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운동회] 뉴욕 출장이라뇨?

by 강마레

뉴욕 맨해튼, 스트랜드 북스토어(The Strand Bookstore).


서점 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간질이는 독특한 향기가 번졌다. 오래된 종이와 고풍스러운 나무 서가에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냄새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 특별한 내음이 서연을 반겼다. 천장 높은 곳까지 빼곡히 쌓인 책들 사이로, 오래된 목재 바닥이 살짝 삐걱거리며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을 드러냈다.


서점 안으로 한 발짝 더 들어서는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가을 햇살이 책 표지들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서연은 스물 여섯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책 냄새와 함께 십 년 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신입사원을 갓 땐 서연은 오랫동안 소원하던 뉴욕에 배낭 하나 메고 무작정 찾아왔었다.


그때의 서연은 세상의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불안과 설렘이 공존하던 시절, 미래가 무한히 펼쳐진 것만 같던 그 순간들. 모든 문이 열려 있는 듯했고,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던 그 나이. 서연은 이십대 중반이었던 자신이 삼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열정은 여전했지만 그 모서리가 조금 부드러워진 느낌.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은 줄었지만, 동시에 가능성의 범위도 현실의 경계 안으로 조금씩 좁혀진 지금.


서연은 늘 밝고 활기찼지만, 혼자 있을 때면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알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명랑하게 웃고 떠들지만, 책과 함께 있을 때는 또 다른 내면의 서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 깊고, 더 조용하며, 때로는 더 외로운 자신. 십 년이 지났지만, 이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다시 그 이십대의 감성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서연은 맑은 표정으로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앞머리가 이마를 스치고, 어깨에 살짝 걸친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마다 반짝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책등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멈칫, 손가락이 한 권의 책 앞에서 멈췄다.


‘Beyond the Autumn Sky’


서연은 눈을 크게 떴다. 다음 달 그녀의 회사에서 한국어판 출간을 앞두고 있는 작가의 신간이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출간되어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을 검토 중인 책이었다. 서연이 작업 중인 책이 얼마나 이슈가 될지, 책은 얼마나 팔릴지에 따라 이 책의 출간도 결정될 것이다. 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책을 꺼냈다.


"역시 여기 있었네..."


그녀는 해외문학 담당 편집자로서 관심 있는 저자의 신간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책장을 넘기며 영어 원문으로 읽는 재미에 빠져 있을 때였다.


"Do you happen to carry the rest of this author's books as well?"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유쾌한 목소리. 서점 직원과 대화 중인 한 동양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연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창한 영어 발음에 살짝 묻어나는 한국 억양.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봤다.


키가 꽤 큰 남자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자연스레 흘러내린 앞머리와 해사한 얼굴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른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직원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마치 오랜 지인과 대화하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서연이 다시 책에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그 남자 역시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며 서연을 발견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짧게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서점의 소음이 갑자기 희미해졌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발걸음 소리, 낮은 대화 소리가 모두 멀어지는 듯했다.


서연은 그 눈빛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단순한 시선 교환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수천 권의 책들 사이에서, 수많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발견한 낯선 친밀감. 그녀는 이 도시에서 그저 또 하나의 익명의 얼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이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서연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한국인에게 건네는 친근함이었을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였을까. 서연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잠시 자신의 반응이 너무 솔직한 건 아닌지 의식했다. 남자도 살짝 웃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그의 표정에서 서연만이 알아볼 수 있는 미묘한 인식,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무언의 확인이 스쳐 지나갔다.


서연이 다시 책에 집중하려 했지만, 시선 끝으로 그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조심스러운 한국어. 평소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는 듯 보이던 그의 목소리에 묘한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서연이 밝고 씩씩한 미소로 고개를 돌렸다.


"아, 네! 한국분이시구나."


서연의 대답에 긴장감이 감돌던 남자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저는 여기 살고 있고요. 요즘 진행 중인 작업 때문에 이 서점에 자주 와요." 남자는 손에 든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련된 손목시계가 그의 단단해 보이는 손목에서 반짝였다.


