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던 한 해의 기록
2025년은 나에게 새로운 환경과 도전이 쉼 없이 이어졌던 한 해였다. 그 전 8년 동안 한 스타트업에 몸을 담으며 맡았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정말 많이 성장했다. 업무역량뿐 아니라 가치관과 인성까지도 이 시기에 많이 잡히고 단단해졌다. 그래서인지, 그 회사와 함께했던 시간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크다.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늘 한결같이 “감사한 마음뿐이었다”고 답한다. 그 말이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정말 진심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지금의 도전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2025년은 그런 울타리를 벗어나 전혀 새로운 환경 속으로 나를 계속 던져 넣어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익숙했던 자리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뛰어들며 새로운 하루를 열어가야 했고, 적응하고 도전하며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1년의 8할이 지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많은 일들이 지나가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묘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고 그래서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간 것 같다는 점이다.
지난 8년 동안 하나의 조직에 몸을 담고 일해왔지만, 올해는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세 번이나 회사를 옮겼다.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직은 물론 면접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가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물론 그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이런 격동의 시기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더 큰 도전을 위해 울타리 밖으로 나왔지만 생각보다 세상은 넓었고 그만큼 파도도 거셌다. 파도에 휩쓸리듯 헤매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스스로도 안타까웠고, 남들 앞에서는 괜스레 면목이 서지 않는 순간들도 있었다. 때때로 “나는 생각보다 크고 단단한 존재가 아닌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치면 마음이 작아지고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마치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져서 스스로 당황스러웠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올해를 돌아보면 그런 흔들림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이 배우고 성장했던 것 같다. 성장은 늘 아름답게 찾아오지 않는다. 성공과 환희의 순간에 도달해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참 많이 성장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도 분명 아름답다. 그렇지만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배움은 분명히 있다. 남들이 축하해주지 않더라도, 나조차 그때는 알아보지 못했더라도, 성공이든 실패든 치열하게 도전했다면 그 안에는 분명히 성장한 내가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라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것 역시 올해가 나에게 준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2025년 1월, 나는 8년 동안 몸 담았던 익숙한 회사를 떠나 전혀 다른 도메인에서 PO로 일을 시작했다. 줄곧 교육 업계에서 B2B 고객만 상대하며 일해오던 나에게 커머스 기반의 B2C 리테일 비즈니스는 정말 모든 것이 낯설었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데이터 분석가 분들과 함께 제품을 만들고 성과를 책임지는 일도 처음이라 솔직히 처음에는 내가 이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다. 그래도 하루하루 부딪히며 배우다 보니 이 역할만의 흥미로운 지점들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배움과 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짧았던 PO 생활을 뒤로하고 옮겨간 다음 회사는 국내에서 제법 잘 알려진 SaaS 제품을 서비스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글로벌 사업 진출을 담당하는 글로벌 BD, 즉 사업개발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교육 업계에서 오래 일해오던 내가 커머스 기반의 PO를 거쳐 글로벌 BD라는 완전히 다른 역할들을 연달아 맡게 된 셈인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런 변화들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솔직히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이 길이 정말 내 길이 맞는지, 나는 지금 잘 가고 있는 게 맞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빠르게 새로운 역할과 환경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큰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알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졌고, 생각보다 세상은 훨씬 더 넓고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길이 이렇게 많다는 걸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혼란스러우면서도 감사했고, 두렵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던, 감정이 계속 교차하는 시기였다.
이 모든 변화가 고작 9개월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지난 8년의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밀도도 높았고, 정신없이 지나가버린 날들이었지만, 돌아보면 그 혼란스러움조차도 결국 나에게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이 나를 다시 한번 크게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이번 브런치 글은, 올 한해 새로운 환경에서 도전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배우고 성장한 것에 대해서 정리해보는 글이다. 하나하나는 대단히 큰 주제이어서 하나 이상의 글로 정리되어도 부족함이 없다. 이번 글에서는 간단히 적고 나중에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자세하게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올해 새로운 조직에서 일하면서 정말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다. 이전의 나는 대체로 사람과 조직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늘 신중하게 처신해왔으나, 간혹 사람보다 사업상의 문제해결을 더 중시할 때도 분명 있었다. 냉혹하고 각박한 스타트업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람보다 사업을 더 우선할 때도 있지 않겠나 하는 마음, 생존과 경쟁 앞에서 사람과 조직을 챙긴다는 것은 너무 고상한 태도가 아닌가 하는 마음이 솔직히 있었다.
그러나 사람보다 사업을 우선할 경우, 극단적으로는 사람을 경시할 경우, 발생하는 위험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 이제는 확실하게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사람이 사업보다, 아니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짐 콜린스가 Good to Great이라는 책에서도 말했듯이, "사람을 먼저 버스에 태우고, 할 일은 그 다음에 정한다"라는 말은 조직과 사업을 이끄는 리더들이라면 반드시 가슴에 새겨야 할 격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관점은 더더욱 중요하다. 만약 부족하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생각과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끝은 파멸적인 실패가 필연적으로 함께 따라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똑똑한 리더들은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데 능하다.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살피지 못하는 경우, 리더가 아무리 똑똑하고 효과적인 문제해결 방법을 제시한다한들, 조직이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할때가 많다. 사람을 살피는데에는 허술하면서, 똑똑하기만한 리더들이 현장에서 거의 99%의 확률로 겪는 문제이자 고민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상황의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아래의 질문과 관점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동물인데, 동료들을 기계나 부품처럼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팀의 동료들은 오늘 출근하면서 어떠한 기분이었을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들의 의지는 10점 만점에 몇점일까?
