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의 둘째 날 아침.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지만, 바르셀로나의 여름은 게으른 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시간의 흐름조차 다른 도시. 서연은 호텔에서 가까운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오늘은 어딘가를 정해 걷는 날이 아니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머릿속에는 여전히 어제의 감정들이 맴돌았다. 낯선 도시의 첫날밤, 그녀가 느꼈던 해방감과 동시에 찾아온 미묘한 외로움. 그 복잡한 감정을 품은 채, 서연은 좁은 골목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딕 지구의 미로 같은 골목들은 때로는 막다른 곳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작은 광장으로 열리기도 했다.
좁은 돌길 끝에서 조용한 성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 펠리프 네리. 내전 때 폭격 흔적이 있는 곳이다. 바르셀로나에 오기 전, 다큐멘터리에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장소. 서연은 잠시 건물 앞에 서서 오래된 파사드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햇빛과 비바람에 깎인 돌의 결이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무심한 듯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성당 안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듯한 고요함. 관광객도, 안내 방송도 없었다. 낡은 벽과 오래된 샹들리에,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빛이 성당 내부를 천천히 감쌌다. 먼지 입자들이 빛줄기 속에서 춤을 추었다.
서연은 마지막 줄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나무 의자는 예상보다 단단했고, 수 세기에 걸친 기도와 침묵의 흔적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무심히 페이지를 넘겼다. 어젯밤 호텔 방에서 적었던 단편적인 생각들.
'혼자라는 것은 자유라는 것. 하지만 자유로움은 왜 때로 외로움처럼 느껴질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쉬었다. 바르셀로나에 와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준호에 대한 생각도, 서울에 대한 생각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그녀는 문득 옆자리에서 작게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그 소리가 너무 미세해서 처음에는 자신의 착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분명한 인기척으로 변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서연의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진, 봤어요."
낯익은 목소리. 공기 중에 울리는 그 목소리에 서연의 온몸이 떨렸다. 준호였다.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 서연은 천천히, 마치 환영이 사라질까 두려운 듯 옆을 바라보았다. 그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치 원래 거기 있어야 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하지만 어색하게.
"어제 올린 거요. 벽 곡선이랑, 바닥 문양… 혹시 여긴가 싶었어요."
서연은 어제저녁 옥상 테라스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SNS에 올렸던 것을 기억했다. 자신의 여행 사진을 보고 준호가 바르셀로나까지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어쩐지 기쁨이 뒤섞인 표정이 드러났다.
"왜 여기에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준호는 그 모든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흔들림은 없었다. 마치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처럼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원래는 이번 주말에 남부 유럽 촬영 일정이 있었는데... 취소하고 바로 이쪽으로 왔어요.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준호의 목소리는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용기와 결단이 담겨 있었다.
"사실 당신 소식 들었을 때부터 마음이 두근거렸어요. 그러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보고... 그냥 일정 바꿨죠."
"내가 연락하면 안 될까 봐, 그냥 휴가 겸 찾아왔어요. 이번 여름은... 조금 다르게 보내고 싶었거든요."
그들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은 무거웠지만, 동시에 편안했다. 마치 오랜 친구들처럼,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침묵이었다.
준호는 성당 벽 쪽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여기, 예전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시리즈 준비할 때 계속 봤던 장면 맞죠? 그때 당신 얼굴 진지했어요."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어렸다. 서연은 그 말에 살짝 당황했다. 그녀가 출판사에서 <바람의 그림자> 작가의 에세이를 기획했던 때를 기억하는 듯했다. 일에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을 준호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 기억력이 좋네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살짝 떨림이 있었다. 그것은 감정의 떨림이었다.
"서연 씨가 했던 말들, 은근히 오래 남더라고요."
그 말에 서연은 작게 웃었다. 기쁨과 당황이 묘하게 섞인 웃음이었다. 그녀가 언제 어떤 말을 했길래 준호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 질문의 답을 알게 되면, 그녀의 마음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성당의 공기는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천천히, 무엇인가가 풀리고 있었다. 얼어붙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 하지만 말로 옮기는 순간, 어쩌면 더 멀어질 수도 있는 거리. 그것이 그들이 지금 이 순간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산 펠리프 내리라니, 당신답다."