"저는 출장 왔어요. 뉴욕은 오랜만이라 설레네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그녀의 사교적인 면모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서연의 밝은 표정과 명랑한 말투에 남자는 호기심이 생긴 듯했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자연스럽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


"스트랜드 서점을 들르신 걸 보면, 뉴욕을 좀 아시나 봐요?"


"예전에 여행 왔었어요. 꼭 다시 와보고 싶었는데... 벌써 10년 전 일이네요."


말을 마치자 그녀의 얼굴에 잠시 어떤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둘 사이에 짧고 어색한 웃음이 오갔다. 말을 더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듯했지만, 남자는 조심스럽게 물러서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아, 제 이름은 서준호예요. 여기서 로케이션 디렉터로 일하고 있어요."


말하고는 왜 그런 정보까지 말했는지 스스로도 의아한 듯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한서연입니다."


그녀는 밝게 대답했다.


"로케이션 디렉터요? 흥미로운 직업이네요."


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이것저것 찍는 일이죠."


그는 위트 있게 말했지만, 어딘가 수줍은 기색이 묻어났다.


"그럼 출장 업무 잘 보시고요, 좋은 여행 되세요."


준호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어딘가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서연은 환한 표정으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준호가 천천히 서점을 나서자, 서연은 다시 책장을 넘겼다. 손가락이 종이 위를 훑었지만, 눈앞의 단어들은 그저 의미 없는 잉크 자국일 뿐이었다. 머릿속에는 방금 전 대화가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서준호, 로케이션 디렉터...'


서연은 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낯선 곳에서의 짧은 우연한 만남. 몇 분에 불과했지만, 담백하고 따뜻했던 그 순간이 마음속에서 뭔가 몽글거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은은한 울림, 말할 때마다 살짝 움직이던 입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따뜻한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책을 읽으려던 서연의 의지는 희미해진 지 버렸다. 잠깐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방금 전 만남을 되새겼다. 집중하려고 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미세한 미소가 서연의 입가에 번졌다. 그리고 곧,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로맨틱한 건 이미 그만두기로 했잖아...'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캐나다 트레일에서의 그 결심이 불과 2주 전이었는데. 서연은 잠시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떨쳐냈다. 이성적으로는 단호하게 자신을 제어하려 했지만,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일상에 지쳐 잊고 살았던 설렘이 조심스레 찾아왔다. 누구나 가끔은 꿈을 꿀 권리가 있는 것 아닐까.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단지 낯선 도시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 반가움일 뿐이야.'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서점 안에서, 서연은 자신이 여기 뉴욕에 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출장이라는 현실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마치 오래된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모든 소설에는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있기 마련이니까.


한편, 준호는 서점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차가운 가을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지만, 얼굴은 여전히 따뜻했다. 방금 마주친 밝고 씩씩한 서연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그녀의 눈동자, 수줍으면서도 당당했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준호는 그녀가 말할 때마다 살짝 올라가던 입꼬리와, 대화 중에 가끔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자연스러운 손짓까지 기억했다. 평소라면 스쳐 지나갔을 작은 세부사항들이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왜 내 직업까지 말한 거지?'


그는 자신의 어색함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로케이션 디렉터라는 것까지 굳이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마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더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뉴욕 10년 차인 그에게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 짧은 대화가 왠지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뉴욕의 거리는 여전히 분주했지만, 준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벼웠다. 그는 문득 그녀가 말했던 '출장'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녀는 얼마나 이곳에 머물까?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여행하다 궁금한 게 생기면 연락하라고 번호라도 남길 걸 그랬나’


준호는 평소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다가도 막상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는 항상 이상하게 서툴러지는 자신이 답답했다.


내일 촬영팀과의 미팅을 위해 서류를 확인해야 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방금 만난 그녀로 가득했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한서연'


가을바람이 그의 코트 자락을 살짝 흔들었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니, 맨해튼의 높은 빌딩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오늘따라 유독 새롭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뉴욕 출장이라...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기대감과 설렘이 어려 있었다.


서연과의 짧은 만남이, 왠지 내일을 조금 다르게 만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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