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크리스마스와 집

by 고똘

이 즈음 한국에 있었다면, 술독에 빠져살았을 것입니다. 10월부터 꽉 잡힌 송년회에 점심 저녁으로 혈중 알코올 농도가 떨어질 날이 없었을거에요. 귀가 시간은 늦어졌을 것이고, 가자마자 잠에 들고 일어나서 약간의 숙취에 시달리며 오전 시간을 보내다보면 또 송년회 타임을 맞이하며 12월이 순삭됐을겁니다.

IMG_2278.jpg 최근 레어하지만 베이에서 있었던 송년회. 취했나요? 예

미국에선 다행히 제정신으로 막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곳도 12월에 진심인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간 경험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12월 중순부터는 거의 모든 회사와 도시가 느려집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에는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요. 일 때문에 다른 도시로 나왔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회사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냅니다. 트리를 만들고, 양말을 벽난로에 걸고, 가족들과 음식을 만들어 먹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각개전투가 아닌 가족과 함께.

IMG_6680.jpg 크리스마스 당일 텅 빈 LA의 거리..
IMG_2383.jpg 한 베이 가정집. 강아지 고양이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이 달린 양말이 따로 걸려있다.

연휴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집이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집 꾸미기에 유독 정말 정말 진심입니다. 집은 그 자체로 그 동네의 ‘트리’가 됩니다. 한국에서는 백화점들이 매년 열심히 하는 일이지요. 집집마다 앞마당엔 산타 루돌프와 같은 조형물이 늘어서있고, 창문과 지붕과 벽엔 낮처럼 환한 조명이 켜집니다.

output_2762485037.jpg 올해도 한국 백화점들은 예뻤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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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세 다운타운 한 광장의 크리스마스 장식. 시에서 한건지 기관이 한건진 몰라도 한국 공공장소 장식들에 비하면 아주 조악하다



최근 사촌오빠네를 따라 미 팔로알토의 한 거리에 다녀왔어요. “핫초코 들고 크리스마스 조명 보러가자” 하기에 공원이나 광장 같은 관광지에 가겠거니 생각했는데요. 도착한 곳은 한 주택가. 두 블럭정도 되는 거리 양 옆으로 늘어선 집들은 저마다 개성있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있었습니다. 단 한 집도 빠짐없이 화려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단합이 잘 되는걸까, 누가누가 잘하나 이게 바로 경쟁적인 실리콘밸리의 피어프레셔인가 생각하며 동네 주민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렇게 알게된 사실! 이 지역의 부동산 계약서에는 “크리스마스 장식 필수” 조항이 붙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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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집에 진심인가. 가장 큰 연휴니까, 연휴 때만 그렇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할로윈과 같은 다른 이벤트에도 진심으로 집을 꾸미는 열정을 보면, 집의 의미는 한국과는 다르고 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성스럽고 따듯하게 꾸며진 집이 ‘가족’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매년 또 집집마다 다르게 꾸며진 주택들을 보면 개성이 많이 투영되는 곳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명절과 비교해보면 이곳에서 생각하는 집의 의미의 차이를 더 잘 알 수 있어요. 크리스마스는 엄밀히 남의 나라 명절니니, 우리의 반박불가 가장 큰 명절인 설과 추석 시즌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집을 꾸미지않습니다. 그보다는 밥상. 누가누가 송편을 잘 빚나, 지역별 떡국엔 어떤 고명이 어떤 육수가 들어가나가 더 중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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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구태여 강조하고싶지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낫다는 말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처럼 저런 집을 가지는 것은 특권입니다. 또 다름은 땅덩이와 사람과 문화와 역사가 반영된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하지만 가장 가족적인 달을 미국에서 맞으니, 집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자연스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올해 생에 처음으로 타지에서 1인가구가 된 덕(?)도, 한국에서 집값이 유독 난리인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싶어요. 비싼 장식은 못해도 크리스마스에 가족이 모이는. ‘자가냐 전세냐’ ‘매매 시점이 10.15대책 전이냐 후냐’보다 어떻게 꾸밀지, 누구를 초대해서 어떻게 놀지가 더 중요한. 가족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는 집, 집주인의 재산 상황보단 취향을 먼저 알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텄으니, 내년 크리스마스엔 비록 잠시 빌려사는 집이지만 나도 예쁜 트리도 놓고 셀프 선물도 준비해볼까 싶습니다. 기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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