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그 둘,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끝끝내 함께하진 않잖아요."
서연이 종이컵을 들며 말했다. 컵 안의 술이 미세하게 출렁였다. 그녀는 그 투명한 액체에 자신의 복잡한 감정이 녹고 있다고 느껴졌다.
"음... 결국 각자의 길을 선택하죠. 사랑이 있어도, 삶은 다 따라와 주진 않으니까."
준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화 속 흑백 장면들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저는 그게… 오히려 더 진짜 같았어요. 어쩌면 우리처럼 잠깐 같은 계절에 머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을 마치며 그녀는 자신의 가슴이 살짝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 말에 담긴 혼돈이 준호에게도 전해질까 하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준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그런데... 저는 남자 주인공이 마지막에 조금 더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어요."
그가 말할 때,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것처럼. 서연이 준호를 바라보다 되물었다.
"노력이요? 어떤 노력을 말하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궁금증과 함께 미묘한 방어적인 톤이 깃들어 있었다.
"그냥... 그렇게 쉽게 체념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더 확실하게 전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준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고, 그의 눈은 서연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영화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는 거 아닐까요?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존중했기 때문에 아름다웠던 거라고 생각해요. 억지로 붙잡는 건... 그건 사랑만은 아닐 거예요."
준호는 술을 한 잔 마시고 말했다.
"그냥... 진심을 전하는 데 있어서 때로는 더 적극적인 표현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해서요."
"그러니까, 준호 씨는 영화 속 남자와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웃음이 스친 그녀의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처럼 들렸다.
"다르다기보다는..."
준호가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요한 것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노력하는 편이에요. 특히 사람에 관한 일이라면."
서연은 그의 직설적인 대답에 살짝 당황했다. 그의 눈빛에서 그저 영화 속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제 마음은 확실히 전하고 싶어요. 그 후의 선택은 상대방의 몫이지만요."
이 말을 하는 동안, 그의 시선은 한순간도 서연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서연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에 담긴 의미가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유리컵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변의 소음이 갑자기 더 크게 느껴졌다. 옆 테이블에서 웃는 소리, 불판에서 지글거리는 소리, 사장님이 주문을 외치는 소리.
"혹시... 준호 씨는 그런 경험이 있나요? 말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사람?"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질문의 무게는 무거웠다.
준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마치 먼 과거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창밖을 잠시 응시했다.
"서울에서 일하면서 만난 사람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제가 미국으로 가서 곧 돌아올 생각이었죠." 그는 잠시 멈추더니 잔을 기울였다. "결국 타이밍이란 게..."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
서연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방향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영화 속 여자 주인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가 마지막에 남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는데..."
준호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솔직히... 저는 그녀가 알아봤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죠."
"정말요? 왜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진짜 궁금함이 묻어 있었다.
"새 삶을 살기로 했으니까요. 과거를 완전히 잊기로 한 거 아닐까요."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저는 반대로 생각해요. 정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슬픈 거고요. 그토록 강렬했던 사랑인데, 완전히 잊혀진다는 게..."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분명 같은 영화를 보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그 차이는 단순히 영화에 대한 의견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랑과 삶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였다.
서연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결국 사랑에 대한 관점이 다른 거네요, 우리."
준호는 어묵 하나를 천천히 집어 들며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젓가락을 쥐는 모습이 서연의 시선을 끌었다.
"어떤 점에서요?"
"준호 씨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붙잡는 사랑을 믿는 것 같고, 저는... 떠날 때는 보내주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서연이 말하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얽히고 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준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맞아요. 하지만 그건 어쩌면... 우리 각자의 경험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경험이요?"
"사람들은 자기가 겪었던 상처를 통해 배우니까요. 아마 저는... 말하지 못해서 후회했던 경험이 있고, 서연 씨는 억지로 붙잡혔던 경험이 있을지도 모르고."
서연은 준호의 통찰력에 놀랐다. 그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정확히 그녀의 과거를 짚어낸 것 같았다.
