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 3퍼센트의 좋은 생각으로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의 글을 읽는 기분은 새삼스럽다. 하긴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역시 수백, 수천 년 전에 이 세상을 살았던 분들의 글이긴 하지만 불과 몇 해 전, 혹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았을 분들의 흔적을 이렇게 글로 다시 되새길 수 있다는 것도 큰 선물인 것 같다.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장영희 교수가 샘터에 연재했던 글들을 엮은 이 책은 2009년 5월에 출간됐다. 장영희 교수가 그해 5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마지막 유작인 셈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의 희망을 얘기하고자 했던 그분의 마음 씀씀이가 곳곳에 묻어 있다. 분명 이 책을 통해 따뜻한 위안을 얻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책의 제목을 두고 고민을 한 흔적을 책의 서문에서 충분히 느끼고도 남음이 있다. 몇 개의 후보 중에 결국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최종 낙점을 받았지만 이 것 역시 처음에는 불합격을 받았던 제목이라 한다. 스스로도 다시는 그런 기적 같은 삶을 살기가 싫다는 이유에서다. 눈곱만큼도 기적의 기미가 없는, 절대 기적일 수 없는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한다.
미루어 짐작하기 조차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를 겪어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고, 말년에는 무려 세 번씩이나 암이라는 병마와 싸워야 했던, 지독히도 불행했던 한 인간이 이 세상에 남긴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따뜻하면서도 지극히 담담하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어땠을까. 하늘은 왜 내게만 이런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주는 것일까 생의 매 순간순간을 누군가를 원망하며, 지독한 절망감에 스스로를 저주하며 살아갈 지도 모를 일이다. 나부터가 그렇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장영희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기적 같은 삶을 살아낼 수 있을 지 자신이 없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책에서 많이 접하게 된 명언이지만 한편 고개를 갸웃 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비가 오면 상대가 비를 맞지 않게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더 낫지, 같이 비를 맞아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들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 말이 지닌 참뜻을 이제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산을 들어서 그 사람이 비를 맞지 않게 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깊은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나아가 내 것으로까지 공감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함께 비를 맞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 같지만 그의 슬픔 속으로 들어가 함께 젖어갈 수 있을 만큼 넓고도 깊은 마음인 것이니까.
영어에서 쓰는 수사법 가운데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서로 상반되는 의미의 단어를 합께 배치해서 상황을 강조하는 비유법인데 우리말로는 ‘모순형용법’이라고 한다. 이 책에 담겨진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못했지만 잘했어요”라는 진호의 모순형용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장영희 교수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기쁜 사람과 슬픈 사람이 서로 함께 어울려, 보듬어 주며 살아가는 이 세상이야말로 제일 좋은 모순형용법의 예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최고의 모순형용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못났지만 잘 나 보이고,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그냥 그것으로 충분한, 사람에 대한 진실된 사랑 말이다.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은 사랑하는 사람들, 내일을 위한 희망, 그리고 나의 능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에 나쁜 생각이 있어도 3퍼센트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다.
기적(奇蹟)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또는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지겨운 일상의 반복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또 어떤 이에게는 기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남은 인생에 꿈꾸고 있는 기적 하나가 있다.
기적, 그것은 분명 쉬 내게 와주는 것은 아닐 테지만 간절히 바라고, 터벅터벅 쉼 없이 걸어간다면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 보려 한다.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을 3퍼센트의 좋은 생각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새처럼 자유롭게, 나만의 불가사리를 한 마리 두 마리 늘여 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