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자, 서연의 머리 위로, 그리고 준호의 어깨 위로 하얀 꽃잎들이 흩날렸다. 준호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서연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꽃잎을 살며시 털어주었다.
"꽃비가 내리네요. 좋은 날 이쁘게"
준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따뜻했다.
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시청역에서 만나 정동길로 향한 그들은 이미 30분 넘게 함께 걷고 있었다. 처음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이제는 편안한 침묵과 대화가 오갔다. 잠시 걷다가 준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서연 씨... 이번 봄소풍이 생각보다 좋네요."
서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 그런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봄바람이 살랑거렸고, 햇살은 따스했다. 그 순간, 그들은 알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봄소풍의 시작, 그리고 그들만의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라는 것을.
준호가 말했다.
"그때 곰 얘기하셨잖아요. 작년 겨울에 저도 혼자 트레킹 갔다 왔어요. 뉴욕 북쪽에 있는 애디론댁 산맥. 진짜 멋있었어요."
서연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짜요? 곰은 안 나왔어요?"
"곰은 없었는데..."
준호가 미소를 지었다.
"혼자 걷다 보니까, 사람보다 제 그림자가 더 무섭더라고요. 괜히, 서연 씨 생각났어요. 그때 혼자 걸으셨잖아요."
서연은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었다. 그가 자신을 생각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기뻤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말을 드디어 들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제가 얼마나 쓸데없이 용감했는지..."
서연이 작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봄바람에 실려 준호의 귀에 달콤하게 울렸다.
"와, 그때 진짜 패기 넘쳤죠. 멋있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요."
서연은 벚꽃이 흩날리는 돌담길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에 담긴 진심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리고 조금 더 천천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사실... 저 뉴욕 가려고 했었어요."
준호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눈빛은 멈추었다. 서연은 그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아쉬움을 놓치지 않았다.
"일도 정리하고, 한 1년 정도... 그냥 살아보려고요. 근데 출국 직전에 아팠어요. 간단하다곤 했지만 수술도 했고, 몸이 좀 많이 안 좋아져서."
"... 그랬군요. 전혀 몰랐어요."
준호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저도 괜찮아지면 말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뉴욕 출판기념회에 저를 대신해서 갔던 후배가 어떻게 전했는지... 저는 한국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고 간단히 전해달랬는데, 그냥, 다 엉켰죠. 다시 걸을 힘도 마음도 없었고요."
서연은 눈을 내리깔며 말끝을 흐렸다. 그 기억은 아직도 그녀에게 쓰라린 상처였다. 준호는 말을 잇지 않고, 그 말의 자리를 지켜주었다.
한참 후, 준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런 상황을 혼자 견디는 건..."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다.
"알았더라면 연락이라도 드렸을 텐데."
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준호의 눈에는 안타까움과 함께 따뜻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그 시선이 서연의 마음을 조금씩 열게 했다.
"괜찮아요. 이제는 많이 나아졌어요."
서연이 살며시 웃음을 흘렸다.
"오히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더 특별한 것 같아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로 지나가는 봄바람이 살짝, 그 말의 무게를 덜어주는 듯했다.
"그 산에선... 혼자였어요?"
서연이 화제를 바꾸듯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은근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네. 그냥 걷고 싶었어요. 혼자 걷는 동안, 문득 그때 서연 씨가 생각났어요."
준호의 말에 서연의 가슴이 다시 한번 뛰었다. 그가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쩌면 자신처럼 그도 그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설레게 했다.
"혼자 걷는 길, 생각보다 깊죠. 무섭기도 하고."
"맞아요. 그게... 나름의 정리였던 것 같아요."
준호의 말에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길을 걷는 것이 때로는 마음을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서연은 문득 그가 무엇을 정리했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자신에 대한 감정이었을까?
벚꽃이 다시 한번 바람에 휘날렸다.
"오늘 하늘이 정말 맑네요." 준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벚꽃도 정말 예쁘고요."
"맞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서연이 말문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벚꽃을 보면 저 꽃들이 떨어지는 게 슬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 짧게 피었다 지는 것 같아서요. 마치 인생의 어떤 순간들처럼요. 아름답지만 너무 짧아서 오히려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서연은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 이해해요."
"정말요?"
