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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미국인이 2등신 사진을 찍어주는 이유

by 고똘

한국에서 15년 지기 친구 세 명이 실리콘밸리에 놀러왔습니다. 서른이 넘어서 친구 넷이 모여 미국 여행을 하는 경험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였으니 예쁜 사진 남길 곳을 찾아 스탠퍼드 대학교에 가게 됐어요. 당연히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삼각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삼각대를 세팅해놓고 타이머를 맞추고 뛰어가서 사진을 찍는 그 과정이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그래도 실패 확률이 낮습니다. 우리 모두 알잖아요?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찍사'를 부탁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삼각대를 들고 스팟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저희가 꽤나 관광객같았던 모양입니다. 국적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시아인은 아닌 서구권의 여성 두 분이 저희 일행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습니다. K사진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하고 한국인의 감성대로 수평 딱딱 가장 아랫쪽에 발 끝을 위치시킨 10등신 비율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음대로 골라 쓰시라고 순식간에 한 20장쯤. 100%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섰는데, 한 친구가 말했어요. "'서양인 스타일'로 찍었지? 난 네가 여기 사니까 우리 중에 제일 서양식으로 잘 찍을거 같아서 너한테 맡겼는데"

삼각대 없는줄 알고 사오라고 했는데 대청소하다가 이렇게나 발견했다ㅎㅎ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구요. 저들이 찍어준 사진이 한국인인 제 성에 도통 안드는것처럼, K사진 스타일은 그들의 눈에는 정말 못찍은 사진일 수도 있습니다. 여행 중에 몇 차례 먼저 사진찍어주겠다는 현지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맡겼는데, 단 한 컷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우리끼리 2등신처럼 나왔다고, 수평마저 맞지 않는다고 웃고 넘겼지요. 혹시 나 역시도 그런 사진을 남겨준 것은 아닌가, 우울해졌습니다.


그러고보니 친구의 핀잔(?)을 듣기 전까지 서로 원하는 사진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인이 미감이 좋고, 센스도 좋으니 한국인이 찍은 사진이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봐도 좋은 사진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토니라는 분이 찍어주신 사진.

그 뒤로 현지인들이 찍어준 우리 사진을 곰곰히 뜯어봤습니다. 짧고 못생기게만 나온줄 알았던 사진들에는 나름의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정 가운데에 사람이 들어가는 점. 주변 분위기와 사람간 조화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은 사람자체가 중앙에 나온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공간 속에 녹아드는 사진을 추구하는듯합니다. 그렇기에 무심하게 흔들리거나, 사람이 옆으로 심하게 쏠려 심지어 잘린 사진도 인스타에 걸리지요. 하지만 그들이 찍어준 사진을 보니 거의 가로 3 세로 3, 9개 격자 정 가운데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찍사'의 시선에서 사진찍기. 가끔은 심지어 엎드려서 최대한 길고 비율좋게 찍는 한국인과 달리 서양인들은 보통은 자기의 눈높이에서 피사체를 찍습니다. 얼굴이 좀 크고, 다리가 짧게 나오더라도 얼굴 그 자체가 더 잘 보이고 선명하게요. 하긴 비율에 결핍이 없는게지요�


'좋은 사진'의 개념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의 상식대로,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사진을 찍어줬어야 했는데 그간 못그랬어요


격자 정 중앙에 얼굴을 위치시킨 미국인 찍사의 사진. 비록 바닥 수평은 다 안맞고 우리는 4등신으로 나왔지만

미국에서 이처럼 내가 가진 '상식'이 깨지는 경험들을 많이 합니다. 식상하지만 팁 문화가 가장 대표적. 미국에서는 식사를 하는 중간 중간 직원이 손님을 찾아가 "음식 다 괜찮니?"라고 물어주고, 그렇게 챙겨준 보답으로 팁을 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음식과 서비스에 어느정도까지 솔직해져야 하는지 알 길이 없는 외국인노동자는 맛이 있으나 없으나 '굿' 또는 '어썸'이라고 외쳐준 뒤 20%의 팁을 지불합니다.

카운터가서 계산하고, 음식을 받아와서 먹었습니다. 몇%의 팁이 적당할까.

