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의 중요한 인프라

by 고똘


한 해를 거의 마무리하며.


해외살이의 장단점은 명확합니다. (회사와) 멀리 떨어져있는 점은 좋고, (가족 친구들과) 멀리 떨어진 점은 싫습니다. (새로움이) 엄청 좋다가, (익숙하지 않음에) 한없이 다운되는 날도 있습니다. 핵심은 항상성 유지가 집에서보다 어렵다는 점입니다.



항상성에는 서포팅시스템이 중요합니다.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며 가장 겁이 나는 것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와 내 상황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없는데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새 관계를 만들기는 커녕 한국에서의 견고했던 관계들도 잃을 것만 같고, 이것이 내가 질 막대한 기회비용처럼 느껴져 안달이 났습니다. 마치 어디 화성으로라도 평생 떠나는 사람처럼.



우려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꽤 잘 놀고 생산적인 고민을 하며 즐거울 수 있는 것은, 또 새로운 관계를 맺고 낯선 곳에 마음 부칠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단단한 인프라, 서포터즈들 덕입니다.



IMG_8029.jpg

K가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LA에 있는 것은 정말 큰 행운입니다. 베이에 왔을 비슷한 시점에 그녀가 뉴욕에서 LA로 온다고 했을 때 "하늘이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했어요. 미국 생활 대부분의 꿀팁과 해외 자취생활 노화우를 그녀로부터 배웠습니다. 미국 고속도로에서 엑싯을 지나치지 않는 방법, 김밥을 싸는 방법, 가성비 집요리는? 라떼에 어울리는 우유는?. 답없는 괴로움과 징징임에도 늘 공학자적 사고로 해결책과 실질적 실행방법을 줍니다. '미개국'인지라, 자꾸만 수다 떠는 중에 통신이 끊기는데, 여러번 다시 통화와 보이스톡을 반복하며 나눴던 대화들은 오래 오래 자산이 될 거야.


IMG_9385.jpg

J는 대나무숲입니다. 챗GPT보다 공격적으로 일상과 생각을 나누는 느낌. 나도 모를 내 마음을 자주 그녀에게 해석 외주 맡깁니다. 나 왜그런것 같애? 사실 나는 나를 속이고 있을까? 언제쯤 괜찮아질까?같은 질문을 쏟아놓으면 그녀는 빙의를 해서 답을 주는데, 대체로 맞습니다. 자꾸 너 자신을 못믿겠으면, 자기를 한번 믿으라고.

P는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20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인데, 진짜 진짜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녀의 마법이 필요해요. 그녀의 몇 마디 후 울음을 그치게 된 경험이 있음. 멍청해보일까봐 밖에다가 하지 못하는 질문들, 업계의 찐 이야기 같은 것들도 개발자인 그녀에게 조언을 많이 구합니다. 비슷한 정도의 호기심과 상식을 가졌기에,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P와 가장 많이 나누는듯.

농담과 고성방가가 필요한 순간엔 출근하는 S와 통화하면 됩니다. 아마 그의 테슬라 블랙박스에 나의 노래와 험담과 안웃긴 개그들이 엄청 녹음돼 있을듯.

마지막으로 제일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집 강아지 쿠키 사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하다가, 고민하다가 지치는 순간에 가족단톡방에 들어가 오늘자 쿠키를 봅니다. 엄마가 쿠키 옷을 엄청 사들이는 덕에 OOTD를 보는 재미도 쏠쏠.

그러면 비로소 5개 인피니티 스톤을 모두 채운 타노스의 장갑을 갖게 됩니다. 뭐든 할 수 있고,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을 수 있는.

IMG_2243.jpg
IMG_2292.jpg
엄마랑 노후연금 공부하는 쿠키와 아마도 언니를 기대리는 공원에서의 쿠



2025년의 내가 있는 실리콘밸리는 인프라 투자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인프라가 없으면 절대 AI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업들은 수천억달러를 쏟아부어 AI데이터센터 투자 계획을 내놨고, 클라우드 기업들은 승승장구 했어요. 인프라의 인프라인 전력망과 에너지에 대한 투자도 이어졌지요. 아마 이런 흐름은 내년에도 계속될 겁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싶습니다. 그리고 내년엔 나도, 그들에게 수천억달러짜리 견고한 축이 돼 줄 수 있길.




keyword
이전 10화[10] 시도만으로 참 잘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