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부리 | 3
태국의 동쪽 바다,
지금은 세계적인 휴양지로 알려진 도시, 파타야(Pattaya).
하지만 그 이름의 시작은, 바람도 파도도 아닌 전쟁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이 버마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수도는 불타고, 왕국은 흩어졌다.
그리고 혼란의 시대—나라의 중심이 무너진 뒤, 각지의 세력이 각자 군대를 일으켰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탁신(Taksin) 장군이다.
그는 동쪽 끝의 찬타부리(Chanthaburi)에서 군을 재정비한 뒤, 무너진 왕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서쪽 톤부리(Thonburi)로 향했다.
그 길에 현재의 촌부리–파타야 해안이 있었다.
탁신의 부대가 이곳을 지나던 때, 이미 한 세력이 그 앞을 막고 있었다.
당시 기록은 그들을 ‘ทัพพระยา(Thap Phraya)’, 즉 ‘프라야의 군대’라 부른다.
*프라야(Phraya): 태국 고전 사회의 관직·작위명이다.
‘พระยา (Phraya)’는 왕 밑에서 한 지방을 통치할 권한을 가진 귀족·영주·지휘관의 칭호였다.
조선식으로 비유하자면 “○○도절도사”나 “영주 겸 장수”쯤 되는 위상이다.
*‘탑 (Thap)’: 군대를 뜻한다.
따라서 ‘Thap Phraya(탑 프라야)’는 ‘프라야가 이끄는 군대’, 즉 지역 영주의 무장 부대를 의미한다.
탁신의 부대와 ‘프라야의 군대’는 처음엔 적대 관계였다.
서로를 향해 창끝을 겨눈 채 대치하던 그 순간, 지역 영주는 탁신의 용기와 결단에 감복했다.
그는 전투 없이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그날 이후, 이 해안은 “프라야의 군대가 머물던 곳”이라 불렸다. 즉, ‘Thap Phraya’(탑 프라야).
시간이 흐르면서 발음이 조금씩 바뀌어 ‘ทัพพระยา(Thap Phraya)’ → ‘พัทยา(Pattaya)’가 되었고,
오늘날의 도시 이름으로 남았다.
지금도 파타야 남쪽 언덕으로 향하는 도로 중 하나는 그 이름을 기려 ‘Thap Phraya Road(ถนนทัพพระยา)’라 부른다.
관광객에게는 그냥 도로 이름이지만, 태국인에게는 “탁신이 이 땅을 다시 하나로 묶었던 기억”의 상징이다.
그 후 오랫동안 파타야는 시라차(Si Racha)와 싸타힙(Sattahip) 사이의 조용한 어촌으로 남았다.
북쪽의 ‘나끌루아(Naklua)’ 지역에서는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소금밭의 바다”라는 별칭도 있었다.
잔잔한 만, 어부들의 배, 해 질 녘의 바람.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파타야의 풍경은 그때도 이미 존재했다.
단지 조용하고, 이름 없는 바다였을 뿐이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이 시작되면서 태국은 미국의 전략적 동맹국이 되었다.
미군은 인근에 싸타힙 해군기지와 우타파오(U-Tapao) 공군기지를 건설했고, 병사들은 휴식을 취할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1961년, 돈무앙 공군기지의 미군 장교들이 주말 휴가를 위해 시라차를 향하다가
현지인의 추천으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곳이 바로 파타야였다.
그날 이후 파타야는 미군들의 ‘R&R (Rest and Recreation)’, 즉 휴식과 회복의 도시로 알려졌다.
어촌은 도시로 바뀌었고, 전쟁의 그림자는 새로운 불빛으로 변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떠난 뒤에도 파타야는 다시 어촌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유흥과 음악, 네온사인이 해변을 덮었고 세계를 향한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이 도시를 “밤의 낙원”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 시작에는 여전히 전쟁과 생존의 기억이 깃들어 있다.
파타야는 늘 누군가에게 쉼이 필요할 때 태어난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