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말을 걸어오던 오후
사톤의 작은 길을 걷다 우연히 이 벽 앞에 멈춰 섰다.
처음엔 단순히 오래된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간 줄 알았다.
하지만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순간, 그저 낡은 벽이 아니라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벽의 균열과 침식된 자국들이 누군가의 표정, 눈빛, 그늘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국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살다 보니, 종종 ‘사라지는 것들’을 먼저 보게 된다.
새로운 건물들이 솟아오르고 오래된 공간들이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도시에서
이 벽은 기이하게도 ‘지워지면서 드러나는 얼굴’을 품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방콕 포르투갈 대사관의 외벽이었다.
그리고 이 얼굴들은 포르투갈 출신 아티스트 Vhils(알렉산드르 파토 살가두)의 작품이었다.
전 세계 30여 개 도시에서 벽을 ‘깎아’ 얼굴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다.
페인트를 덧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도끼, 드릴, 화약, 끌을 사용해 벽을 ‘깊이 파내며’ 이미지를 만든다.
그는 이를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을 새기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업 또한 태국과 포르투갈의 오래된 관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했다.
포르투갈은 아유타야 시대부터 태국과 가장 먼저 외교를 맺은 서양 국가였고, 군사·무역·식문화·언어까지 오랫동안 서로의 시간을 나눠 왔다.
그 긴 교류의 흔적 위에 Vhils는 지워지고, 남아 있는 얼굴들을 새겨 넣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깎여나가고, 남고, 벗겨진 이 얼굴들은 이 도시의 표정과도 조금 닮아 있었다.
빛이 스치고, 먼지가 쌓이고, 복원되지 않은 상처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까지 도시가 품은 시간의 결이 이 벽에도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처음엔 얼굴을 찾았고, 그러다 표정을 읽게 됐고, 마지막엔 그 표정이 지나온 시간을 떠올렸다.
방락(Bang Rak) 한복판에서, 벽 하나가 아주 조용히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