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醬)이 익어가는 다각적 추론의 집
건축가 함성호의 『철학으로 읽는 옛집』 마지막 장에 당당히 명재 윤증고택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명재고택의 모습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따로 담장을 두지 않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모습은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불리던 우암 송시열에 탈(脫)주자학적 가풍으로 맞섰던 집주인의 넉넉한 풍모를 빼닮았다.
명재고택을 찾았던 날은 마치 봄날 같았다. 계절은 아직 겨울의 끝자락에 있었지만 한낮 햇볕의 따뜻했던 기운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듯하다. 홀로 걷고 있어도 누군가가 옆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따스한 햇살을 받아 온기가 감도는 마루에 앉아 오래된 나무의 감촉을 손으로 매만지며 따뜻함을 만끽하던 찰나의 행복이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명재고택을 떠올리면 따뜻한 봄의 느낌이 감싼다.
켜켜이 세월이 쌓인 오래된 집을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다. 사랑채 앞에는 병풍처럼 소나무를 심었다. 동쪽 언덕에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고택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집 앞 연못 둥근 동산에는 배롱나무 한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고, 뒷산의 구부러진 노송은 집을 향해 가지를 펼치고 있다. 자연과 어울려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편안한 풍경이다.
“독락당은 화려하고, 도산서당은 고졸하다. 암서재는 결기가 흐르고, 산천재는 결기에 차 있으면서도 소박하다. 그러나 가장 편안한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명재고택을 꼽을 것이다.” 건축가 함성호의 이야기다. 명재고택의 구석구석을 느린 걸음으로 살펴보고 나면 쓸데없이 권위적이지 않고, 풍수를 따르되 지나침이 없다는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래되고 말 없는 것들이 사람에게 건네는 그 따뜻함은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마음을 표현하려 있는 말 없는 말 다 끄집어내 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그들은 또 그렇게 말없이 타이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말 없이도 얘기할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려면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며 마음공부가 필요할까.
함성호는 명재 윤증고택을 다각적 추론(推論)의 집이라 설명했다. 다분히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사유가 담겨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노론(老論)의 거두 우암 송시열에 맞서 소론(少論)의 젊은 영수 역할을 맡아야 했던 윤증의 운명과 연관 지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름으로 성리학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허용치 않았던 편협함과 그것을 거스를 경우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던 시대의 잔인함을 다시금 끄집어내야 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 어떤 말로 변명한다 하더라도 분명 노론 300년은 정치적, 학문적으로 조선시대 후반을 암흑기로 내몰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생각이 다르면 쓰지 않으면 그뿐이지, 어찌 조정에서 사람을 죽이는가?” 평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다 겨우 몇 년의 짧은 벼슬살이 끝에 윤휴가 사약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암에게서 듣고 싶다. 윤증 역시 윤휴의 죽음을 보며 스승 송시열의 주자학적 종본주의(宗本主義)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고 새로운 사상을 꽃피울 수 있는 세상을 염원했을 것이다.
명재 윤증의 삶이 그러했듯 그가 잠시 거처했던 공간 역시 주인을 닮았다. 담장을 두르지 않아 경계가 없다. 덕분에 명재고택의 공간은 자연스레 외연(外延)이 확장된다.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으면 집 앞의 연지 너머 넓은 들에까지 펼쳐진 풍경이 시원스럽다.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집주인의 마음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권위의 상징인 솟을대문도 없다. 사대부집은 출입문의 지붕을 양 옆의 행랑채보다 높게 올림으로써 높은 신분을 드러냈다. 그 옛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집안의 고택들을 보면 하나같이 솟을대문이 우뚝하니 솟아있어 초입에서부터 사뭇 위압적인데, 이곳은 딱딱한 격식과 규율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져서 좋다.
나는 감히 집에서 풍수를 논할 수도 없거니와 그 속에 담겨진 성리학적 사유를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명재고택의 사랑채인 리은시사(離隱時舍)에서는 사대부의 당당한 기품과 더불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아도, 한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또한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포용(包容)의 시대정신이 구체화되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리은시사라는 말은 용이 세상에 나올 때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려 나옴을 말한다고 한다. 보통 사랑채들이 재(齋)나 당(堂)이라는 이름을 쓰는 데 반해 특이하게도 사(舍)라는 당호를 썼다.
사랑채의 멋스러움과 품격이 이럴진대 안채는 어떨까. 한옥의 안채는 남에게 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집주인이 편히 지내기 위한 공간이다. 그래서 한옥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건물의 안에서 밖을 바라보아야 한다고들 한다. 아쉽게도 명재고택의 안채는 닫혀있다. 외람되게 대문을 두드려볼 용기가 나지 않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흔히 명재고택이라 부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윤증은 이 집에 살지 않았다. 오히려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의 호를 딴 노서종택(魯西宗宅)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이 집은 윤증의 둘째아들인 윤충교가 집안의 장손이자 형님인 윤행교를 위해 1709년에 지었는데, 말년에 자식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윤증 또한 잠시 머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작 윤증은 이 집에서 4km 정도 떨어진 유봉의 소박한 초가삼간에서 지내며 보리밥에 소금, 고춧가루만으로 거친 식사를 했다고 한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며 칼과 방울을 차고 살았던 남명 조식의 추상같은 모습과도 닮았다.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도 큰 명성과 향촌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토록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처사(處士)로서의 삶에 기인했을 것이다.
명재고택을 얘기하면서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 하는 지식인, 가진 자의 도덕적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윤증 집안은 흉년이 들면 마을에 공사를 일으켜 그 노임으로 쌀을 지급했고, 추수 때면 나락을 길가에 두고 배고픈 마을 사람이 가져가도록 했다 한다. 그런 가풍이 있었기에 이후의 격동기에도 이 집안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뿌린 만큼 거둔다고 하지 않던가.
리은시사 옆의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독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명재고택에 올 때면 너른 품을 지닌 오래된 느티나무를 손으로 매만지며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곤 한다. 그 수많은 장독 안에서 맑은 물과 깨끗한 소금에 녹아들며,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명가(名家)의 가풍처럼 정갈하면서도 맛깔스런 장들이 만들어지고 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