준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말에는 경외와 친밀함이 담겨 있었다. 서연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혼자 보고 싶었던 곳이에요."
서연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짝 투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진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와버렸네요."
준호의 눈빛에 미안함이 스쳤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절대 후회는 없었다. 그는 여기 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상하진 않네요."
서연의 말에 준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듯. 그들은 다시 조용히 제단 쪽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시간, 바르셀로나의 빛과 돌의 냄새 속에서.
이것은 확실한 시작도, 명확한 설명도 없는 재회였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이 만남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계획하지 않았던, 그러나 어쩌면 필연적이었던 만남.
서연과 준호는 나란히 성당 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바르셀로나의 강렬한 햇살이 두 사람을 덮쳤다. 햇살은 더욱 강해져 있었고, 바닥은 따뜻했다. 그들은 잠시 눈을 찡그리며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당 안의 고요함과 달리, 바깥세상은 활기가 넘쳤다. 관광객들의 웃음소리, 거리 악사의 기타 소리, 카페에서 들려오는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의 마음처럼.
"이제 어디로 갈 건데요?"
준호가 물었다. 그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눈빛은 달랐다. 그 안에는 기대와 설렘이 담겨 있었다. 서연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게 중얼거렸다.
"좀 더 걷고 싶어요."
그 말은 '같이 걸어요'라는 말보다 솔직했다. 그리고 아마, 더 깊었다. 서연은, 함께 걷자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혼자 걷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준호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듯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어깨가 가끔 스치기도 했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접촉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골목을 따라 걸으며, 서연은 문득 자신이 왜 이 여행을 결심했는지 생각했다. 준호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제 준호가 여기 있다.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뒤틀렸지만, 이상하게도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존재가 안도감을 주었다.
그들은 산책하며 작은 광장들과 숨겨진 정원들을 발견했다. 한 골목에서는 작은 시장이 열리고 있었는데, 다양한 종류의 올리브와 치즈,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준호는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광장 한쪽에서 즉흥 공연을 하는 음악가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잠시 멈춰 서서 음악을 들었다. 플라멩코 기타의 열정적인 선율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서연은 매 순간 자신의 감정을 관찰했다. 준호와 함께 있는 지금, 그녀는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마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했던 그녀의 마음은 어디로 간 걸까?
늦은 오후의 람브람스 거리. 활기찬 사람들과 여행객들, 거리의 퍼포머들, 그리고 꽃을 든 노점상들이 빛나는 오후를 만든다. 서연과 준호는 그 한복판을 나란히 걸었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걸음은 비슷한 속도로 흘러갔다.
서연은 자신과 준호 사이에 형성된 독특한 침묵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편안했다.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침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말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인파 속에서 걸으며, 서연은 문득 준호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는 것을 느꼈다. 의도적인 것인지 우연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접촉은 그녀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그리고 준호도 손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의 손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다.
"혼자 오면, 여긴 좀 시끄러웠을 것 같아요."
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솔직함이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혼자였다면 느꼈을 외로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 왔으면, 그 시끄러움에 마음이 묻혔을 것 같아요."
서연의 말에 공감하듯 준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그는 서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요?"
준호의 눈이 서연의 눈을 찾았다. 그 눈빛 속에는 조심스러운 질문이 담겨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은 어때요?"
"지금은... 그 시끄러움이 오히려 덜해요."
그 말에 준호는 작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안도와 기쁨이 섞여 있었다. 서연의 말은 간접적이었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당신과 함께 있어서 좋아요.'
둘은 골목 사이에 숨겨진 조용한 타파스 바에 들어갔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메인 거리와 달리, 이곳은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듯한 아늑한 분위기였다.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와 손글씨 메뉴가 붙어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낡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장소에 진정성을 더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감바스 알 아히요와 하몽, 하우스 와인을 주문했다. 와인이 먼저 나왔다. 유리잔에 담긴 루비빛 액체는 오후 햇살과 만나 반짝였다. 첫 모금을 마시며, 서연은 어제저녁 혼자 마셨던 와인을 떠올렸다. 그때와 지금, 같은 도시의 다른 순간. 혼자였을 때와 함께일 때의 차이가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감바스가 테이블에 놓였다. 마늘 향과 올리브 오일의 고소한 향기가 공간을 채웠다. 서연과 준호는 빵을 소스에 적셔 먹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바르셀로나의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 현지 음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따금 서울에 대한 이야기.
