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 8
방콕에는 ‘럭셔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한 호텔이 있다.
만다린 오리엔탈 방콕.
오래전, 스냅 촬영차 잠시 들렀을 때는 그저 “아름다운 곳”, “비싸고 럭셔리 호텔”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저 오래된 건물이라고 여겼던 이곳이 사실은 방콕의 시간 자체라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이었다.
불길과 전쟁, 점령과 폐허 속에서도 수차례 다시 일어난 ‘불굴(不屈)의 명당’, 그 단어가 이 호텔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차오프라야 강 동쪽, 지금의 오리엔탈 호텔 부지는 본래 라마 3세 시대 왕족의 별궁 터였다.
그 시절 강은 단순한 수로가 아니라 ‘왕의 길’이었다.
외국 사절과 상선이 처음 시암에 닿는 관문, 왕의 배가 지나던 길목이었다.
이 별궁은 왕실과 외세가 처음 조우하는 ‘국가의 창문’이었고, 훗날 그 위에 세워질 호텔은 시암이 세계로 문을 연 응접실이 된다.
19세기 중엽, 영국 선장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가 이 부지를 임대해 외국 선원용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이것이 방콕 최초의 서양식 숙소였다. 하지만 1865년, 화재가 모든 걸 삼켰다.
강변의 첫 서양식 숙소는 불빛과 함께 사라지고, 그 부지는 한동안 잡초와 적막 속에 방치된다.
불이 꺼진 지 10여 년 후, 덴마크 선장 한스 닐스 안데르센(H.N. Andersen) 과 칼 살례(C. Salje) 가 이 부지를 인수했다. 그들은 차오프라야 강을 오가던 해운 상인으로, 유럽 상인들의 ‘방콕 기착지’를 만들고자 석조 건물을 세웠다.
그들이 붙인 이름이 바로 ‘The Oriental.’
1876년, 오리엔탈은 시암 최초의 서양식 럭셔리 호텔로 탄생했다.
(오늘날 호텔 공식 연혁에서도 이 해가 개장 연도로 기록된다.)
1880년대, 방콕은 변화의 물결 위에 있었다.
오리엔탈을 운영하던 안데르센은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그는 프라야 프리당 라차(Phraya Prisdang Racha), 라마 3세의 손자이자 시암 최초의 주영국 공사였다.
프리당은 시암 외교의 개혁자였다.
그는 런던 외무부와의 직접 교섭을 통해 서구 외교 문법을 시암에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왕실의 혈통과 서양 상업 자본이 처음으로 손을 맞잡은 순간이었다.
프리당은 외교적 통로를, 안데르센은 실질적 무역 네트워크를 제공했다.
그들의 만남은 단순한 개인적 친분을 넘어 시암 근대화의 밑그림을 그린 협력 관계였다.
훗날 안데르센은 이 경험을 토대로 1897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이스트 아시아틱 컴퍼니(East Asiatic Company, EAC)’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시암–덴마크 해운, 전신, 무역, 건축을 잇는 근대 인프라 네트워크의 핵심이 되었고, 오리엔탈은 그 탄생의 출발점이었다. 호텔의 베란다는 이제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닌, 시암과 유럽이 손을 맞잡던 외교의 응접실이 되었다.
오늘날 그 부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때 화물선이 드나들던 창고 건물은 현재 호텔로 리모델링 공사 중이며, 100년 전과 같은 자리에서 다시 여행자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EAC가 남긴 부두와 창고의 흔적 위에 새로운 이름이 세워졌다
‘Asiatique The Riverfront’.
한때 유럽 화물선이 닿던 그 선창은 이제 카페와 조명, 음악이 흐르는 산책길이 되었지만, 강바람 속엔 여전히 안데르센의 무역선과 프리당의 외교 서한의 공기가 남아 있다.
오리엔탈에서 아시아티크까지, 이 강은 언제나 시암이 세계와 만나는 창문이었다.
안데르센은 호텔을 확장하며 새로운 석조 동을 세웠다.
그것이 오늘날 오리엔탈의 상징, ‘Authors’ Wing’(작가관)이다.
유럽풍 벽돌, 아치형 창문, 강을 향해 열린 베란다.
모든 건축적 요소는 시암의 품격과 서양의 세련됨을 동시에 담아냈다.
그곳은 외교관, 상인, 작가들이 모여드는 ‘시암의 응접실’이 되었고,
방콕의 외교가 실제로 이루어지던 장소였다.
1890년, 라마 5세(쭐라롱꼰 대왕)는 오리엔탈 호텔을 직접 방문했다.
그는 서구식 서비스의 품격에 감명받으며, “이곳은 시암이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창문”이라 칭했다.
