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도심을 출발한 지 5시간이 남짓 지나고 있었다. 맨해튼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타고 북동쪽으로 300마일 가까이 달려온 긴 여정이었다.
처음에는 잠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도 어느새 편안한 침묵 속에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준호는 운전에 집중했고, 서연은 창밖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빽빽한 건물들이 점차 줄어들고, 작은 마을들과 농장을 지나치며 풍경은 서서히 변해갔다. 처음에는 드물게 보이던 단풍나무들이 코네티컷을 지나 매사추세츠를 거쳐 뉴햄프셔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빽빽해졌다. 마치 자연이 펼쳐놓은 그라데이션을 따라가는 듯했다.
장거리 운전의 단조로움 속에 시차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서연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몇 번 고개를 까딱이다가 결국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가늘게 숨을 내쉬는 서연의 모습을 곁눈질로 본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잠든 얼굴이 귀엽네...'
아무도 보지 않는 이 순간, 준호는 조금 더 길게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가을 햇살이 창문을 통해 비치며 서연의 얼굴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하지만 30분 남짓 지나 서연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잠결에 어디인지 몰라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준호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움푹 패인 길이 나와서..."
준호가 말했다.
"아, 저... 죄송해요. 잠이 들었네요."
서연은 머쓱한 듯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녀의 귓가가 살짝 붉어진 것이 준호의 눈에 들어왔다.
"시차 적응이 아직 안되었을거예요. 괜찮아요, 아직 한 시간 정도 더 가야 해요."
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잠을 쫓으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비스듬히 몸을 돌려 앉으며 준호에게 눈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샴푸 향이 퍼져나왔다. 준호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이런 장거리 운전은 좀 힘들거 같아요."
서연의 질문에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졸음과 싸우며 대화를 이어가려는 모습 때문이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 따뜻함이 묻어났다.
"도심보다는 교통량이 많지 않아서…"
준호는 서연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눈이 다시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라디오의 볼륨을 살짝 낮추고 차의 온도를 조금 더 따뜻하게 조절했다.
SUV가 작은 다리를 건너고, 이내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었다. 자갈길 위로 타이어가 지나가며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창밖으로 점점 더 짙어지는 단풍의 향연이 펼쳐졌다.
뉴햄프셔의 가을은 그 어떤 그림이나 사진으로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어느새 깨어난 서연은 살아온 서울의 가을도,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도 보지 못한 압도적인 색채의 폭발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마치 온 세상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붉은색과 황금색, 짙은 오렌지색이 끝없이 이어지는 숲은 마치 살아 숨쉬는 유기체처럼 바람에 일렁였다. 가끔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춤추듯 떨어지는 수많은 잎사귀들은 마치 자연이 만들어내는 예술 작품 같았다.
깊은 숲은 가끔 틈새로 비치는 햇살에 신비롭게 빛났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촘촘히 자란 나무들은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듯했다. 층층이 쌓인 낙엽들은 발아래서 바스락거리며 독특한 가을 향기를 내뿜었다. 숲의 음영은 깊고, 색채는 강렬했다. 그 완벽한 조화 속에서 서연은 자신이 어떤 위대한 시간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을바람이 창문을 통해 불어오며 서연의 뺨을 간질였다. 그 차가운 공기에는 마른 낙엽과 이끼, 그리고 어딘가 먼 곳에서 피어오르는 장작불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나무 사이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이고, 이내 조그만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듯한 오래된 헛간과 이끼 낀 나무 울타리, 작고 아담한 카페 하나, 그리고 이번 사전 촬영의 주요 장소인 출판기념회 배경의 돌로 지어진 건물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오래된 나무 그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연못까지, 마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풍경이었다.
"와... 진짜로 책 속 마을 같아요."
서연은 차창에 이마를 살짝 대며 감탄했다. 숨이 막힐 듯한 아름다움에 그녀의 목소리는 저절로 작아졌다. 해외문학 담당 편집자로서 그녀가 맡은 이 소설은 특별했다. 작가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더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출판기념회 영상을 위해 이곳까지 왔지만, 실제로 보니 소설 속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 속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곳이 실제로 존재하다니... 출판사에 있을 때는 항상 책으로만 여행했는데."
