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의 작은 영화관, 그들이 찾은 곳은 예술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하는 곳이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시대를 초월해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의 포스터들이 특유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흑백의 매력적인 배우들, 오래된 글씨체로 쓰인 영화 제목들이 서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연은 자연스럽게 왼쪽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준호가 그녀의 행동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서연은 벽에 걸린 오래된 프랑스 영화 포스터 앞에 멈춰 서서 미소를 지었다.
"트뤼포 회고전에 왔었어요."
그녀가 포스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저도 그 회고전 왔었어요. '400번의 구타'를 큰 스크린으로 보는 건 정말 특별했죠."
준호가 포스터를 함께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서울 올 때마다 꼭 들르는 곳이에요."
서연은 그의 말에 반가움이 묻어나는 시선으로 준호를 바라보았다. 공통점을 발견한 설렘이 느껴졌다.
준호는 티켓을 건네며 말했다.
"서연씨도 여기 자주 와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혼자 영화 보고 싶을 때."
"혼자?"
"네, 혼자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 뭔가... 온전히 그 세계에 빠질 수 있어서요."
준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그래요. 사진 찍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에요. 세상과 나 사이에 뭔가 투명한 막 하나만 있는 것 같은..."
서연은 그의 말이 정확히 이해된다는 듯 밝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로비에 잠시 맴돌았다.
두 사람은 작은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좌석은 많지 않았고, 관객도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토요일 낮, 대부분의 사람들은 쇼핑몰이나 카페에 있을 시간에, 이곳에는 고요함이 흘렀다.
자리에 앉으며 서연은 문득 책갈피가 생각났다. 준호가 준 책갈피를 오늘도 자신의 가방 속에 넣어왔다는 사실이. 그것은 마치 소중한 징표처럼 느껴졌다. 그를 만날 때마다, 그 작은 금속 조각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는 것 같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준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네, 이제 괜찮아요. 이렇게 잘 걸을 수 있게 되었잖아요."
"다행이네요."
준호의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안도감이 서연에게 전해졌다.
영화가 시작되고, 스크린에는 흑백의 세계가 펼쳐졌다. 프랑스 파리의 거리,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이 함께 걷는 모습. 서연은 화면에 집중하려 했지만, 자꾸만 준호의 존재가 의식됐다. 그의 숨소리, 미세한 움직임, 때로는 작은 웃음소리까지.
그녀의 작가적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깨어났다. '만약 이 순간을 소설로 쓴다면...' 서연은 생각했다. '어두운 극장에서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서로를 모르는 척하지만, 사실은 매 순간 상대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그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미묘한 설렘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서연은 문득 자신의 생각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편집자의 버릇이란.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말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다르게 흘러요."
그 대사를 들으며, 서연은 문득 옆에 앉은 준호를 바라보았다. 준호도 마침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서연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지만, 가슴속에서 작은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준호는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영화에서 벗어나 있었다. 방금 전 서연의 모습이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스크린의 빛에 살짝 비친 그녀의 옆모습. 순간적으로 마주친 눈빛에서 느껴진 수줍음과 따스함. 카메라가 없어도, 그는 자연스럽게 그 순간을 마음에 담았다.
직업병일까, 사진으로 담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사진 이상의 무언가였다. 어떤 카메라도 담아낼 수 없는 감정이 그 순간에 있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도시를 배회하며 점점 가까워졌다. 서연은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과 준호를 보는 듯했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짧은 시간 동안의 깊은 교감.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이별의 그림자.
영화가 끝나고 작은 극장의 불이 켜졌다. 서연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이 그녀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영화 속 여자가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 또는 알아보지 않는 척하는 듯한 그 모호한 장면.
두 사람은 영화관을 나왔다. 오후의 햇살이 여전히 밝게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봄 햇살은 여전히 극장 앞 벽돌길 위에 따스하게 깔려 있었다.
"오랜만에 이런 영화 보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지네요."
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요. 그냥… 감정들이 조금 느껴졌어요. 천천히, 진짜로 좋아하는 마음 같은 거요."
준호의 목소리에는 어떤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다시 천천히 광화문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그들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조금 더 걸을까요? 아니면… 가볍게 한잔할까요?"
준호가 물었다.
"좋아요. 천천히 마시면서 영화 얘기 더 해요."
서연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 근처에 괜찮은 포장마차 알아요. 영화 보고 나서 딱 어울리는 곳이에요."
둘은 조용히 광화문 뒷골목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나온 곳에는 소박한 포장마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비닐 천막 아래 오래된 테이블과 의자들, 빨간 불빛이 켜진 전구들.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아늑한 공간이었다.
포장마차에 들어서자 따뜻한 김과 함께 요리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시끌벅적한 주문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그리고 쫄깃한 어묵 굽는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테이블마다 설치된 빨간 백열전구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손때 묻은 비닐 천막이 바깥의 봄바람을 간신히 막아주고 있었다. 준호는 구석 자리를 가리키며 서연을 안내했다.
"여기 분위기 좋네요."
서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끔 촬영 끝나고 혼자 오는 곳이에요. 뭔가... 정리가 필요할 때."
준호는 미소 지었다. 서연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마음을 정리하는 자신만의 공간.
"소주 한 병이요, 그리고 어묵탕 하나요!"
준호가 사장님에게 주문했다. 어묵탕과 소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준호는 서연의 종이컵에 소주를 조심스럽게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