식당 내 테이블에서 앉아서 주문 받고 음식을 서빙해주는 식당에선 20%의 팁이 적절하다고 합시다, 카운터에서 결제하고 음식은 가져다주는 식당에선 팁을 얼마를 줘야 상식적일까요. 음식을 테이크아웃할때는? 카페에서는? 미국인인 사촌오빠네 부부에게 상식을 물으니 테이크아웃과 카페는 팁을 안줘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한식당에가 김치 등 각종 반찬이 별개의 작은 통에 개별포장돼있는 테이크아웃 박스를 받아들면 포장에 들어간 서비스 비용이 음식 서빙 비용보다 비쌀것 같다는 생각도 들며 마음이 찝찝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진 꿈에도 모르고..

이곳에서의 일상이 도전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도 다른 상식 때문입니다. 큰 레슨런이 있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때는 지난 6월, 미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 됐던 때입니다. 당시 저희 집에 머물던 또다른 친구들과 SF자이언츠 야구를 보겠다고 샌프란시스코에 놀러갔어요. 야구경기가 있는 주말 극악 주차난인줄 모르고 호기롭게 경기장 근처까지 차를 끌고 갔다가 애를 먹었습니다. 겨우겨우 발렛 가라지 주차장을 찾아 키 꾸러미를 직원에게 맡겼더니 "야구 경기 종료 뒤 1시간까지 차를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경기를 보다 중간에 탈주해 종료 시간을 모르는 우린 적당히 놀다가 주차장에 갔어요. 그런데 세상에 셔터가 내려가 있었습니다. 구글맵의 번호로 전화했더니 AI가 받고, 차는 찾을 방법이 없고, 맡긴 열쇠 꾸러미에 집키도 있어 집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혹시 우리 범죄율이 높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도난을 당한게 아닐까, 경찰에도 전화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희가 늦었잖아". 맞아요. 나중에 찾아보니 경기 종료 후 1시간 20분쯤 뒤 저희가 가라지에 갔더라고요.


몰랐어요. 한국에선 대부분 주차장이 늦게까지 하니까. '영업시간은 경기 종료 후 1시간까지'라는 답변도 별생각없이 듣고 넘겼어요. 늦어봤자 추가 요금이나 받겠지. 뉴비고, 이 동네 상식에 익숙치않으면, 귀담아 듣고 하라는대로 했어야 했는데, 안일했습니다.

결국 저희는 마트에서 렌즈액, 폼클랜징 등 서바이벌키트를 사서 주변 호텔 신세를 지게됐습니다. 도난범죄는 개뿔, 다음날 아침 24시간어치 주차비를 내고 핀잔을 들으며 차를 찾았어요. 두 친구 중 한명은 제 집을 떠나며 "한국에서 통하던 MAKE SENSE가 여기선 안통할 수 있으니 다 의심하고 체크하라"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진짜 호텔 신세를 졌고 다음날 활짝 열려있는 가라지를 보고 헛웃음이 났다.

같은 논리로 한국에서의 삶이 편한 이유는 단순히 한국어 실력이 유창해서가 아닙니다. 한국의 상식과 나의 상식의 교집합이 크기 때문입니다. 30년간 살며, 지난 7년간은 심지어 사회 생활이란 것을 하며 체화한 한국의 '사회 언어' 능력은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보다도 레벨이 높으니까요.


화장실이 급할 때 "이 정도 규모 카페 안엔 화장실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찾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느정도 규모의 교통사고에 경찰을 부르는지 예측가능합니다. 친구 결혼식의 요일과 시간, 장소를 보고 몇시쯤 출발하면 신부대기실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챗GPT보다 잘 계산할 수 있으며, W컨셉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도 29일엔 29cm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상식적이니 어떻게 상황이 흘러갈 것이란 예측이 가능해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한국의 사진 상식(왼쪽 사진)과 미의 사진 상식 복습


상식의 다름을 논하면서 미국과 한국을 비교할 필요끼지도 없습니다. 매일 매일 서로의 상식이 부딪히는 일들을 너무 많이 경험하니까.

하지만 상식이 깨어지는 경험은 좌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제 나름의 상식과 로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만 한다면 얻어가는게 많아요.

음. 우선 고마움이 생깁니다. 2등신의 사진을 보면서도 역시 그들은 내 사진을 잘 찍어주고 싶었구나!하는. 또 겸손함도 키울 수 있어요. 역시 차를 못찾은 건 늦고 게을렀던 내 잘못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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