서연의 말에는 기쁨과 동시에 약간의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 마치 평생 책 속에서만 살아왔던 사람이 드디어 그 세계를 직접 마주한 듯한 감정이었다.
"작가가 실제로 여길 모델로 삼았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와보니까 왜 그런지 알겠죠?"
준호의 말에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착해 있던 촬영팀이 장비를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왔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두 사람의 발끝을 감쌌다. 햇볕은 따뜻했지만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가을 특유의 상큼한 풀냄새와 무르익은 과일 향이 섞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곳곳에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바닥을 수놓았고, 멀리서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들이 발아래서 바스락거렸다.
"공기가 다르네요. 묘하게 조용한데, 꽉 차 있는 느낌."
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느끼는 도시 밖의 공기에 몸과 마음이 깨어나는 듯했다.
"여기선 마음도 좀 조용해지더라고요. 뉴욕에선 없던 느낌이랄까..."
준호의 목소리에는 이 장소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서연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낯선 매력을 발견했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준호는 더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서연은 잠시 준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나란히 서서 가을빛이 내려앉은 그 마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다음날 아침 9시, 촬영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출판기념회에서 상영할 영상을 위한 것이라 현장을 오롯히 보여줘야 했다. 촬영팀은 장비를 설치하고 리허설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준호는 로케이션 디렉터로서 동선을 점검하고, 감독과 조율하며 자연광이 가장 아름답게 들어오는 구간을 체크했다.
"이 각도에서는 안 됩니다. 두 시간 후면 햇빛이 저쪽으로 옮겨가요."
준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장비를 옮기도록 지시했다. 그는 태블릿을 열고 미리 준비한 위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움직이며 중요한 지점들을 가리켰다.
"이 창문은 오후 중반에 가장 좋은 자연광이 들어옵니다. 그때 이 장면을 촬영하면 작가님이 원하는 분위기가 나올 거예요."
감독과 촬영팀은 준호의 안목에 신뢰를 보였다. 그는 이어서 건물 구조도를 펼쳐 보이며 각 공간의 특성을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묻어났고, 모든 면을 고려하는 꼼꼼함이 돋보였다.
"이 지역 건물들은 180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들이 많아요. 벽 두께가 현대 건물과 달라서 음향 반사율이 독특합니다. 여기서 촬영할 때는 마이크 위치를 조금 더 낮게 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서연은 준호의 조언을 듣고 있다가 눈빛이 반짝였다. 단순히 장소만 물색하는 것이 아니라 빛, 소리, 공간의 역사까지 고려하는 그의 접근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이런 전문성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더 알고 싶어졌다.
"이 부분은 소설의 첫장면과 연결되는 장면이에요. 작가님이 특별히 강조하신 부분인데,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느낌이 중요해요."
서연은 스토리보드를 가리키며 감독에게 설명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페이지 위를 능숙하게 움직였다.
한편, 준호는 잠시 그녀의 출판 편집자로서의 안목과 작가의 의도를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에 탁월하다고 느꼈다. 작업에 몰두하는 서연의 모습에서 새로운 매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영상으로 잘 나오면 책의 메시지가 더 강렬하게 전달될 거예요."
촬영팀이 그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만족한 표정으로 다음 장면 구성을 위해 이동했다. 그런 그녀를 잠시 멀리서 바라보던 준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 일할 때 더 단단해 보이네. 그러면서도 웃는 게 참 밝다. 모두가 유쾌해지는 것 같아.'
오전 11시,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짧은 공백 시간이 생겼다. 조명과 음향 점검으로 모두 자리를 비운 순간. 서연이 카메라 옆의 벤치에 조용히 앉아 쉬고 있었다. 준호가 옆에 다가왔다.
"여기 앉아도 돼요?"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종이컵이 들려 있었고,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 뜨거운 커피 향이 차가운 공기 속에 퍼져나갔다.
