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준비로 분주한 목소리들 사이로 서연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스트랜드 북스토어 2층 행사 공간은 이미 아침부터 활기로 가득했다. 카메라와 조명 장비들이 서점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대비되어 어색하게 놓여 있었다.
서연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꾸벅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 위에는 소개할 책들과 촬영 시나리오, 스토리보드가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서점의 자연광이 테이블 위 종이들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팀원들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팀장님!"
서연은 밝게 웃으며 스텝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며 자연스럽게 촬영장 분위기를 살폈다. 카메라, 조명, 마이크…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듯했다. 촬영팀은 장비를 정리하며 내부 동선을 점검하느라 분주했다.
"아, 서연 팀장님."
촬영 PD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저기 오늘 로케이션 담당이세요. 어제 서점 미팅도 대신해 주셨고요."
그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서연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서점 한켠에서 노트를 넘기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어제 그 남자였다. 바로 어제, 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사람. 그 조용히 인사하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시 눈앞에 서 있었다.
"어… 어제 서점에서…"
서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준호 역시 그녀를 발견하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동그랗고 따뜻한 눈빛이 반짝였다.
"아, 정말 신기하네요."
둘은 조금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인사했다. 서연은 잊고 있었던 어제의 그 설렘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직장인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건 그저 업무일 뿐이니까.’
잠시 후, 촬영팀은 카메라 설치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 갑자기 둘만 남겨진 공간에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준호가 먼저 그 어색함을 깨뜨렸다.
"어제는 몰랐네요. 같은 팀이실 줄은."
그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서연은 가슴속에서 쿵쾅거리는 심장의 존재감을 애써 누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뉴욕이 의외로 좁은 동네인가 봐요."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이 큰 도시에서 두 번이나 만나다니."
준호는 보조개가 살짝 보이게 미소 지었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완벽한 타이밍이네요. 이런 걸 뭐라고 부르죠?"
가볍게 웃으며 넘기는 서연의 표정 뒤에는 복잡한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낯선 도시에서 두 번이나 마주친 그 사람. 서연은 무심하게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이게 다일 거야. 이런 도시에서의 '우연'은, 다음날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까.'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접었다. 업무에 감정을 섞는 건 꼬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멀리서 들려오는 팀원들의 말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씩씩한 톤으로 말했다.
"저쪽 조명 반사 좀 확인해 볼까요?"
준호는 그녀의 빠른 전환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갔다. 그 순간, 서점 창밖으로 뉴욕 가을 햇살이 살짝 기울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서연은 자신의 그림자와 준호의 그림자가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모습을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그날 저녁, 서연은 호텔 창가에 기대어 뉴욕의 밤을 바라보았다. 뉴욕의 밤은 낮보다 훨씬 화려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빌딩들의 불빛이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오늘 촬영 현장에서 준호와 나눈 대화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출판기념회 준비를 위한 이번 출장이 단순한 업무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준호.
테이블 위에는 내일 일정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뉴햄프셔행. 가을 단풍이 절정인 시골 마을로의 촬영 여정. 그리고 그 일정을 준호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냥 업무일 뿐이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촬영 때 무심코 들었던 준호의 말이 떠올랐다.
"매일 모니터만 보던 개발자에서 이렇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인생이란 참 예측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바라볼 때 달라지는 그의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창밖 어둠 속에서 별빛처럼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내일의 여정을 암시하는 듯했다. 서연은 깊은숨을 내쉬며 창을 닫았다. 내일은 일찍 출발해야 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서연의 뺨을 스쳤다.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잠을 설친 후,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고층 호텔 로비에서 그녀는 어둠 속에서 빛나던 맨해튼의 야경이 아침 햇살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젯밤 창밖으로 바라봤던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희미해지며 대신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햇살이 길게 드리우는 맨해튼의 거리는 평소와 다른 고요함이 감돌았다.
촬영팀은 무거운 장비들을 차량에 실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뉴햄프셔 깊은 시골, 작가의 소설 속 배경이 된 마을로 향하는 날이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서연은 여행용 백팩을 어깨에 메고, 아침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고층 건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때, 양 손에 커피를 들고 다가오는 준호가 보였다. 어제보다 더 편안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서연은 무심코 미소 지었다.