우리 팀의 동료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고민은 무엇일까? 등등
아마도 사업보다 사람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끄는 조직은 보나마나 매우 생기가 넘치고 시간이 갈수록 더 단단하고 훌륭한 팀이 되어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만약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번쩍하며 뒤통수를 맞았다는 느낌이 들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질문으로 치부해버릴지도 모른다. 그 조직의 사무실 분위기는 그야말로 끔찍하다. 사무실은 말이 없고, 공개적인 발언을 꺼리고 쉬쉬하면서, 위를 향하는 조직 내부의 신뢰는 바닥을 치고 있을 것이다.
리더십이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서는 순간은 조직이 위기를 경험하고 있을 때이다. 조직과 사업이 성장하는 일로에 놓여있을 때에는 그야말로 순한 맛 수준의 리더십 과제들만 경험해볼 수 있을 뿐이다. 조직 내부에는 기회가 넘쳐나고 희망과 기대가 전반적인 조직 분위기를 지배하기 때문에 리더로서 역량을 발휘해야 할 첨예한 문제들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거나 사람들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조직이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부터 180도 달라지게 되면서, 리더의 역량과 자질에 대한 냉혹한 평가가 시작된다.
리더는 4가지를 잘 이해하고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올바른 방향성과 전략의 제시', '목표와 성과관리', '조율과 중재' 그리고 '육성'이다. 조직이 위기를 통과하는 시점에는 이 4가지 역량이 극도로 요구된다. 또한 리더의 역량을 판단하는 가장 정확한 데이터는 밑으로부터의 평가이다. 위로부터의 평가는 크게 의미가 없다. 아무리 상사로부터 평가가 좋다고 하더라도, 밑으로의 평가가 상반되거나 부정적이라면 그 리더는 결코 조직을 위기로부터 구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직의 리더를 세울 때,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잃어버리고 그릇된 선택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던 사람을 올리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던 동료나 팀원에게 리더십의 역할을 부여하고 싶어 한다. 어떠면 독립된 하나의 조직의 리더로서 후보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 나를 따르던 사람에게 보상을 주고자 하는 마음, 또는 나의 조직을 더 크게 꾸려가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나를 위해 헌신하며 성과를 냈던 사람에게 리더의 역할을 부여하는 잘못된 판단을 종종 하게 된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4가지 역량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며 이에 대한 평가는 나를 포함한 위로부터가 아닌, 밑으로부터의 평가가 핵심이어야만 한다. (사실 위로부터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실행을 강조한다. 나도 물론 실행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백번 생각해봐야 실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또한 백번의 생각보다는 열번의 실행을 통해서 훨씬 더 깊고 풍부한 학습을 경험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치열한 고민이 없이 단순히 실행만 무지성으로 빠르게 하는 것의 위험성이다.
고민보다 실행을 더 우선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논리가 있다. 어떠한 전략이 먹힐지 모르니 고민을 하기보다는 일단 다양한 시도를 해보면서 답을 찾아나가자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100%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스타트업 업계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원칙과 기준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학습과 인지가 없이 실행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이 PMF(Product Market Fit)라고 하는 것은 시장과 제품의 궁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제품을 정의하는 것에 앞서 절대적으로 고객과 시장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고객과 시장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없이 제품의 외형과 패키징이 신경을 쓰면서 PMF를 찾기를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원칙과 기준도 없이 무식한 실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고객창출당 비용(CAC, Customer Acquisition Cost)를 계산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어떠한 타겟 고객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적정한 CAC를 찾는단 말인가? 그렇게 CAC 지점을 찾았다고 한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대체 제품의 고객과 시장을 어떻게 정의한단 말인가?
스타트업 씬에서 일하면서 업계의 진짜 실력자들을 만난 적이 몇 번 있다. 그들은 확실히 실행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남들이 몇일씩 고민하던 일을 바로 실행에 옮기고 바로바로 판단해서 최적의 전략을 수립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사람들은 바깥으로 드러난 그 모습만을 보고, "역시 고민할 시간에 실행부터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듯 했지만, 나는 그 사람이 수년간의 치열한 노력을 통해 몸 안에 새겨진 불변의 원칙과 기준들이 존재하고, 여기에 중심을 두고 빠르게 실행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대화를 하며 알 수 있었다. 초기에 PMF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는 유입이나 전환보다는 활성화와 리텐션 지표를 더 우선한다는 점도, 그리고 고객의 니즈를 바탕으로 어떻게 제품의 핵심가치와 속성을 매끄럽게 연결하여 제품을 정의한다는 점도 그 실력자는 이미 머릿 속에 명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실행은 그저 거들 뿐이었다.
올해를 이렇게 다시 찬찬히 돌아보니, 흔들리고 헤매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시간들조차 결국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환경 속에 던져지고, 익숙했던 문법이 통하지 않는 자리에서 다시 배우고, 사람과 조직, 그리고 일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또 다른 변화와 도전이 찾아오겠지만, 올해 배운 것들을 잊지 않고 한 걸음씩 더 나아가보고 싶다.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배움을 놓지 않고, 사람을 잃지 않고, 나를 계속 성장시키는 방향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는다. 올해의 시간들이 나에게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