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역, 경의중앙선 플랫폼, 토요일 이른 아침.
서연은 플랫폼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시계는 이제 막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광판엔 '양평행'이라는 행선지가 깜빡였고, 다음 열차는 10분 뒤 도착 예정이었다. 아침 공기가 선선하게 그녀의 뺨을 스쳤고, 어깨에 걸친 얇은 가디건이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서연은 잠기운이 남아있는 눈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아침 일곱 시 청량리역 양평행 플랫폼에서 만나요. -준호"
어제 저녁, 그 한 문장이 그녀의 모든 계획을 흔들었다. 준호의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서연은 신간 해외소설 번역 교정본을 검토하고 있었다. 낮에 이런저런 회의를 거듭한 탓에 퇴근길에 싸들고 온 원고를 들여다보며 빨간펜으로 수정사항을 표기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메시지가 그녀의 집중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화면을 잠시 바라보던 서연은 펜을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양손으로 쥐었다.
특히 '내일 아침 일곱 시'라는 시간이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늦은 밤까지 원고를 검토하는 일이 잦았기에, 이른 아침은 그녀에게 가장 힘든 시간대였다. 평소라면 단호히 거절했을 시간이었다. "약속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출판사 업무는 보통 늦게 시작하고 더 늦게 끝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메시지는 뭐라 반박하기 어려웠다.
"모레 새벽 네시 뉴욕행 비행기. 일정이 급하게 바뀌었어요. 떠나기 전에 꼭 만나고 싶어요. -준호"
급하게 전한 메시지임에 틀림없었다. 서연은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앞에 놓인 교정본을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결국 덮어버렸다. 모두가 분주한 상황이라 휴가를 낼 형편도 아니었다. 출판사엔 '번역가와 긴급 미팅'이라 말했고, 번역가에겐 '출판사 중요한 회의'가 생겼다고 전했다. 완벽한 거짓은 아니지만, 완벽한 진실도 아니었다. 스스로의 결정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발걸음은 이미 경의중앙선 플랫폼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묻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걸까? 내가 피하고 있는 건 마감이 아니라, 그와의 감정 아닐까? 지난가을, 우연히 만났던 그 감정이 진짜였는지, 혹은 그냥 순간의 마법이었는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지금, 봄 햇살이 스며든 플랫폼 위에 앉아 있으니 또 다른 진심이 생겼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건 일보다, 마감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을 하루일지도 몰라." 그 생각에 묘한 설렘이 가슴을 채웠다. 먼지 쌓인 기차역의 공기가 갑자기 달콤하게 느껴졌다.
멀리서 누군가가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빠져있던 서연의 귀에 그 소리가 선명하게 박혔다. 고개를 돌리자, 가벼운 셔츠에 검은 백팩을 멘 준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바람은 그의 머리를 헝클었고, 미소는 그녀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의 표정에서는 서둘러 달려온 흔적과 그녀를 만난 기쁨이 동시에 읽혔다. 서연은 그 모습이 자신의 기억 속에 또 하나의 사진처럼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 약간 거친 숨소리, 활짝 핀 미소까지.
"준호 씨, 뛰는 거 처음 보네요."
서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기차보다 늦게 가면, 오늘 하루 다 놓치는 거든요."
준호가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손을 흔들던 팔을 내리지 않은 채였다. 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서연을 붙들고 있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정이라도 짜오셨어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럼요. 오늘 우리만의 장소, 봄, 맑은 하늘, 잔잔한 바람, 그리고 서연 씨까지. 어제부터 준비하느라고 얼마나 바빴다고요. 일곱 시부터 막차까지, 완벽한 하루를 위해."
준호의 말에는 자신감과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느껴졌다. 그의 눈빛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서연은 웃음을 참다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에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웃음소리는 맑고 경쾌했다. 그 웃음은 어젯밤 그녀를 흔들었던 망설임과 후회를 조금씩 덜어주고 있었다. 마치 뭉쳐있던 매듭이 풀리는 것처럼.
"이번엔 카메라 없이요?"
서연이 준호의 가벼워보이는 백팩을 보며 물었다.
"오늘은 그냥 제 눈으로 담을 거예요. 렌즈보다 더 강력한 건 기억이니까요."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오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천천히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서연의 어깨가 준호의 어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기차는 조용히 강을 따라 달렸고, 창밖의 풍경은 필름처럼 스쳐 갔다. 도시의 빌딩들이 점점 뒤로 물러나고, 대신 초록의 산과 푸른 강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창 밖으로 느껴지는 봄이 두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런 순간은, 꼭 영화 같지 않아요?"