"일찍 나오셨네요."
서연의 물음에 준호는 따뜻한 미소로 답했다.
"잠이 잘 안 오더라고요. 설레서 그런가..."
그는 말끝을 흐리며 커피 한 잔을 서연에게 건넸다. 서연은 망설임 없이 받아 들었다.
"현장 분위기가 좋아요. 다들 기대 중이죠."
그녀의 눈빛에는 열정이 담겨 있었다. 준호는 잠시 그녀의 눈빛에 빠져들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셨군요?"
"네, 작가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매력적이었어요. 제가 찾은 장소들이 글에 담긴 감정을 전달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어요."
준호의 말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잠시 후 촬영팀 PD가 다가와 두 사람에게 일정을 브리핑했다.
"배터리 체크가 좀 더 남았어요. 두 분은 SUV 차량으로 먼저 출발하시고, 저희 촬영팀은 장비 확인하고 뒤따라갈게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키를 받아 들었다. 서연의 마음이 살짝 긴장되었다. 몇 시간을 그와 단둘이 차에 타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묘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차에 오르기 전, 서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뉴욕의 하늘보다 조금 더 짙은 파랑이 느껴졌다. 계절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완벽한 가을이네요."
서연의 한마디에 준호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뉴햄프셔는 지금쯤 단풍이 절정일 거예요. 작년 가을에 촬영차 갔었는데, 그때 본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계절마다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죠."
준호의 말에 서연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출장인 동시에 작은 모험 같은 이 여정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준호 역시 설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여정은 늘 특별해요. 마치... 일을 하면서 여행하는 것 같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 같달까."
둘은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서연이 앞 좌석에 편안히 앉자, 준호는 부드럽게 시동을 걸었다. 서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젯밤 창가에서 바라본 도시의 불빛들이 이제는 멀어지고 있었다.
"음악 들을래요?"
준호가 물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서연은 그가 즐겨 듣는 음악이 궁금했다.
"좋아요. 뭐 있어요?"
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부드러운 색소폰 선율이 차 안을 채우자, 서연은 저절로 눈을 감았다. 차가 맨해튼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창밖으로 점점 빽빽해지는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봐요."
준호가 앞쪽을 가리켰다.
"이제 진짜 뉴잉글랜드가 시작되는 거예요."
고층 빌딩들과 분주한 거리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고, 대신 울창한 숲과 자연이 그들을 반겼다. 도심의 풍경이 사라지고, 가을의 숲으로 서서히 진입해 갔다. 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서울에서의 일상, 그리고 뉴욕의 분주함까지 모두 뒤로하고, 이제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와!"
서연이 경탄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다니."
서연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준호는 운전대를 잡은 채 그녀의 옆모습을 살짝 훔쳐보았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그녀의 표정에 준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 여정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리고 그녀와의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가을 단풍처럼 아름다운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잠시 운전에 집중하던 준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여행 좋아하세요?"
"음... 좋아하죠. 하지만 일과 겹치는 경우가 많아서 순수한 여행은 드문 것 같아요."
서연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그래서 이런 출장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요. 일도 하면서 새로운 곳을 볼 수 있으니까."
준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가을은 특별해요. 한국에서도 좋지만, 특히 이곳의 가을은..."
그의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났다. 서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사진작가로도 활동하신다던데, 오래됐어요?"
"대학 때부터 카메라를 들었으니까... 20년 가까이 됐네요. 처음엔 풍경사진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출판 프로젝트나 인물 작업도 많이 해요."
그들은 일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어색함을 조금씩 풀어갔다. 준호는 잠시 침묵 속에서 운전에 집중하다가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그런데... 이번 촬영 끝나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서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뇨, 며칠 더 있을 예정이에요. 오랜만에 온 뉴욕이라..."
"좋네요."
“네?”
“서연 씨가 좋겠다고요”
준호는 덤덤하게 반응했지만,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맴돌았다.
차창 밖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가을의 색채가 선명하게 펼쳐졌다.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이 어우러진 단풍 숲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서연도, 준호도 문득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설렘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이 짧은 가을 여정이, 이 낯선 단풍 길이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창밖으로 스치는 바람처럼 두 사람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