그로부터 1년 뒤, 1891년, 러시아 황태자(훗날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시암을 방문했을 때
라마 5세는 그를 오리엔탈에 묵게 했다.
그날 이후, 오리엔탈은 단순한 호텔이 아닌 ‘시암 왕국의 국빈 영빈관(State Guesthouse)’ 으로 격상됐다.
‘왕의 집’은 그렇게 ‘세계의 응접실’이 되었다.
그러나 영광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1893년 7월, 차오프라야 강 하구 팍남(Paknam) 에서 프랑스 해군이 시암의 요새를 돌파해 방콕으로 진입했다. 시암 해군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파리 조약’을 체결하며 라오스 영토를 내주었다.
이 사건은 시암 외교사의 가장 뼈아픈 굴욕으로 기록되었다. 그날 이후, 오리엔탈의 강변은 왕과 외교관, 서양 기자들이 모여드는 긴장의 현장이 되었다.
신문 특파원들이 강변 베란다에서 원고를 쓰고, 외교 서한이 오가던 장소.
오리엔탈은 ‘시암 외교의 응접실’에서 ‘세계 제국의 관측소’로 변한 순간이었다.
안데르센이 하드웨어를 세웠다면, 그 위에 ‘소프트웨어’를 완성한 사람은 두 명이었다.
미국인 총지배인 칼 G. 에드워즈(Carl G. Edwards), 그리고 프랑스 여성 경영자 마담 O. 부줄레(Madame O. Bujault).
에드워즈는 호텔 운영과 서비스 시스템을 정비했고, 부줄레는 미식과 예술, 격식의 문화를 심었다.
두 사람은 오리엔탈을 단순한 숙소가 아닌 ‘방콕 사교의 심장’, ‘시암의 응접실’ 로 바꾸었다.
부줄레는 방콕 최초로 정통 프랑스 파인 다이닝을 도입하고, 유럽에서 직접 식자재와 와인을 수입했다.
에드워즈는 ‘음악이 있는 만찬(Dinner with Music)’ 문화를 정착시켜 오리엔탈을 밤의 향연이 있는 호텔로 만들었다.
그 시절 강가의 베란다에서는 피아노 선율과 와인잔의 울림이 겹쳐졌고, 외교관과 예술가들이 그곳에서 새로운 시암의 밤을 배웠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오리엔탈을 ‘럭셔리의 대명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오리엔탈은 이제 ‘작가의 호텔’이 되었다.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는 선장 시절 이곳을 드나들며 ‘항해와 동양의 풍경’을 작품에 남겼다.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 은 1920년대 이곳에 머물며 ‘동양의 고요한 품격 속에 문명이 잠들어 있다’고 적었다. 그들의 문장은 차오프라야의 바람처럼 흘러 호텔을 하나의 문학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리엔탈은 일본군 장교 숙소로 징발되었다.
유럽인 경영진은 떠났고, 호텔은 폐허처럼 침묵했다.
강변엔 군홧발의 소리가 메아리쳤고, 창문마다 가려진 커튼 뒤로 긴 전쟁의 밤이 흘렀다.
전쟁이 끝난 뒤, 한 남자가 폐허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미국 OSS 장교 출신 짐 톰슨(Jim Thompson).
태국을 떠나지 않은 그는 동료들과 함께 오리엔탈 호텔의 지분을 인수하고, 재건을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첫 사업이었다.
1947년, 프랑스의 전위 사진가 저메인 크룰(Germaine Krull) 이 총지배인으로 부임했다.
그녀는 파리의 예술 감각과 저널리즘의 냉철함으로 호텔을 다시 빚어냈다.
크룰은 장식, 식기, 음악, 조명 하나까지 직접 감독했다.
밤이면 샹들리에가 켜지고, 외교관과 예술가, 언론인들이 다시 강변의 살롱으로 모여들었다.
짐 톰슨은 그 경험 속에서 ‘태국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경영권을 넘기고, 곧 Thai Silk Company 를 설립한다.
그의 첫 주문은 바로 오리엔탈 호텔의 커튼과 식탁보였다.
오리엔탈은 그가 남긴 첫 작품이자, 그의 예술적 야망이 태어난 출발점이었다.
왕의 별궁에서 국빈의 집으로, 그리고 전쟁의 폐허에서 예술의 무대로. 오리엔탈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그 벽돌 하나하나에는 시암의 근대가 스며 있고, 강바람 속엔 제국과 독립, 음악과 문학, 그리고 불굴의 의지가 뒤섞여 있다. 이곳이 방콕 불굴의 명당인 이유이다.
그 이후 냉전시대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