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혼자다.
출장이 아니었다. 동행도 없었다. 말하자면 서연은, 스스로 예약한 비행기 티켓 한 장과 함께 낯선 여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준호가 있는 뉴욕과는 달랐다. 뉴욕은 준호의 일터였고, 그곳의 모든 순간에는 목적이 있었다. 스페인은, 감정의 종착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을 넣고 흔들기 위한 여름방학.
인천공항, 이른 아침. 자동 발권기 앞.
여권을 넣자 바르셀로나행 직항 편 항공권이 출력되었다. 짧은 여정. 단 일주일자리 여름휴가. 하지만 이번만큼은 단순한 항공 이동이 아니었다. 작지 않은 결심이 있었다. 게이트 앞 커피숍. 아이스 아메리카노. 차가운 컵. 창밖의 활주로.
누가 말린 것도, 떠민 것도 아니다. 그냥. 여름엔 뭔가를 비워내고 싶었다. 일상도, 기억도, 사람도. 어쩌면 이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을 나만의 방학이다. 잠깐 핸드폰을 확인한다. 어젯밤 준호의 메시지가 아직 그대로다.
'잘 다녀와요. 사진 많이 찍고요.'
하지만 서연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답장을 하면 뭔가가 다시 시작될 것 같았고, 지금은 시작보다 멈춤, 망설임 쪽에 가까운 감정이 더 많았다. 비행기가 뜨기 전, 그녀는 창밖을 본다. 아침 햇살이 활주로를 누비며 번진다. 마치 이제 막 열리는 여름처럼.
사진첩 아이콘을 눌렀다. 지난 봄. 그리고 준호. 함께 찍은 사진 몇 장. 그날 아침, 청량리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양평 두물머리로 향했다. 플랫폼의 차가운 공기, 전광판의 깜빡이는 행선지. 준호와의 즉흥적인 여행이었다.
사진을 하나씩 넘겨본다. 두물머리 강가에서 준호가 강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 서연이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준호가 찍어준 서연의 모습. 어색한 미소가 담겨있다. 햇살이 비추던 그녀의 눈가가 반짝인다.
다음 사진은 함께 강가를 걷던 모습. 지나가던 다른 관광객에게 부탁해서 찍은 것이다. 두 사람의 어깨가 묘하게 가까웠다가, 멀어지길 반복하며 걷는 모습. 그날 하루, 그들은 거의 말없이 걸었고, 거의 하루 종일 두물머리에 머물렀다. 봄이었고, 꽃이 피었고, 물이 흐르고 있었다. 차가운 산바람, 햇살의 따스함, 준호의 목소리.
우리의 관계는 당신에게 달렸다는 말하던 그의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돈다. 방법을 찾겠다고 했지만…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걸까. 돌아오는 기차, 서연은 준호의 어깨에 가볍게 기댄 채 눈을 감았었다. 청량리역 플랫폼에 내려서 둘은 키스를 나누었지만, 그건 시작이라기보다 마침표에 가까웠다. 그날 이후, 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아무도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그 사진을 삭제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후회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쯤은 안다.
다만, 그 모든 이후에 자신이 선택한 여름이라는 계절. 이번에는 혼자 걷기로 한 계절. 출국 게이트의 번호가 불리기 시작했다. 서연은 조용히, 천천히 일어났다. 비행기로 향하는 발걸음이 묘하게 가벼웠다. 마치 이 여행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처럼.
드디어, 바르셀로나.
스페인의 공기는 낯설었다. 서울의 초여름 습기와는 다른 건조한 열기가 피부를 스쳤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맞닿은 스페인의 하늘은 서울보다 더 파랗고 높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서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바르셀로나행 직항은 12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보낸 시간이 서연의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가방을 끌며 공항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았던 바다, 그리고 이제 가까워지는 도시의 모습. 운전기사는 간간이 영어로 도시에 대해 설명했지만, 서연의 귀에는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자지 못한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에 혼자 온 긴장감 때문인지.
도시로 들어가는 길, 서연은 뉴욕이 떠올랐다. 지난가을 그곳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들. 맨해튼의 높은 빌딩 숲, 센트럴 파크의 여유로움,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도시에서도 익숙함을 주었던 준호의 존재. 하지만 지금 그녀는 완전히 혼자였다. 그것이 주는 자유로움과 외로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택시는 고딕 지구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너무 좁아서 택시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지점에서 내렸다. 그녀는 구글맵을 켜고 예약한 호텔을 찾아 걸었다. 좁은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있었다. 몇 번의 우회 끝에 마침내 호텔을 찾았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호텔. 바르셀로나의 오후 햇살이 간신히 닿는 조용한 방. 외풍을 막은 벽 사이로, 눅눅한 여름이 묻어 있다. 방 열쇠를 받아 든 서연은 좁은 계단을 올라 3층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작지만 정갈한 방이 그녀를 맞이했다. 창문은 작았지만, 그 너머로 바르셀로나의 지붕들과 멀리 보이는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침대에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바르셀로나의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뜨겁지만 상쾌한 공기. 창문을 열자 트롤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허둥지둥 지나간다. 아이가 웃는다. 그 웃음에 서연은 웃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여긴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곳이다.' 누구도 내 안부를 묻지 않고, 누구도 날 기다리지 않는다. 그게 오히려 좋았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서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피로가 몰려왔지만, 동시에 이상한 해방감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 출판사 편집자로서의 서연도, 준호와 관계된 서연도 아닌, 그냥 '서연'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출판사 동료들의 안부 메시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호의 메시지. '잘 가고 있나요? 비행기 이륙했겠네요.' 메시지 시간을 보니 서울을 떠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하지만 서연은 여전히 답장을 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읽고 다시 스마트폰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베개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낯선 도시의 소리가 창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차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 서연은 이 모든 낯선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지난봄. 서울 외곽. 물이 느리게 흐르는 저녁.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둘 사이엔 말이 없었다. 말이 없어도 되는 사이라고 믿던 때였지만, 그날따라 그 침묵은 유난히 불편했다. 서연은 손끝으로 벤치 끝을 무의식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준호는 강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늦은 봄의 따스함이 아직 남아있던 공기를 여름의 예감이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다음 달이면 조금 여유가 생길 것 같은데..."