"네. 저도 비슷한 생각 해봤어요. 그게 꽃의 아름다움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인 것 같아요. 영원하지 않으니까..."
준호가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꺼냈다. 작지만 전문가용 미러리스 카메라였다.
"참,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준호가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카메라를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싶은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서연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요?"
서연이 잠시 망설이자 준호가 웃으며 덧붙였다.
"부담스러우시면 안 해도 돼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준호가 카메라를 꺼내 프레임을 잡기 시작했다.
"자, 이제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해 보세요."
그의 말에 서연은 갑자기 어색해졌다. 평소 카메라 앞에서 늘 느끼는 불편함이 몰려왔다.
"아, 제가 사진 찍으려고 서면 갑자기 로봇이 돼요."
서연이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준호는 카메라 뒤에서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모습이 제일 예뻐요.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순간, 갑자기 서연의 뒤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놀라 날아오르며 거의 서연의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으악!"
서연이 놀라 몸을 웅크리는 순간 준호의 카메라 셔터가 눌러졌다.
"어, 이것도 자연스러운 건가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 완벽하게 자연스러워요. 제가 이런 걸 '공포의 포착'이라고 부르는데요."
서연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제 인생 첫 포트폴리오는 '비둘기와의 위험한 만남'이 되겠네요."
준호가 다시 카메라를 들려다 벚꽃 잎을 밟은 건지, 갑자기 돌 위에 발을 헛디뎌 비틀거렸다. 그가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동안 카메라는 마치 곡예를 하듯 공중에서 춤을 췄다.
"작가님, 지금 현대무용 하시는 건가요?"
서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준호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카메라를 구했지만, 얼굴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음... 네, 새로운 예술 장르를 개척 중이었어요. '촬영 중 살아남기'라고 할까요?"
서연은 그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평소의 차분한 준호의 모습과는 달랐던 그 어설픈 순간이 더욱 그를 인간적으로 느끼게 했다.
다시 자세를 잡은 준호는 서연을 프레임에 담았다. 벚꽃 아래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눈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준호는 서연이 준비되기도 전에, 그녀가 미소 짓던 그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했다. 셔터 소리가 울리는 순간, 서연은 준호의 시선이 단순히 카메라를 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더 깊고, 더 따뜻한 무언가였다.
"잘 나왔나요?"
서연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짝 긴장감이 묻어났다. 준호는 카메라 화면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 나왔어요."
그 순간 준호의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산뜻한 남자의 향기와 살짝 섞인 봄의 냄새. 서연은 자신의 호흡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화면 속 그녀는 벚꽃 아래 서 있었고, 주변으로 꽃잎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사진에는 단순한 인물 사진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서연은 준호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그 사진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우와..."
서연이 놀란 듯 말했다.
"이게 저인가요? 마치 다른 사람 같아요."
준호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는 서연의 마음을 다시 한번 흔들었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서연 씨의 진짜 모습을 담았을 뿐이에요."
서연은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그 뭐죠? 여친렌즈? 그런 특별한 렌즈 써서 이렇게 예쁘게 나오게 한 거 아니에요?"
준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렌즈는 없어도 돼요. 저는 그것보다는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감정이 더 작동하니까요."
서연은 사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준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근했다. 그의 '마음의 렌즈'를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더 진실된 것처럼 느껴졌다.
"작가님 작품 속 인물이 되다니, 생각지도 못했네요."
"제가 더 즐거워요. 이런 순간을 담을 수 있어서."
준호가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의 눈빛은 깊고 진실했다.
서연은 그의 진심 어린 말투와 따뜻한 시선이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고 느꼈다.
"근데, 진짜 왜 서울 오신 거예요?"
서연이 갑자기 물었다. 그녀의 심장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준호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다큐 하나 들어갔어요. 도시재생 프로젝트인데 서울 쪽 로케이션 다시 잡고 있어요. 원래 제가 할 건 아니었는데, 일정 바뀌면서 갑자기 들어가게 됐어요."
"아, 그러니까... 저를 보러 오신 건 아니고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진짜 궁금함이 담겨 있었다. 준호는 웃으며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음... 반은 일 때문이고, 반은 개인적인 이유예요. 그중에서도 서연 씨를 다시 만나고 싶었던 마음이 제일 컸죠."
