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운동회] 어떤 시작

by 강마레

촬영을 마친 팀원들은 마을의 유일한 식당에 모였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과 벽난로가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창밖으로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고, 나무들의 실루엣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독이 건배를 제안했다.


모두가 잔을 들어 올렸다. 지역 특산품인 사과주는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났다. 서연은 잔을 들며 준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서연은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사과주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팀원들은 오늘의 촬영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연은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지만, 가끔씩 준호를 향한 그녀의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도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일찍 쉬는 게 좋겠어요."


한 팀원이 말했다. 서연은 그 말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이 순간이, 이 공간이, 이 분위기가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하나둘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연도 일어서려는데,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테라스에서 차 한잔 어떠세요? 오늘 밤하늘이 정말 맑네요."


서연의 심장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숙소 앞 테라스로 나왔다. 도시의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별들이 이곳에서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지만, 서연은 이상하게도 전혀 춥지 않았다.


"따뜻한 오렌지티가 향긋할 거예요."


준호가 두 개의 머그잔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서연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타이밍이네요. 감사합니다."


준호는 그녀 옆 의자에 앉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가깝게. 밤하늘 아래, 두 사람의 숨결이 차가운 공기 속에 하얗게 피어올랐다. 서연은 그들 사이의 거리가 적당하다고 느꼈다. 더 가까우면 어색할 것 같고, 더 멀면 아쉬울 것 같은 그런 거리.


"오늘 촬영 잘 된 것 같아요. 작가님도 만족하실 거예요."


서연이 말했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따뜻함이 온몸으로 퍼지는 걸 느꼈다. 차의 따뜻함일까, 아니면 준호의 존재감일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날씨도 완벽했고, 공기 감도 더 좋을 순 없었죠."


준호는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내일 아침 몇 시에 출발하죠?"


"아홉 시요. 아침 식사 후예요. 그래도 뉴욕에 도착하면 꽤 늦겠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서연은 오히려 이 고요한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멀리서 올빼미 소리가 들려왔다. 뉴햄프셔의 밤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도 자연의 소리가 살아 숨 쉬었다. 그리고 서연의 가슴속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설렘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준호가 문득 고개를 돌려 서연을 바라보았다. 별빛 아래 그녀의 윤곽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이렇게나… 별들이 선명하다니, 신기해요."


"네, 도시에서는 잘 볼 수 없으니까요. 매번 여행 올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게 돼요."


서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준호는 그녀의 미소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황급히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저도요. 별 보는 거... 좋아요."


다음 날 아침. 단풍길을 빠져나온 SUV는 다시 고속도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차 타이어가 아스팔트 위를 지나가며 내는 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서연의 귓가를 감쌌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어제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햇살은 길어지고, 나뭇잎은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은 점점 깊어지는 남색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간간이 구름이 지나가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라디오에서는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색소폰 소리가 차 안의 고요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묘한 감성을 자아냈다. 서연은 조수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석양빛이 유난히 선명했다. 준호는 운전에 집중하려 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했다.


"서연 씨, 뉴욕에 도착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시나요?"


준호가 천천히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아뇨, 휴가를 써서 월요일까지는 있을 예정이에요."


서연이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준호는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 시간이 끝나버리는 게 아쉬웠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길 위에서 나눈 대화들, 작은 웃음들, 그리고 서연의 맑은 모습이 전해오는 유쾌함까지. 모든 순간이 그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리… 일요일에 만날까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살짝 높아져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준호는 자신이 이렇게 긴장할 줄 몰랐다. 그저 단순한 제안일 뿐인데, 마치 인생이 걸린 질문을 던진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냥, 밥 한 끼? 아니면… 산책이라도."


서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어렸다. 준호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지만, 입가엔 살짝 긴장된 미소가 떠 있다. 자신이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서연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는다. 그녀의 미소에는 설렘과 기쁨이 함께 담겨 있었다.


"좋아요. 대신 이번엔 제가 곰 방울 없이 나갈게요."


준호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쳤다. '곰 방울'은 서연이 전해준 캐나다 트레킹에서의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두 사람에게도 서로만 아는 어떤 이야기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이네요. 뉴욕엔 곰 대신 제가 있거든요. 아주 안전하니까 곰 퇴치용 방울은 괜찮아요."


서연은 그의 농담에 깊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차 안에 가득 찼다. 둘 다 이 작은 약속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식사나 산책이 아니라, 어쩌면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요일 오후, 늦가을의 햇살이 맨해튼 거리를 따뜻하게 감싼다. 서연은 코트를 여미고 스트랜드 북스토어 근처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지난번과는 다른, 조금은 들뜬 표정이다. 그녀는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평소와 달리 옷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가벼운 화장도 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준호의 모습이 보인다. 두 손엔 커피를 들고 있었다. 서연은 그가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옷을 입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모습이 보이자 서연의 심장은 조금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렸죠?"


준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이런 상황이 그에게도 의미 있다는 증거였다.


"아니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서연이 커피를 받아 들며 말했다. 손이 스치는 순간, 둘 다 짧은 전율을 느꼈다.


"고마워요."


이야기를 나누던 서연은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한 권의 책을 꺼낸다.


"이거… 제가 여행 중에 읽은 책이에요. 한국어 책 여기서 구하려면 번거롭잖아요. 전 재미있게 봤어요. 준호 씨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준호는 뜻밖의 선물에 조금 놀라며, 조심스럽게 책을 받아 든다. 그의 손길에는 그 책이 마치 보물처럼 소중하다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런 거… 진짜 오랜만이에요. 꼭 읽어볼게요."


그의 목소리에는 감동이 묻어났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런 마음을 써줬다는 것이 그에게는 특별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붉고 노란 가을잎이 바닥을 물들인다. 책을 손에 든 준호는 그 무게보다 마음이 더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웠다. 때로는 팔이 스치기도 했지만, 어색하게 거리를 두려 하지 않았다.


"여행 같아요. 짧은, 아주 조용한."


서연의 말에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죠. 조용한 여행이 오래 기억되니까."


서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둘은 서점 거리와 카페 골목을 천천히 걷는다. 말이 많지는 않지만, 그 침묵조차 편안하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또는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특별한 사이처럼.


준호는 가끔 서연을 바라보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그에게는 하나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서연 씨에게 궁금한 게 있어요. 오늘 하루가 끝나기 전에 묻고 싶었어요. 혹시… 뉴욕에 올 생각 있으세요?"


조심스러운 준호의 질문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서연도 그것은 다음 달에 있을 출판기념회나, 단순한 뉴욕 방문 계획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있어요. 아직 다 못 걷고 간 것 같아서요."


서연의 대답에도 이중적 의미가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다음엔 같이 더 많이 걸어요. 트레킹도 하고, 가을 햇살도 받고."


준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린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서연 씨는 어떤 사람 좋아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연은 잠시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짧은 고민 후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밝고 맑고 신나고 활기찬 사람? ‘가을운동회’ 같은 사람이요."


"와, 우리 운명인가 봐요." 준호가 눈을 크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넘쳤다.


"네?"


"우리 아버지 체육 선생님이셨거든요. 저는 가을운동회 전문가의 아들입니다."


둘은 한참 웃는다. 그 웃음 속에는 설렘과 기대,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시간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었다.


"초대받았으니까, 고민해 볼게요."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투와 표정은 이미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준호는 그 답을 읽었고, 그의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가을의 끝자락, 두 사람의 마음은 새로운 계절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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