"이건 마치... 영화 해석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성격 분석하는 것 같네요."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조금 긴장된 것이었다. 대화의 깊이가 갑자기 너무 깊어진 것 같아 본능적으로 가벼움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준호도 따라 웃었다. 그의 눈빛은 이해하고 있다는 듯했다.
"맞아요. 영화 한 편 보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네요."
그가 가볍게 소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재미있어요, 언제나… 서연 씨와의 대화는."
소주잔이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포장마차 안에 울렸다. 밖에서는 봄바람이 불고, 벚꽃 잎이 가끔 비닐창을 스치듯 날아갔다.
"영화가 좋은 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어서인 것 같아요. 맞고 틀린 게 없으니까."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묻어났다.
"사랑도 그런가요? 맞고 틀린 게 없는 거?"
서연이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는 진짜 궁금함이 담겨 있었다.
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어쩌면 사랑에는 정답은 없지만, 후회는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후회요?"
"네. 표현하지 못해서 생기는 후회, 혹은 너무 많이 표현해서 생기는 후회... 둘 다 있을 수 있으니까요."
서연은 소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준호의 말에 서연은 깊이 공감했다. 후회라는 단어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울렸다. 뉴욕으로 떠나지 못했던 일, 그리고 그로 인해 달라졌을지도 모를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준호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는 듯한 표정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대신 그는 소주잔을 들어 서연의 잔과 가볍게 부딪쳤다. 그 작은 접촉에도 두 사람 사이에 이해의 다리가 놓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가 흘러갔다. 서연은 미묘하게 변화한 분위기를 느꼈다. 뭔가가 달라졌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후회라는, 기억이 머무는 자리... 그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기억을 간직할지, 어떤 기억을 보내줄지."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준호는 완전히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서연 씨와 나눈 이 대화는 제 기억 속에 오래 머물 것 같아요."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저도요."
한 마디였지만, 그 한 마디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몇 잔의 소주를 더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영화 속 장면들, 뉴욕에서의 추억, 그리고 서울의 봄. 모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엮이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죠?"
준호가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의 만남이 충분히 특별했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네, 그러죠."
그녀가 대답하자, 준호는 계산을 마치고 그녀와 함께 포장마차를 나왔다. 초저녁의 거리로 나온 그들을 반기는 것은 환상적인 하늘이었다. 하늘은 어스름한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준호는 셔터를 눌렀다.
"지금의 공기를 렌즈에 담아두었어요."
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걸음은 느렸다. 마치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다음 주말에... 우리 만날 수 있나요?"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서연은 잠시 생각했다. 다음 주말이면 원고 마감일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다른 모든 일정을 미루더라도 마감을 지키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사실 원고 마감일인데..." 그녀가 망설이며 말했다.
"아, 그러세요? 그럼 다른 날..."
"아니에요." 서연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괜찮아요. 마감은 미리 끝내면 되죠."
준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요?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누군가와 함께 가보고 싶었던 곳이에요."
서연은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느끼며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기대할게요. 어떤 곳인지 힌트는 없나요?"
"봄과 잘 어울리는 곳이에요. 그것만 알아두세요." 준호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은 지하철역 입구에서 헤어졌다. 준호는 서연이 지하철에 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서연은 오늘의 대화를 곱씹었다. 이상하게도 영화 내용보다 준호와 나눈 대화가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집에 도착한 서연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또 만난다면 어떤 날이 될까? 준호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까? 기대감과 설렘이 뒤섞인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곧 잠에 들기 전, 서연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짧은 메시지였지만, 서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잠시 무슨 답장을 보낼지 고민했다. 책상 위에 놓인 준호가 준 책갈피를 바라보며, 그녀는 가장 솔직한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저도 즐거웠어요. 다음 주에 봐요."
그렇게 봄소풍의 하루가 저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기억이 머무는 자리에서, 봄이 가도 남아있을 그들만의 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