그의 대답에 서연은 눈을 반짝였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마음도 바람결에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 마음이 허락해 준 틈 같은 순간이었다.
"그런 셈이에요. 다시 한번, 서연 씨랑 걷고 싶었어요. 그냥... 그게 다였어요."
준호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마치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비밀을 말하는 것 같았다.
서연은 말없이 그와 나란히 걸었다. 벚꽃은 여전히 바람을 타고, 흩날리고 있었다. 걸음은 느리지만, 마음은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서연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 어디까지 걸으실 거예요?"
서연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도 조금은 담겨 있었다.
"음... 사실 영화 예매해 뒀어요. 광화문 쪽 작은 극장에."
서연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 만남을 위해 뭔가 준비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설레게 했다.
"정말요? 무슨 영화요?"
"옛날 영화예요. 흑백, 프랑스... '남과 여'라고. 서연 씨 좋아할 것 같아서요."
서연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가 자신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와, 저 그 영화 아직 못 봤어요. 좋아요. 같이 가요."
영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다음 만남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준호가 카메라를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
"다음에는 서연 씨가 좋아하는 장소로 가볼까요?"
"음..."
서연이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제 냉장고요. 거기가 제가 가장 자주 가는 장소거든요."
준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농담이에요."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한강공원이요. 특히 해 질 무렵 강변에 앉아 있는 시간이 좋아요. 세상이 잠시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준호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한강에서 해 질 녘에 만나요. 그리고 냉장고는... 조금 더 친해진 다음에 구경하죠."
둘은 돌담길을 벗어나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 위로는 여전히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준호는 자연스럽게 서연의 옆에 서서 걸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처음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 봄날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준호는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벚꽃이 떨어지는 돌담길, 햇살에 반짝이는 서연의 미소, 그리고 그들이 함께 걷는 그림자. 하나하나가 작품이 될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셔터 소리가 울릴 때마다 서연은 준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서연은 문득 준호의 말이 떠올랐다.
'카메라는 찍는 사람보다 찍히는 사람의 감정에 더 잘 작동한다.'
그렇다면 지금 준호의 사진 속에는 그녀를 향한 그의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일까? 그 생각에 서연의 가슴이 다시 한번 따스해졌다.
"이 길도 담아둘게요."
준호가 말했다.
"우리의 봄소풍 길."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라는 말이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웠다.
"네, 좋아요. 그리고... 다음에 또 걸어요, 이 길."
"다음엔 어떤 계절일지 모르겠네요."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어떤 계절이든 좋아요."
서연의 답변은 조용했지만 확신에 찬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가진 무게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계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그들이 함께할 시간에 대한 약속과도 같았다.
준호의 손가락이 우연히 서연의 손등을 스쳤다. 준호의 시선이 서연의 눈을 향했고, 그녀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둘 사이에 모든 말이 필요 없는 감정이 오갔다.
준호는 벚꽃 한 장을 조심스럽게 집어 서연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바닥을 스쳤다.
"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 손에 이렇게 내려앉기도 하죠. "
준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연은 손바닥의 벚꽃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꽃잎을 자신의 책 속에 넣었다.
"간직해 둘게요."
잠시 후, 준호는 조심스럽게 서연의 손을 잡았다. 서연은 그 손길에 놀랐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의 손을 가볍게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안정감을 주었다.
그들은 말없이 벚꽃길을 걸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전하는 법이다. 서연은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자신의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어, 잠깐만요."
준호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종이봉투였다.
"이거... 뉴욕에서 가져온 건데."
서연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봉투를 바라보았다.
"뭘까요?"
"그냥 작은 거예요.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셨으면 해서 작은 걸로 골랐어요"
준호가 봉투를 내밀었다. 서연이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작은 책갈피가 들어있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그 책갈피에는 벚꽃 한 송이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우와... 정말 예쁘네요."
"뉴욕에 있는 골동품 가게에서 찾았어요. 서연 씨가 책을 좋아하니까, 또 우리가 서점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준호가 설명했다.
서연은 책갈피를 손끝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근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준호가 살짝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건이요?"
"네, 책 읽을 때마다 제 생각해야 해요."
서연은 웃으며, 손에 꼭 쥐었다.
"그래요. 약속할게요."
그리고 그 순간, 봄날의 햇살과 벚꽃 향기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