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새벽, 서연의 출국일.
뉴욕의 하늘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호텔 주차장에는 여행자들의 차 몇 대만이 고요히 서 있었다. 준호는 그중 한 차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연락을 할까, 말까.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의 대화가 오갔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망설이다가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준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연이 오늘 떠난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무거웠다. 일요일 오후의 햇살 아래 나눈 대화와 웃음이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에서 생생했다. 책을 건네며 바라본 그녀의 눈빛, 함께 걸었던 거리의 느낌, 그리고 손이 스쳤을 때의 미세한 떨림까지.
그때, 호텔 입구 쪽에서 조깅 복장 차림의 서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동화를 바닥에 톡톡 두드리며 스트레칭을 하려던 서연이 준호를 발견했다. 그녀의 긴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얼굴에는 화장기 없이 맑은 표정이 담겨 있었다. 서연은 그를 보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어? 여기 웬일이에요?"
서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기쁨이 섞여 있었다.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준호는 당황하며 웃었다. 사실 그는, 전날 밤부터 서연이 떠나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새벽부터 여기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서연니 불편하지는 않을지 걱정했지만, 서연의 얼굴에는 의외로 반가움이 묻어났다.
"저야말로… 출국 전에 한 바퀴 뛰고 가려고요. 같이 가실래요?"
서연이 제안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새벽빛에 반짝였다.
"그럴까요? 뛰다 걷다 하면서요."
준호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기쁜 마음으로 동의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인도를 따라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는 차갑지만 상쾌했다. 거리는 조용하고, 도시의 소음은 아직 잠든 듯했다.
가로수들 사이로 늦가을의 노랗고 붉은 잎사귀가 그들의 발아래 쌓여 있었다. 달리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 함께 호흡하고, 같은 리듬으로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준호는 가끔 곁눈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간밤의 잠 부족이 무색하게 그녀는 생기 있게 달렸다. 그녀의 볼은 차가운 새벽 공기에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준호는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마치 이 새벽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잠시 후, 둘은 강가 쪽 산책로로 방향을 틀었다. 새벽빛이 퍼지는 강물 위로 크루즈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얀 선체 위로 불빛이 흐르고, 선상에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동쪽 하늘에는 희미한 새벽빛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 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물결치는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준호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눈빛은 깊이를 담고 있었다.
"저 크루즈… 참 이상하죠. 정박했다가 또 떠나고. 멈춘 듯 머무르지만 결국 흘러가는 거잖아요."
"네. 그래서 더 아름다울지도 모르죠."
서연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녀는 작게 미소 지으며 강물을 바라보았다.
"꼭 서연 씨 같은데요."
서연은 살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준호는 쑥스러운 듯, 강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의 프로필이 새벽빛에 실루엣처럼 보였다.
"찾아오고, 머물고, 떠나고. 무심한 듯하지만 사실 많은 걸 흔드는 사람."
서연은 말없이 웃었다. 그녀의 눈가에 깊은 감정이 머물렀다. 바람이 살짝 불어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자신이 이런 이미지로 그의 마음에 남아있다는 것이 그녀는 묘하게 감동스러웠다.
둘은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말은 없지만, 새벽의 공기와 함께 감정이 차분하게 스며들었다. 그들의 팔이 가끔 스치며 걸었고, 그때마다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조용히 몇 걸음을 걷다 멈춘 두 사람. 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준호는 서연 쪽으로 천천히 돌아섰고, 서연도 그 시선을 느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둘 사이엔 말 대신, 지난 며칠간의 기억들이 오갔다. 웃음, 풍경, 걷던 거리, 첫 만남의 어색함과 처음 함께 걸었던 단풍길, 서연이 들려준 캐나다에서의 모험 이야기, 준호의 "곰은 제가 맡을게요" 농담에 함께 웃었던 순간들. 함께 바라본 석양, 서로 무심코 스친 손끝의 느낌, 책을 건네며 나눈 미소까지.
준호가 조심스럽게 한 발 다가섰다. 그의 눈빛에는 망설임과 용기가 함께 있었다. 서연은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고, 서연은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두 사람의 손이 마주 잡히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이 전해졌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가슴 깊은 곳까지 퍼져나갔다.
준호는 서연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바닥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서연은 그의 손을 마주 꼭 잡았다. 그 작은 압력 속에 말로 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긴 새벽, 그리고 곧 떠날 아침. 그 순간만큼은 정박한 크루즈처럼, 그들은 손을 잡은 채 머물러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를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현실이 그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어느새 하늘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목. 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저... 혼자 공항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런 이별 순간들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요."
