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마저 무너뜨리지 못한 믿음
멀리 성당 가는 길에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행복하라. 이것은 말 그대로 명령이다. 따라야만 하는, 따르고 싶은 절대자의 명령이다. 지난 2010년 입적(入寂)하신 법정 스님의 잠언을 류시화 시인이 엮은 이 책에는 가난한 우리의 영혼을 맑게 정화(淨化)시켜 주고, 풍요롭게 만드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잠언이란 경계(警戒)가 되는 짧은 말이나 가르쳐서 훈계하는 말을 뜻한다. 이 책 속에는 법정 스님이 3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써 온 글과 법문(法門)에서 가려 뽑은 주옥같은 문장들이 가득하다. 글을 읽을 때마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욕(物慾)이 과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비우고 살고 있다 말하지도 못하겠다. 세속에 머무는 동안은 불가피한 것들이라며 에둘러 변명도 한다. 모든 것이 마음의 욕심 탓이다. 욕심에서 벗어나려면 비교를 하지 말라 한다. 모두 각자 태어난 그릇대로의 삶을 올곧게 살면 되는 것인데 또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게 되면 늘 비교하게 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탁(濁)한 마음을 때때로 닦아주지 못하면 억울함이 지나쳐 분노로까지 치닫게 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요,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고 가르치셨는데 우리네 좁은 마음으로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 책도 법정 스님의 열반(涅槃) 이후 불어 닥친 추모 열풍 속에 많은 이들이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 책의 가르침대로만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좀 더 고요해지고, 또 그 맑은 기운 속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이를 좀 더 먹어 가면서 ‘버릴수록 얻을 수 있다’는 말뜻을 알아가는 것 같다.
자신이 소유한 것에 소유 당하는 인간 삶의 허상에서 벗어나라는 스님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옳은 길인 것임을 알면서도 마땅히 그 길을 따라 나서지 못하는 용기 없음이 부끄러운 때문이다. 하지만 애쓰고 또 하루하루 그 가르침에 닿으려 노력하다 보면 지금보다 나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류시화 시인이 글로 남긴 것처럼 이 잠언집은 그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고 덮어 버릴 책이 아니다. 곁에 오래 놓아두어야 할 책이다. 그래서인지 단숨에 다 읽고 나서도 두 번 세 번 다시 읽고 또 읽게 된다. 하루에 딱 한 가지만이라도 좋은 생각과 정갈한 마음을 품고 명상한다면 맑고 향기롭게 살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생긴다. 언제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탁해질 때마다 곱씹어 보려 한다.
침묵과 고요와 몰입을 통해서 마음속에 뿌리내려 있는 가장 곱고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난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하나가 필요할 땐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가지면 그 소중함마저 잃게 된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며,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마주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의 울림이 없다.
영혼의 울림이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 법정스님,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서둘렀지만, 공세리성당에 도착할 무렵엔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해지기 직전의 넉넉한 햇살이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밝고 따뜻했다. 성당 주변에 있는 여러 그루의 보호수들은 그 세월만큼이나 풍성한 품으로 먼 데서 온 손님을 반겨 주었다. 한편으로 이곳은 오래 묵은 나무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공세리성당은 아산만과 삽교천을 잇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천주교(天主敎)의 역사는 충남 내포에서 시작되었다. 신중환의 택리지에는 내포를 충청도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 했는데 오늘날 홍성, 예산, 당진, 서산이 여기에 속한다. 서해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 문물이 가장 먼저 유입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연유로 서해와 가까운 지역에 유서 싶은 성당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 성당은 1922년에 프랑스 신부가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지은 충남지역 최초의 성당이다. 공세리라는 지명은 과거 이곳에 조선시대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하여 청주, 옥천 등 39개 고을의 조세를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던 공세창고(貢稅倉庫)가 있던 곳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아산만과 삽교천을 잇는 지리적 특성으로 초기 선교사들이 포교(布敎)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350년 넘은 팽나무가 방문객의 시선을 끈다. 해질녘 나무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곁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4백년 가까이나 된다. 세곡을 상․하역하는 인부들의 쉼터로 활용하기 위해 조선시대 때 성곽 옆에 심었던 느티나무들이 세월의 풍상(風霜)을 견뎌 지금은 성당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처사(處士)처럼 산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수백여 군데의 사찰을 지금껏 다녀봤다. 절이란 절은 잘도 찾아다니지만 성당은 아직 익숙하지가 않다. 지금껏 가본 성당이라고 해봐야 전주 전동성당, 대구 계산성당, 횡성 풍수원성당, 원주 용소막성당, 당진 합덕성당, 음성 감곡성당, 제주 한림성당 등 몇 되지 않는다. 종교의 본질은 다르지 않을 터이니 성당의 풍경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다.
공세리성당의 아름다움은 익히 들었다. <사랑과 야망>, <에덴의 동쪽>과 같은 드라마는 물론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여러 편의 영화 촬영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이가 많이 늘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다. 휴일이면 성당으로 통하는 길이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다. 전주 전동성당이 영화 <편지>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탄 것과 비슷하다.
2005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하기도 했는데 성당에 들어서면 세간의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된다. 본당은 1층 적벽돌 건물인데 정면에는 높은 첨탑(尖塔)이 있고 내부에는 무지개모양의 천장이 있다.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이 엄격한 카톨릭의 규율(規律)을 느끼게 한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모습이 마치 중세시대 유럽의 고풍스런 도시에 와 있는 듯 착각이 든다. 햇살이 오래된 느티나무 사이로 부서질 때의 공세리성당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봄날 저녁의 나른함마저 날아가 버리는, 여행을 부르는 ‘결정적 순간’이다.
아름다운 성당으로만 칭송하기엔 가슴 아픈 순교(殉敎)의 기억도 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迫害)의 시기에 이 성당 출신들도 순교(殉敎)를 했고 지금도 일부 순교자의 묘가 남아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열여덟 살 청년이 가슴에 새겼을 믿음의 힘, 그 처절함에 경외감(敬畏感)이 든다. 불교가 종교의 자유를 얻는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듯 새로운 종교가 민중 속으로 뿌리 내리기 위해선 아픔이 필연적이었나 보다.
공세리성당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默想)하는 ‘십자기의 길’이 있는데, 사형선고를 시작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열네 군데에 조형물로 조성해 놓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 극복하는 지혜를 일깨워주려는 뜻일까. 전국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찾아와 조용히 묵상하며 이 길을 걷는다.
공교롭게도 봄에만 공세리성당을 찾았었다. 그래서인지 공세리성당을 떠올릴 때면 따뜻한 봄 햇살이 절로 그려진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의 햇살은 그 어느 때보다 길고 따스하다. 사랑하는 이의 손길처럼 다정한 온기를 품고 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을 토닥여주는 듯하다.
잘 가꾸어진 공원 같다. 가까이 있다면 언제고 찾아와 오래된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고, 길게 늘어지는 햇살 아래 몇 번을 거닐어도 좋을 만하다. 성당에 들어가 경건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한 기도를 드려도 좋겠다. 느린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없이 여유롭고 정겹다. 4백년도 훨씬 넘게 살아온 느티나무에 따스한 햇살이 부서진다. 그들의 내일도 밝고 따뜻한 빛이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