"물론이죠. 오늘 하루가 길게 느껴져요."
서연은 커피를 받아들며 옆으로 자리를 내주었다. 벤치는 오래된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고, 앉으면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따뜻한 커피잔을 감싸 쥐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촬영 준비로 피로가 몰려왔지만, 주변의 풍경이 그 피로를 씻어내는 듯했다.
"낯선 데 오면 원래 시간이 천천히 가죠. 익숙하지 않아서."
준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의 온화한 눈빛에 서연은 그가 이런 자연 속에서는 도시에서보다 더 편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잠시 준호의 옆모습을 살폈다. 각진 턱선과 긴 속눈썹, 그리고 가끔씩 눈가에 잔잔하게 번지는 웃음 주름. 이런 세세한 부분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저 사실... 출장 오기 전에 캐나다 다녀왔어요. 일주일간 트레킹하느라 매일 새벽에 일어나고, 바닷가 절벽 따라 걷고, 비 맞고 넘어지고..."
그녀는 손바닥을 펼치며 아직도 남아있는 작은 상처 자국을 가리켰다. 그 상처는 마치 트로피처럼 자랑스럽게 보였다. 서연의 눈빛이 갑자기 반짝였다. 마치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런데 그 숲에서, 실제로 곰을 만났어요. 멀리서였지만."
말을 하는 그녀의 손이 공중에서 작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보다는 그 순간의 강렬함을 떠올리는 듯한 떨림이었다.
"그 순간 모든 소리가 멈춘 것 같았어요. 그냥 조용히, 무섭지도 않고...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죠.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고, 그 빛에 서연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그 모습에 준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모험심과 용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혹시 WCT요?"
준호가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네… 어떻게 알았어요?" 서연은 놀란 듯 물었다.
"전에 가려다 포기했거든요. '태평양의 무덤'이라 불리는 해안이라는 걸 알고 겁이 났어요. 그리고 연이은 수직 사다리들... 어떤 구간은 수십 미터를 한번에 올라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준호는 머쓱한 듯 웃었다. 그의 눈빛에는 진심 어린 감탄이 담겨 있었다.
"근데 곰 만났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요. 서연 씨... 진짜 대단한걸요."
준호의 감탄에 서연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다시 커피를 홀짝이며 시선을 돌렸다.
"나중에는 곰보다 몬스터가 무섭거라구요… 18kg짜리 제 배낭이예요. 그래도 그 길 걷는게 뭔가 좀 변한 기분이에요. 아주 조금이지만."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감정이 묻어 있었다.
"사람을 바꾸는 건 항상 그런 조용한 경험들이죠. 아주 조금씩."
준호의 말에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뭇잎 하나를 손에 쥐었다. 바람이 불었다. 준호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잠시 말없이 그렇게 단풍 속에 둘은 앉아 있었다. 공유된 침묵이 묘하게 편안했다.
"그런데 준호 씨는 어떻게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온 것 같은데."
서연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준호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나름의 모험을 했죠. 한국에선 복잡한 사무실과 끝없는 업무에 둘러싸여 있었어요. IT 기업에서 시스템 구축, 밤샘 개발, 보고서... 그런 일들이요."
준호의 목소리에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복잡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오, 완전 딴 세상이었겠네요. 그래서 그걸 그만두고 뉴욕으로?"
"네. 친구가 뉴욕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했는데, 잠깐 도와주려다... 십년이 지났네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의 목소리에는 아득한 향수와 함께 결단의 흔적이 느껴졌다. 서연은 그의 표정에서 지나온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진 않았어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진솔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그때의 저는 없을 것 같아서요. 여기는... 그냥, 제 리듬대로 살 수 있거든요."
준호가 말했다. 그의 눈빛은 멀리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서연은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의 길을 찾아 걸어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책 속에서만 찾던 모험을 준호는 실제로 해낸 것인지도 몰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준호는 생각에 잠긴 듯 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그리고 사실... 미국에도 좋은 산 정말 많아요. 애팔래치안 트레일, 로키 산맥, 시에라 네바다, 요세미티도 있고. 저도 아직 다 못 가봤는데..."