서연은 그 말을 하며 자신의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떠나야 한다는 현실과 머물고 싶은 마음 사이의 갈등이 엿보였다. 준호는 그녀의 망설임 속에 담긴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서연 씨가 씩씩한 거, 전 너무 좋아요. 근데…"
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나도 좀 생각해 줘요. 데려다 줄게요. 혼자 보낼 순 없어요."
그의 말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었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이.
서연은 한참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살짝 촉촉한 빛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그녀도 마음 한 켠으로는 이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말은 없지만, 거절하지 않은 그 고개 끄덕임에 준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 속에는 고마움과 아쉬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 라디오에선 잔잔한 재즈가 흘렀고, 둘은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별을 앞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런 공기가 차 안을 감쌌다.
준호는 라디오에, 서연은 창밖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들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순간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서연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뉴욕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저 낯설기만 했던 거리들이 이제는 특별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었다. 함께 걸었던 서점 거리, 커피를 마시며 웃음 지었던 작은 카페, 그리고 오늘 아침 손을 잡았던 강가의 산책로까지.
그녀는 문득 이 모든 곳이 자신의 일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이 장소들을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지, 그리고 이 장소들과 함께했던 그 사람을 얼마나 떠올리게 될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준호는 운전대를 꽉 쥐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맴돌고 있었다. '한국에 가도 연락해도 될까요?', '다시 뉴욕에 오실 거죠?', '기다려도 될까요?'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에는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가끔씩 옆자리의 서연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마다, 그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에프케네디 공항. 체크인 카운터 앞. 서연은 트렁크를 끌며 돌아서서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더 깊고 맑았다.
"우린… 너무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저는 돌아가야 하고, 여긴... 준호 씨가 있는 곳이고..."
서연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녀의 말은 단호하게 들리려 했지만, 그 안에 담긴 망설임과 아쉬움이 분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과 뉴욕에 남아있을 준호 사이의 거리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리는 그녀의 눈빛에는 확신보다는 고민이 담겨 있었다.
준호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 진지했다.
"서연 씨가 말한 가을운동회 말이에요. 그날 얘기했잖아요. 다 다른 사람들이 한 팀 돼서 뛰고, 넘어지고, 손뼉 치고. 그런 게 저는 좋더라고요."
그가 언급한 '운동회'는 그들의 관계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은유였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인지도 몰랐다.
서연은 잠시 멈칫했다. 준호가 자신의 말을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트렁크 손잡이를 꼭 쥐었다. 그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해, 고마움, 아쉬움, 그리고 작은 희망까지. 준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말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정말… 고마웠어요. 이곳에서의 모든 순간들이요."
서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말로 다 전하지 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 며칠이 그저 여행지에서의 짧은 만남이 아니라 그녀에게도 특별한 시간이었음을, 그 눈빛은 말해주고 있었다.
"저야말로요. 뉴욕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어요."
준호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의 미소는 따뜻했지만, 눈빛에는 깊은 그리움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서연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돌아서 출국장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 번 돌아본다면 결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뒤돌아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준호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을 흔들지도, 부르지도 못한 채. 말로는 다 하지 못한 것들, 전하지 못한 마음이 공항의 인파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는 서연이 남긴 여운을 고스란히 느끼며 서 있었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공항의 불빛 속에 점점 작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준호는 마치 자신의 일부가 함께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결연한 빛이 돌아왔다.
"잘 가요, 서연 씨. 다시 봐요. 진짜로."
준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에는 아쉬움도, 희망도, 그리고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의 한 장이 담겨 있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조용하고 분명한 확신이.
준호는 공항 주차장 한편, 차량 운전석에 앉아 쉽게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연이 준 책을 펼쳐보았고, 그 책의 페이지 사이에서 작은 메모를 발견했다.
"다음 가을에도, 그다음 가을에도."
준호는 미소 지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떠남 뒤에 올 재회를 기다리는, 그런 시작.
그는 차에 탄 후 잠시 핸들에 이마를 기댔다. 창밖으로는 가을의 마지막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켜 새 메시지를 작성했다.
'비행기 잘 타셨나요? 안전하게 도착하면 알려주세요.'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한 줄을 더 추가했다.
'가을운동회 준비,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다음엔 우리 우승해야죠.'
메시지를 보낸 후, 준호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에서는 서연이 좋아했던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뉴욕의 차가운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공기는 서늘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가을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을운동회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