"뉴욕에서는 이런 여유가 없어요. 항상 바쁘고, 다음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그래도 그게 매력이죠. 하루하루가 도전이니까."
준호의 눈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빛나고 있었다. 뉴욕에서의 생활이 그에게 얼마나 활력을 주는지 서연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말속에서 끊임없는 긴장과 불안정함도 느껴졌다. 서연은 와인잔을 돌리며 생각했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언제나 준호의 스케줄에 맞춰진 삶...'
"사진과 글은 참 다른 것 같아요. 당신은 그 순간을 붙잡고, 난 그 순간을 풀어내고."
서연이 말했다. 준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난 사실..."
준호가 말을 꺼내려했다. 그의 눈에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서연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순간, 이 대화를 더 미루고 싶었다.
"준호 씨."
서연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 작은 제스처에 준호의 말은 멈췄다. 와인잔이 천천히 입으로 향했다.
"그 이야기는… 조금만 더 있다가 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운 단호함이 있었다.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유예였다. 준호는 그 미묘한 차이를 이해한 듯했다.
"그래요."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준호는 서연이 필요로 하는 시간과 공간을 주려는 듯했다.
그들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와인만 마셨다. 그리고 아주 작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미뤄놓은 말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들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까. 언젠가는 이어질 대화, 언젠가는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것은 희망이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오후의 햇살이 점점 더 기울어갔다. 타파스와 와인 한 병을 다 마신 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제 람블라스 거리는 저녁의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거리 가게들의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더 여유롭게 걸었다.
저녁 무렵, 작은 공원 벤치
그들은 람블라스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공원을 발견했다. 그곳은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햇살이 비껴간 벤치. 서연은 다리를 꼬고 앉아 준호의 손에서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오후 내내 준호는 가끔씩 카메라를 꺼내 서연과 주변 풍경을 찍었다. 서연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렌즈에 묻은 얼룩을 천으로 닦으며 서연이 말했다.
"이번엔 사진 잘 나올 것 같아요."
"왜요?"
준호의 질문에는 진정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서연의 생각을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냥… 마음이 그렇게 말하니까요."
서연의 대답은 모호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 자신의 마음 상태를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다는 암시였을까?
그 말에 준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깊고 따뜻했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고, 또 짧은 순간이기도 했다. 서연은 준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통해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을 교환하고 있었다.
공원의 나무들 사이로 저녁 햇살이 따스하게 비쳤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서연은 문득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낯선 도시의 작은 공원,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준호의 따뜻한 눈빛.
햇살이 잦아드는 저녁, 둘은 다시 골목 안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그 하루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무언가를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서연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준호의 마음속에서.
호텔 입구 앞에 멈춰 선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지만, 아무도 먼저 작별 인사를 꺼내지 않았다. 공기 중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연은 준호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
"내일은..."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불안이 함께 담겨 있었다.
"내일은, 가우디의 건축물들을 보러 갈 계획이었어요."
서연이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는 숨겨진 초대가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알아챈 듯, 미소 지었다.
"좋아요. 아침에 여기로 올게요."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내일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서연이 자신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기쁨.
침묵이 흐르는 순간, 준호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서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신에 찬 동작으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서연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감겼다. 그것은 청량리역 플랫폼에서의 키스와는 달랐다. 이번엔 마침표가 아닌 쉼표 같은 느낌이었다. 준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자, 서연은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내일 봐요."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기대가 함께 담겨 있었다. 둘 다 이 순간이 더 길어지길 바랐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너무 많은 감정으로 가득 찼고, 그 모든 것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준호는 서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가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이해와 존중이 담겨 있었다. 그들 앞에는 바르셀로나의 여러 날이 펼쳐져 있으니까.
"내일 봐요."
그들은 각자의 길로 갔다. 서연은 호텔로, 준호는 자신의 숙소로.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일의 약속일 수도,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일 수도, 혹은 그저 서로의 존재감일 수도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여름은 그렇게 늦게 저물었다. 하루가 끝났지만,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두 사람 모두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일은 바르셀로나에서의 새로운 날이 시작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