거구나.
얼마 전 통신사 요금제를 바꾸고 받은 2만 원 쿠폰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것, 같이 사는 남자가 내가 먹고 싶은 굴을 장바구니에서 빼버리려고 했던 것,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이용당했다는 것- 그런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아는데.. 그런데 왜 나는 오늘도 할리갈리 벨에 집중하며 앞에 앉은 사람에게 안겨 온기를 받고 싶어 하는 건지. 살아있다는 건 왜 어쩔 수 없이 많은 갈등 속에 피를 데우는 건지.
그래. 우리의 편지는 예쁜 너의 얼굴만큼 사랑스럽지 않았지. 러브레터라고 하기엔 입술이 씰룩거리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네가 병원 앞에서 어머니의 수술을 기다릴 때, 과거의 아픈 추억을 곱씹을 때, 외면하던 이성들을 뒤로 할 때 그곳에 파랑새가 갔다는 거. 당신의 벗 당신의 벗 거리면서 네 곁에 있겠다고 맹세했다는 거. 파랑새에겐 편지지를 찢고 너를 볼 대담함이 있다는 거.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이 정도면 나는 너를 그리워할 자격이 있는 거겠지. 우리의 수많은 밤들을.
그리워 네가 무척. 다시 나를 너의 색으로 채울 수 있을까. 다시 너에게 편지할 수 있을까.
2023年 12月 11日
당신의 벗, 강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