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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뫼여울 Jan 14. 2023

통영 동피랑

이 골목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

통영은 매력적인 도시다. 통영이란 이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에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지금의 통영시인 두룡포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한다. 시로 승격되면서 충무공의 시호를 딴 충무라는 명칭을 쓰다가 1995년에 통영군과 도농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통영과 충무라는 이름 모두 그 옛날 남해 바다를 지키던 조선 수군에서 연유한 것인데 세병관, 충렬사 같은 유적이 과거를 묵묵히 증언한다.

너른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항구도시답게 활달하고 풍성하다. 조선시대 통제영에 물품을 공급하던 공방 장인들의 미감(美感)이 장쾌한 바다의 DNA를 만나 수많은 예술가를 낳았다. 시인 김춘수, 유치환, 김상옥, 소설가 박경리, 작곡가 윤이상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면모는 화려하다. 화가 이중섭 또한 이 도시에 머무르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니 통영은 예술적 감성의 샘터라 부를 만하다.

시인 백석 또한 통영과 인연이 깊다. 그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시로 남겨 통영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평북 정주가 고향인 백석이 천리길도 넘는 남해 바닷가에 와 사랑을 속삭였다니 조금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첫눈에 반한 통영 처녀를 보기 위해 통영의 작은 샘터를 기웃거렸을, 누추한 옛 사당 돌계단에 쓸쓸히 앉아 시를 지었을 시인의 마음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 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백석, <통영2>

통영이 낳고 키운 예술인들. 그들의 후예(後裔)들이 일궈낸 기적이 통영에 있다. 동피랑 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동네 전체가 아름다운 벽화로 그려진 동화 같은 마을이라고들 얘기한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마을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온다. 그런데 이 동피랑 마을이 몇 해 전에 철거될 위기에 처했었고, 그 위기를 넘기고 지금과 같은 명소가 된 것이 다 그 ‘벽화’ 덕분이라는 걸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동피랑은 동쪽 벼랑이란 뜻이다. 동피랑 마을은 통영시의 대표적인 어시장인 중앙시장 뒤편 언덕에 위치해 있다. 통영시에서는 이 자리가 원래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설치했던 통제영(統制營)의 동파루가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낙후된 지역인 이 마을을 철거하고 동파루를 복원해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당초 계획대로 마을이 철거되었다면 아마도 지금 이 자리에는 깔끔하게 잘 가꿔진 공원이 들어서 있을 것이다. 바로 아래 항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라 아마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계획이 알려지자 한 시민단체에서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전국벽화공모전을 열었고, 이 대회에 전국의 미술대학 학생 등이 참가해 마을의 담벼락에 형형색색의 벽화들을 그려 넣기 시작했던 것이다.  

벽화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고, 또 이 마을이 철거될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 마을과 벽화를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沸騰)하기 시작했다. 결국 통영시는 마을 철거 계획을 철회(撤回)하고 마을 정상에 있는 가옥 세 채만 철거한 후 그 자리에 동파루를 복원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놀라운 일이다. 시민의 힘으로 그 거대한 파괴를 막아냈다는 자체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벽화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꼬불꼬불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마을 입구에서 꼭대기까지를 한 바퀴 돌아보는 내내 벽화들이 단순한 그림으로만 여겨지지가 않았다.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피랑을 찾다 보니 마을 사람들에겐 좋은 일만 있는 것 아닌 것 같다. 좋기는커녕 성가신 일이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동피랑의 벽화 골목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부탁의 말씀’이라는 안내 문구를 만나게 된다. 그동안 주민들이 느꼈을 불편들이 고스란히 느껴져 잠시 머물다가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주민들의 생활에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집안을 기웃거리거나 지붕에 올라가거나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고, 무턱대고 주민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모두가 다 당연한 얘기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도 많은가 보다. 이곳은 이름난 관광명소이기 전에 수많은 주민들의 생활의 터전인 만큼 타인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잠시 내려놓는 게 좋겠다. 가난한 삶이 철없는 이들의 감성 사진 소재로 전락하는 서글픈 현실도 바뀌었으면.

이 동피랑 마을의 담벼락에 그려져 있는 벽화는 주기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이곳을 다시 찾아왔을 때 마음에 꼭 들었던 벽화가 사라져 버렸다면 그것 또한 아쉬운 일이겠지만, 새로운 벽화들로 채워지는 동피랑을 초행자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는 것도 충분히 흥미롭겠다. 벽화는 지워지더라도 각자의 가슴 속에 추억으로 깊이 새겨질 테니까.

정말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누군가 모질게도 그리운 그 사람이 바로 지금 걷고 있는 골목 끝에 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면 그리운 얼굴 하나 나를 반겨준다면. 동피랑에 갈 때마다, 좁고 가파란 골목길을 걸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골목. 어릴 적만 해도 참 친근한 공간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 집이 아니라 골목이었을 때도 많았을 테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린 골목으로부터 멀어졌다. 하늘 높은 줄만 알고 위로 올라만 가는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도심의 빌딩에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수직적 공간의 삶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가끔 마주치게 되는  골목이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골목만 유별난 것일까. 건축가 오영욱은 우리나라 산동네의 수많은 골목들은 그 생성 과정이 산토리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트라우마처럼 심장에 각인된 고통과 가난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나 역시 그의 의견에 공감한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 수많은 골목에는 가난과 고통스런 삶이 함께 녹아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골목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골목이 언제나 고달프고 서글픈 공간만이 아닐 수 있는 것은 그 골목에 기대어 살고 있는 이웃들의 삶과 푸근한 인정(人情)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 주변의 골목들과 친해질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고, 이채롭지도 않은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사진을 찍는 사람의 책무라고 하니까 말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또 사라져버릴 지도 모를 그 길 끝에서 혹여 너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를 행운을 기대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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