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춤 못합, 아니 안 합니다
'사람들은 장기자랑에 왜 저렇게 안달을 할까?'
내향적인 여중생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부분에서 무척 짜증이 나 있었죠.
사람이 다섯 정도 모이면 처음 만나거나/ 오랜만에 만나거나/ 만났는데 심심하거나 어김없이 자기소개와 장기자랑 타임이 시작됐습니다. 장기자랑의 종류는 크게 춤, 노래, 성대모사 정도였고 간혹 악기 연주라든지 시 낭송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춤과 노래를 할 땐 반주 같은 건 없어서 박수 소리에 의지해 춤을 추거나 노래하는 형태였죠.
저는 어릴 때부터 춤과 노래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많이 시도하지도 않았고, 잘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참 장기자랑 타임이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대모사나 악기 연주, 시 낭송은 잘하느냐?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청중 앞에서 퍼포먼스로 자랑할 것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내향적인 열다섯의 저는 장기자랑 타임마다 초조했습니다. 이제 곧 제가 무대에 오를 차례인데 앞선 친구들처럼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럴 땐 역시 막춤입니다!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몸을 아무렇게나 흔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환호성을 들을 것이라고요!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얗고 마르고 흐느적거리는 몸과 붉어진 얼굴에 둥글고 무거운 안경을 올리고 진행자에게 '저는 춤을 추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신나는 댄스곡이 흘러나왔죠. 그리고.... 제 몸은 얼어붙었습니다. 분명 흔들려야 하는데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때 무대 아래 어디선가 한 친구가 제 앞으로 뛰어 올라와 벽을 잡습니다. 친구가 일명 섹시댄스라는 동작을 반복하니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옵니다. 저는 한쪽으로 밀려났고 어떤 표정, 어떤 자세를 하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아무도 제 옆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건 기억납니다.
가족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희 가족은 특이? 하게도 명절마다 아이들의 장기자랑 타임을 가졌습니다. 아주 어릴 땐 친척 언니를 주축으로 아이들이 모여서 어른들 앞에서 선보일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심지어 성냥팔이 소녀 같은 연극도 했습니다. 언니들은 용돈이 목적이었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것들이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좀 애매한 나이가 되어서부터입니다.
명절 장기자랑 맛에 들리신 어른들은, 저희가 사춘기를 맞은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어도 장기자랑을 요청하셨습니다. 가족은 편안했지만 결코 장기자랑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한 언니는 단소를 꺼내와 부르고, 다른 언니는 춤 솜씨를 발휘합니다. 그다음은 전데, 과연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단소를 불어보겠다고 휙휙 애를 쓰다가 얼굴만 벌게집니다. 그다음 시도는 사람들이 추천한 산토끼 노래입니다. 이건 노래도 아니고, 그냥 불쌍하니까 얼른 들어가라 식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때 또한 제가 어떤 표정, 어떤 자세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족들이 해산되자 엄마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본 건 기억납니다.
그러니까 수차례 장기자랑 타임의 시도 끝에 제가 얻은 결론은 '나는 장기자랑할 것도 없는 재주 없는 사람, 매력 없는 사람, 용감하지 못한 실패자, 결국 크게 되지 못할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자라왔습니다. 오해 속에서.
30대 중반을 넘긴 지금은 어떠냐, 여전히 장기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퍼포먼스 적으로 특출 나게 남들보다 잘해서 환호성을 일으킬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 여전히 재주 없고, 매력 없고, 용기 없고, 크게 되지도 못할 사람이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재주 있고, 매력 있고, 용기 있고, 크게 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다만 '많은 청중 앞에서 장기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일뿐입니다. 계획된 강연이나, 소수의 인원과 함께 일 때 다양한 재주를 부립니다. 그럴 땐 충분히 매력 있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외향적이어서 어디서든 튀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내향적이어서 조용히 스며드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다를 뿐, 누가 더 매력 있다거나 더 좋은 사람이라거나 더 성공할 사람이 아닙니다.
트럼프처럼 큰 목소리로 대중 앞에 나와 연설하지 않더라도, 마더 테레사처럼 조용히 삶을 빛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이제는 누가 장기자랑 타임을 갖자고 하면 저는 딱 잘라 말합니다.
"앗 되게 불편하네요 안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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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작
제 글에 귀한 시선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위로와 용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