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空白)

문이 닫힌 뒤에 머무는 것들

by 강라마
IMGP0117.jpg <공백(空白)> 2025.11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Gaeun)

사톤에서 차오프라야 강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짝 비켜선 건물이 하나 있다.
O.P. Place.

관광지라 부르기엔 조용하고, 폐건물이라 하기엔 어딘가 단정하다.
문이 닫힌 상점들, 비어 있는 복도, 무광의 나무 손잡이와 오래된 유리창들.
지금은 운영을 멈춘 공간이지만 그 안에 남은 공기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곳은 한때 East Asiatic Company가 번성하던 강변 무역지대의 일부였다.
유럽 상인들이 방콕을 오가며 물건을 싣고 내리던 시절, O.P. Place와 주변 창고들은 그 왕성한 움직임을 받아내는 중심지였다. 오리엔탈 호텔과도 깊게 얽힌 지역의 역사였다.

세월이 지나 회사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갔고, 강변의 창고들은 매각되거나 해체되었다.
예전의 표정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건 이제 몇 곳뿐이다. O.P. Place는 그 중 하나다.
간판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떠났지만 창문 틈새로 스치는 공기만큼은 여전히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다.

언젠가부터 이 주변에서는 재생 프로젝트와 호텔 개발 소식이 이어졌다.
East Asiatic Company 오리지널 본관은 ‘Nobu Hotel Bangkok’으로, 맞은편의 Custom House는 ‘Langham’ 호텔로 새로운 얼굴을 준비 중이다.
역사의 잔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의 용도로 다시 살아나는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남는 것은 아니다.
이 지역의 오래된 계단들, 목재 난간, 한때 손때 묻던 상점의 문, 작은 조명들 누군가에겐 그저 낡고 쓸모없는 것들이겠지만 도시의 층위를 만들던 디테일들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수 없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문이 굳게 닫힌 O.P. Place 앞에서 괜히 한참을 서 있었다.
비어 있는 건물인데도 이상하게 ‘빈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닫힌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은 공기만이 남아 있었다.


[참고 – O.P. Place의 역사]

건립: 1908년 (라마 5세 시대)

역사: 독일계 무역상점 'Falck & Beidek'으로 시작 → 이후 'Oriental Plaza'를 거쳐 현재의 'O.P. Place'로 변모

역할: 과거 왕실과 귀족을 대상으로 유럽 물건을 소개하던 최고급 백화점

맥락: 오리엔탈 호텔과 맞닿은 위치로, 서구 열강의 무역과 사교가 교차하던 차오프라야 강변의 핵심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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