서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아침 햇살이 반짝였다. 창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마치 한 편의 영화 속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우린 지금 '봄소풍' 중입니다. 감독도, 배우도, 관객도 우리 둘."
준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의 말에는 시적인 감성이 묻어있었다. 그 말에 서연은 미소 지었다. 그것은 지난번 두 사람이 함께 본 영화 '남과 여'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준호가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편의점 로고가 찍힌 봉지 안에는 두 개의 도시락이 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연은 놀랐다. 그가 이렇게까지 음식을 챙겨왔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침을 준비하셨어요?"
서연이 놀란 듯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동이 묻어났다.
"편의점에 들렀다 왔죠. 요리 실력은 없지만, 고르는 안목만큼은 자신 있어요."
준호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의 귓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이 서연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했다.
"근데 편의점 도시락이 너무 현실적이잖아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눈은 장난기로 반짝였다.
"제 상상 속 로맨스는 항상 완벽하지만, 편의점 정식은 좀 소박하네요. 그래도 최선의 선택으로 골랐으니까, 맛있을 거예요."
준호의 솔직한 대답에 서연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유머는 항상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주변 공간을 채웠다.
두 사람은 창밖 풍경을 구경하며 편의점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간단한 김밥과 주먹밥, 소소한 반찬들이었지만 기차 안에서 함께 나누는 아침 식사는 특별하게 느껴졌다.
도시락을 다 먹고 포장을 정리하며, 서연은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는지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근데... 준호 씨, 원래 일정이 이렇게 빨리 돌아가는 거였나요?"
서연이 문득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함이 목소리로 드러났다.
준호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 갑자기 그렇게 결정이 되었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묻어났다. 그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가 다시 서연에게 향했다.
"얼마나 있을 예정이었어요?"
서연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원래는 다음 주까지였는데, 뉴욕에서 급한 프로젝트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게 되었어요."
준호가 설명했다. 그의 눈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손가락으로 도시락 상자 모서리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는 그의 모습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로 준호가 이렇게 이른 아침 만남을 제안했구나 싶었다. 갑자기 마음이 묘하게 아려왔다. 오늘 하루가 끝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럼... 언제 다시 한국에 오세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희망과 두려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준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가을쯤에는 또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 진행한 프로젝트가 이어질 것 같아요."
서연은 가을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봄에서 가을로 이어지는 시간.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을까? 가을은 그리 멀지 않았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마음에 잔잔한 위안이 번졌다.
서연은 웃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기차의 흔들림, 창밖의 흐름, 옆자리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기운. 모든 것이 조용히,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 감각을 책의 문장으로 옮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활자로는 담아낼 수 없는 감정이 여전히 많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빨간펜으로 얼룩진 손가락이 그녀의 직업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 '기다린다'는 말은 언제나 쉽게 들리지만, 막상 마음은 그보다 복잡했다. 이 하루가 끝난 뒤, 다시 그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가을까지의 시간이 갑자기 너무 길게 느껴졌다.
양수역에 도착했을 때, 서연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물머리요? 이게 준호 씨가 말한 서프라이즈였나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설렘이 묻어났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침 안개가 강 위에 옅게 깔려 있었고, 햇살이 그 안개를 통과하며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강과 강이 만나는 곳. 두 개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는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원래는 다른 곳도 생각했지만... 두 강이 만나는 곳이 우리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요."
준호의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서연은 그 말이 조금 설렜다. 그곳에서 둘은 아무 말 없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 바람이 불었다.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그녀의 복잡했던 마음을 하나씩 풀어내는 듯했다.
"이런 게, 데이트 맞죠?"
서연이 문득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는 의문보다는 확인의 의미가 더 컸다.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준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럼요. 오늘 하루는, 그 어떤 스케줄보다 중요해요."
그의 목소리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연의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마치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무거운 돌을 내려놓은 것 같은 해방감이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두물머리의 강가를 따라 걸었다. 햇살이 강물 위에서 반짝이고, 물가의 갈대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서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고, 준호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런 풍경 속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여기 오래전부터 와보고 싶었어요, "
서연이 말했다.
"영상으로는 많이 봤는데, 실제로 오니까 더 아름답네요."
"저도 사실 여기 처음이에요. 사진작가인데 서울 근교 이런 명소를 안 와봤다니 말이 안 되죠?"