준호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같이 가볼래요?. 제가 가이드 해드릴 수 있고... 뭐, 곰은 제가 맡고요."
준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과 함께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서연은 살짝 웃었지만, 그 안에 아주 잠깐의 당황과 설렘이 스쳤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가슴 한 켠에서 따뜻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같이 간다니. 이 사람과 다른 계절에 다른 장소에서... 왜 그런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하는거지...'
하지만 이내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음... 생각해볼게요. 체력이 남아 있다면요."
서연의 말에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가을 공기를 타고 멀리 퍼져갔다.
오후 2시, 햇살이 가장 아름답게 들어오는 시간이 되자 촬영은 본격화되었다. 준호의 예측대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완벽한 각도를 이루었다. 카메라를 든 촬영 감독은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고, 조명 담당자는 준호가 조언한 대로 반사판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빛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이 위치가 좋을 것 같습니다. 사운드 체크도 마쳤고, 벽체 반사음도 확인했어요."
준호가 감독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의 손에는 태블릿이 들려 있었고, 화면에는 공간 구조와 음향 데이터도 표시되어 있었다. IT 배경지식을 활용해 현장의 조건을 분석하는 그의 방식이 특별했다.
"이 장면은 한 번에 정확하게 나와야 해요."
감독의 말에 모두가 긴장했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며, 낡은 책장과 테이블 위에 황금빛 무늬를 그렸다.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며 그 순간을 담아냈다.
"컷! 완벽해요."
감독의 외침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준호는 그 미소를 보며 내심 따뜻함을 느꼈다. 작업에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매력적이었다.
특히 서연이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구현한 장면을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순간, 준호는 그녀의 직업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출장 업무가 아닌, 작품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오후 5시, 해가 서서히 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했다. 오렌지빛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치며 마을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서연은 마지막 촬영 컷을 확인하고 나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어깨가 저절로 축 늘어졌다.
'이제 뉴욕으로, 출판기념회는 다음 달 초...'
서연은 머릿속으로 남은 일정을 정리했다. 촬영 이후에는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문득 이 가을 풍경과 함께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조금은... 준호와의 이 순간이 그저 스쳐가는 인연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묘한 허전함이 느껴졌다.
준호는 그녀에게 물병을 건넸다. 그들의 손이 스치는 순간, 짧고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서연은 물을 마시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석양 빛에 반짝였다. 하루 종일 완벽한 장소와 각도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던 그의 노력이 눈에 선했다.
"고마워요, 오늘."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뭔가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미소가 모든 말을 대신했다. 바람이 불어와 서연의 머리카락을 살짝 흩트렸다. 준호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려다가, 문득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려는 건지 깨닫고 손을 멈췄다. 순간적인 충동에 당황한 그의 눈빛이 서연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 찰나의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무언의 감정이 가을 공기 속에 맴돌았다. 그들 주변으로 낙엽이 춤추듯 떨어졌고, 멀리서 팀원들이 장비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모든 소리는 마치 먼 배경음악처럼 희미했다.
준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제 모든 촬영이 끝났다. 다음은 무엇일까? 그는 서연이 곧 서울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무거워졌다. 오늘 하루, 이 가을 속에서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이제 뭐가 남았죠? 출판기념회가... 다음 달 초였나요?"
준호의 질문에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이 끝난 안도감과 함께 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네, 그때 다시 뉴욕에 올 거예요. 짧게지만."
서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짝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그럼... 그때 또 만날 수 있겠네요."
준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뉴햄프셔의 단풍은 멀리서 바라본 것보다 가까이서 볼 때 더 선명했다. 마치 그녀의 감정처럼.
"그때까지 애팔래치안 트레일 가이드북이라도 읽어둘게요."
서연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준호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그들 주변으로 낙엽이 춤추듯 떨어졌고, 단풍나무 사이로 비치는 석양이 두 사람의 실루엣을 붉게 물들였다.
촬영은 끝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