준호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서연은 그가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뉴욕은 그의 공간이었다. 사진작가로서 가장 많은 작업을 하는 곳이자, 그의 '집'이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녀의 대답은 생각보다 건조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준호가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잠시 뒤, 예상한 질문이 돌아왔다.
"서연 씨도... 올래요? 지난번처럼 같이 하면 좋잖아요."
'지난번처럼.' 그 말에 서연의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난가을 그녀는 출장으로 뉴욕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준호를 만났다. 뉴햄프서로의 촬영여정을 마치고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둘은 맨해튼의 거리를 함께 걸었고, 허드슨 강변에서 일몰을 보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준호의 꿈도, 서연의 꿈도, 그리고 그들의 관계도.
하지만 서연이 서울로 돌아온 후, 그들은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느새 그 '가능성'들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서연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뭐가요?"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 말은 조금 날카로웠다. 서연도 자신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일부가 아닌,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었고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서연은 손바닥을 뒤집어 무릎 위에 올렸다. 손금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준호 씨는 내가 왜 망설이는지, 상상해 본 적 있어요?"
그 질문에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바람이 스쳤다. 물가의 풀잎이 흔들렸다. 멀리서 물총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 흔들림만 바라보던 준호는 조용히 말했다.
"같이 있으면, 좋으니까."
그 말은 참 부드러웠지만, 서연의 마음엔 그 부드러움이 칼처럼 와닿았다. 그 말이 가장 쉽고, 동시에 가장 어려운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왜'가 아닌 '그냥'이라는 대답. 그건 충분하지 않았다.
"난 뭘 원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요."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고백은 너무 솔직해서 그녀 자신도 놀랐다.
"괜찮아요. 나도 마찬가지니까."
준호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서연의 손을 잡았다. 잠시,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 강을 바라보았다. 해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고층 아파트 단지 너머로 저무는 태양이 빨갛게 물들었고, 그 빛이 강물 위에 흩어졌다. 붉은 물결이 두 사람의 발아래까지 흘러왔다.
"여름휴가 계획 있어요?"
준호가 갑자기 물었다. 서연은 생각에 잠겼다. 일과 일 사이 짧은 휴식. 그동안 그녀에게 휴가는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혼자 여행 가볼까 생각 중이에요."
서연의 대답에 준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디로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그냥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이해와 함께 작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알려줄 거죠? 어디로 가기로 결정하면."
서연은 미소 지었다.
"네, 알려드릴게요."
두 사람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아까와는 달랐다. 어색함은 사라지고 편안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치 서로에게 솔직해지자, 그 솔직함이 새로운 평온을 가져온 것처럼. 저무는 햇살 속에서, 두 사람의 실루엣이 긴 그림자를 강물 위로 드리웠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바르셀로나의 하늘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서연은 시계를 보았다. 저녁 9시. 스페인의 여름은 해가 늦게 진다고 했지만, 이제는 완전한 밤이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피곤해 보였지만, 동시에 어딘가 달라 보였다.
어쩌면 그건 여행이 주는 작은 마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호텔 로비에서 옥상 테라스가 있다는 것을 들었던 서연은 호기심에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향했다. 좁은 목조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바르셀로나의 밤하늘이 그녀를 맞이했다.
옥상 테라스는 작았지만 아늑했다.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마다 작은 초가 켜져 있었다. 다른 투숙객들이 와인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연은 구석의 빈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웨이터가 와서 무엇을 마실지 물었고, 서연은 스페인 와인을 주문했다. 이름도 모르는 와인이었지만, 이곳에 온 이상 현지의 맛을 느껴보고 싶었다. 작은 와인 잔을 든 서연.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여행자의 고독. 억지로 외롭진 않은 밤.
'이렇게까지 혼자가 된 건 처음이다. 그런데... 왜 조금 후련하지?' 와인의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조금 쓰고, 약간 신맛이 나는 와인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서연은 와인 한 모금을 더 삼키고, 스페인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과는 다른 별자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서연에게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완전히 '혼자'인 경험이. 학창 시절의 수학여행, 대학 동기들과의 배낭여행, 회사 동료들과의 해외 출장까지.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였다. 혹은 누군가의 목적지에 동행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여행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준호의 메시지였다.
'도착했어요? 궁금하네요.'
서연은 메시지를 읽고, 천천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아직은 답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여행 내내 답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죄책감보다는 해방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바르셀로나의 밤하늘 아래, 서연은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준호에 대한 그리움, 독립에 대한 갈망,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있었다. 옥상에서 내려오는 길, 그녀는 생각했다. 사랑이 시작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만, 끝나는 방법은 단 하나일까. 아니면 끝도 새로운 시작일 수 있을까.
호텔 방으로 돌아온 서연은 창가에 서서 바르셀로나의 밤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좁은 골목에 불빛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어딘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여름밤공기를 타고 흘러왔다. 이번 여름은, 모든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냈다. 여행 일기를 쓸 생각이었다. 첫 페이지에 날짜를 적고, 제목을 썼다. '혼자의 여행' 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서연의 생각도 그렇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