준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오늘 카메라 없이 오신 게 더 아쉽겠네요."
"아니요, 오히려 좋아요. 카메라 들고 오면 일하는 기분이 되거든요. 오늘은 그냥 온전히 이 순간을 경험하고 싶었어요."
그 말에 서연은 미소 지었다. 그녀도 종종 편집 일을 하다 보면 좋은 문장을 발견해도 '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두 사람은 마을에 있는 작은 식당을 찾았다. 강을 바라보며 지은 2층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된장찌개와 더덕구이를 주문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강과 산이 만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운길산이래요."
준호가 가리켰다.
"언젠가 저기도 같이 올라가 봐요."
'언젠가'라는 말에 서연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은 오늘 하루로 끝나지 않을 그들의 관계를 암시했다.
식사 후 두 사람은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다. 세미나하우스와 갤러리, 카페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된 농가를 개조한 찻집에 들러 전통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이런 곳에서 책 한 권 펴놓고 하루 종일 있으면 좋겠어요."
서연이 말했다.
"그러다 잠들면 제가 깨워드릴게요."
준호가 농담을 건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준호의 사진 작업과 뉴욕에서의 생활, 서연이 만났던 작가들과 번역가들에 대한 이야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오후가 깊어지자, 그들은 다시 강가로 내려가 두물머리의 황포돛배를 보았다. 수면 가까이에서 보는 두 강의 만남은 더욱 신비로웠다. 물살이 만나 소용돌이치는 모습, 그리고 그 위로 떠다니는 오리 가족들.
"저기 보세요, 아기 오리들이에요."
서연이 가리켰다.
준호는 그 방향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새 생명의 시작이네요."
배에서 내린 후, 두 사람은 강가의 작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발아래로는 두 강이 만나 하나가 되는 모습이 보였다. 서로 다른 색깔의 물줄기가 섞여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있는 게… 편하면서도 좀 겁나요."
서연이 갑자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진심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왜요?"
준호가 물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온전히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좋은 건 너무 빨리 지나가니까요. 그러고 나면… 혼자 남겨질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서연의 말에는 과거의 아픔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오래전 누군가에게 남겨졌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준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이해와 공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서연의 눈 속에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더 잘 기억하려고 해요. 잊히지 않게."
그의 말에는 약속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영원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약속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저녁노을을 보기 위해 강가 위쪽으로 올라갔다. 날이 저물며 하늘은 점점 더 붉게 물들었고, 그 붉은빛이 강물 위에 길게 퍼졌다. 낮에는 밝고 활기찬 느낌이었던 두물머리가 저녁이 되자 신비롭고 로맨틱한 분위기로 변했다.
"이 순간을 사진으로 그대로 담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준호가 말했다.
"마음속에 담으면 되잖아요."
서연이 대답했다.
"더 선명하게."
"맞아요. 카메라 렌즈보다 더 선명하게."
두 사람은 노을이 지는 풍경을 감상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가끔 다른 관광객들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자신들의 세계에 빠져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았다.
"뉴욕에선 이런 노을을 보긴 힘들죠?"
서연이 물었다.
"비슷하지만 다르죠. 맨해튼 빌딩 사이로 지는 해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어요. 언젠가 함께 보면 좋겠네요."
서연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순간을 상상하고 있었다. 뉴욕의 고층 빌딩 사이로 지는 노을, 그리고 준호와 함께.
저녁이 되자 그들은 마을의 작은 퓨전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창가에 앉아 어둠이 내려앉는 두물머리를 바라보며 와인 한 잔과 함께 식사를 즐겼다. 이제 강 위에는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고, 작은 등불들이 강변을 밝히고 있었다.
"오늘 하루가 정말 빨리 지나간 것 같아요."
서연이 와인잔을 돌리며 말했다.
"그만큼 충실했다는 증거겠죠."
준호가 대답했다.
"시간이 빨리 가는 건 그만큼 의미 있게 보냈다는 뜻이니까요."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밤이 되자 기온이 떨어졌고, 서연은 살짝 떨었다. 준호는 자신의 자켓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감사해요."
서연이 말했다. 자켓에서는 준호의 체온과 함께 그의 향기가 느껴졌다.
"마지막 기차 시간이 다가오네요."
준호가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지만, 눈에는 슬픔이 비쳤다.
석양이 짙어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양수역으로 걸어가는 길,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주변은 이제 다른 관광객들도 거의 없었고, 역 주변은 한적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플랫폼 끝자락에 서서 멀리 산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붉은빛이 하늘과 산과 두 사람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서연은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낮은 산맥을 배경으로 한 작은 시골역, 주황빛 노을, 그리고 준호. 그녀는 그가 곧 떠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녀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준호 씨..."
서연이 조용히 불렀다.
준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석양이 그의 눈동자에도 붉은빛을 담고 있었다.
"네?"
"오늘... 정말..."
서연은 말을 이으려 했지만,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었다.
준호도 말없이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언가 중요한 말이 오갈 듯 말 듯, 공기 중에 떠 있었다.
플랫폼에는 이제 그들 둘밖에 없었다. 기차가 오기까지는 아직 15분 정도 남아있었다. 저녁 바람이 서연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준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 걸음 다가섰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요?"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많은 질문들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이게 단순한 하루의 추억일 뿐인지, 아니면 무언가 더 깊은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서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오늘 하루가 끝나면... 그냥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준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서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람이 그의 셔츠를 살짝 흔들었다.
"그건 서연 씨가 원하는 대로... 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의 대답은 모호했지만, 그 안에는 가능성이 담겨 있었다. 서연은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난..."
서연은 평소의 모습과 달리 말을 더듬었다.
"난 그냥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 고백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가 스스로에게도 인정하지 않았던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준호의 눈이 커졌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준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아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서연은 준호의 숨결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그녀에게 전해졌다.
"가을까지 기다리는 게... 너무 길게 느껴져요."
서연이 말했다.
"그럼... 기다리지 않을 방법을 찾아볼게요."
준호의 목소리는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이 얽혔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그 눈빛 교환 속에 담겨 있었다.
준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서연의 뺨에 가볍게 대었다.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서연은 숨을 멈췄다.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석양의 마지막 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준호가 서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포개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흔적이었다. 마치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정성스럽게. 서연은 그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천천히, 그녀도 키스에 응답했다.
두 사람의 키스는 깊어졌다. 그것은 이별을 앞둔 사람들의 간절함과 미래에 대한 약속이 함께 담긴 키스였다. 플랫폼 끝자락, 석양의 마지막 빛 아래,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만들어졌다.
키스가 끝나고, 그들은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서 있었다. 준호의 손은 여전히 서연의 뺨에 닿아 있었고, 서연의 손은 어느새 준호의 가슴에 올려져 있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이거... 좀 복잡해졌네요."
서연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준호도 미소 지었다.
"복잡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결단이 담겨 있었다.
"가을까진 좀 남았는데, 여름에... 어디로 떠날 거예요?"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서연은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아직은 뭐..."
서연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어디 좋은 곳 갈 거면 알려주세요."
준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단순한 인사인지, 아니면 더 깊은 의미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열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쉬움을 담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차가 플랫폼에 도착하기 직전, 준호는 서연을 다시 한번 안았다.
청량리역에 도착했을 때, 역 시계는 이미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서연의 머리가 준호의 어깨에 기대어져 있었고, 그의 체온이 서연에게 전해졌다. 플랫폼에서 헤어지기 전, 준호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오늘 두물머리에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서연이 강가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카메라는 안 가져왔다고 했잖아요."
서연이 놀라서 말했다.
"디지털카메라는 안 가져왔죠."
준호가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이건 작은 폴라로이드예요. 딱 한 장만 찍었어요."
서연은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메모가 적혀 있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우리의 시작.'
그 말에 서연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준호는 뒤돌아 택시를 잡기 위해 걸어갔다. 몇 걸음 가다가 그는 다시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서연도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서연은 그가 택시에 타서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택시의 불빛이 코너를 돌아 사라진 후에야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서연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다시 꺼내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사진을 소중히 지갑에 넣었다. 오늘 하루를 생각하니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집에 도착한 서연은 창가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비행기 한 대가 불빛을 반짝이며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 서연은 그 비행기가 준호를 태우고 가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오늘 하루를 다시 생각했다. 청량리역의 이른 아침, 두물머리의 풍경, 강가의 대화, 그리고 플랫폼에서의 키스까지. 그 모든 순간이 그녀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었다.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탑승 중이에요. 뉴욕에 도착하면 또 연락할게요. 오늘 하루 잊지 못할 거예요."
서연은 메시지를 읽고 미소 지었다. 그녀는 간단히 답장했다.
"잘 가요. 다음에 만날 때를 기대할게요."
마치 두물머리에서 두 강이 만나 하나가 되듯이, 그들의 인연도 어디론가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