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골목 한켠, 햇빛이 골목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오며 돌담 위에 날카로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서연은 호텔 입구에 기대어 서 있었다.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던 중이었다.
'가우디의 건축은 어쩌면 바르셀로나의 무의식일지도...'
문장을 적고 있었을 때,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준호가 호텔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평소보다 조금 서두르는 듯했다. 마치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을 의식하는 모습이었다. 서연은 이미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바로 그 자리에서의 키스가 아직 두 사람 사이에 맴돌고 있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어색함은 없었다.
"오늘은 제가 조금 늦었네요."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미안함과 함께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서연의 시선을 만나자 그의 눈이 밝아졌다.
그 말에 서연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성당에서의 재회 이후, 둘 사이에는 어색함보다 익숙함이 더 짙게 깔려 있었다. 어제의 순간들이 마치 오랜 기억처럼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었다.
"게다가 서연 씨는 늘 시간에 정확하시니까."
준호가 덧붙였다. 서연이 그동안 보여준 시간관념을 기억하는 듯했다. 작은 디테일까지 기억하는 준호의 모습에 서연은 고마웠다. 마치 서로의 습관과 기호까지 슬그머니 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오늘... 계획이 있나요?"
서연이 수첩을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만의 시간을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없어요. 그냥 걷다 보면 어디든 가게 되겠죠."
준호의 대답은 의외로 가벼웠다. 항상 계획적인 그가 즉흥적인 여행을 제안한 것이 신선했다. 뉴욕에서의 그는 언제나 스케줄에 쫓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준호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그들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골목을 걸었다. 따로 약속한 일정은 없었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오늘은 가우디를 보기로 한 날이라는 것을.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좁은 골목의 그림자와 햇살이 교차하며 얼굴에 패턴을 만들었다. 서연은 골목의 끝에서 시작되는 넓은 도로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준호는 그녀의 옆에서 같은 속도로 걸음을 맞추었다. 어제보다 더 가까운 거리였지만, 서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가우디에 관한 책을 출판하신 적 있으시죠?"
준호가 문득 물었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에요. 가우디의 건축에 관한 책을 진행했었죠. 그때부터 한번 꼭 와보고 싶었어요."
"그럼 저보다 훨씬 더 전문가 시겠네요."
서연은 살짝 웃었다.
"글쎄요, 사진작가 눈으로 본 가우디는 또 다를 테니까요."
두 사람은 각자의 시선으로 바르셀로나를 보고 있었다. 하나는 언어의 관점에서, 하나는 이미지의 관점에서. 하지만 오늘은 그 두 시선이 교차하는 날이 될 것이었다.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언덕을 오르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바르셀로나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중해의 푸른빛이 멀리서 반짝였고, 도시는 점점 작아지는 퍼즐 조각처럼 변해갔다. 준호는 차가 멈춰서는 중간중간 셔터를 눌렀고, 서연은 창밖에 시선을 두고 말을 아꼈다.
"높은 곳에서 보면 도시가 더 분명해져요."
준호가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서연은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했다. 그가 말한 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관점만은 아닐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버스가 언덕 위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침 일찍 도착했음에도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공원에 들어서자 형형색색 모자이크로 장식된 벤치들과 건축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곡선의 계단, 손으로 다듬은 듯한 조각들은 어떤 인위보다도 생명에 가까웠다. 색색의 타일 조각들이 햇빛 아래서 반짝였다.
"이런 건축을 현실에 만들 생각을 하다니, 가우디는 진짜 천재예요."
서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책으로만 보던 공간을 실제로 경험하는 기쁨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
준호는 카메라를 들이대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건축물뿐만 아니라 서연의 모습도 담고 있었다. 그녀가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 그녀의 표정에 깃든 진실된 감동, 그리고 말로 표현하지 않는 미묘한 감정들까지.
"그런데도 다 부드러워요. 어디에도 뾰족한 선이 없네요."
준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발견의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는 건축물의 곡선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마치 그것을 직접 만지고 싶다는 듯이.
"도시 전체가 감정으로 설계된 것 같죠. 흐르는 감정 그대로."
서연이 대답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진행했던 책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가우디가 말했다는 "직선은 인간의 것이지만, 곡선은 신의 것이다."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더 와닿았다.
공원의 길을 따라 걸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말보다 주변의 풍경을 더 오래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침묵조차 어색하지 않았다. 따로 있어도,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서연은 가끔 멈춰 서서 공간을 관찰했고, 준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서연 씨가 건축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독특해요."
준호가 말했다. 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면에서요?"
"글을 읽듯이 건물을 읽는 것 같아요. 마치 문장을 해석하듯이."
그 말에 서연은 놀랐다. 준호가 자신의 습관을 그렇게 정확히 짚어낸 것이 신기했다. 실제로 그녀는 공간을 언어처럼 읽는 경향이 있었다. 구조는 문법이고, 장식은 형용사이며, 빛은 동사랄까.
"준호 씨는 카메라로 모든 걸 보네요. 심지어 카메라가 없을 때도."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비난이 아니라 진심 어린 관찰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더 풍부하게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공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테라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바르셀로나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지중해의 푸른빛, 도시의 모자이크, 그리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탑이 멀리서 보였다.
"저기 보이는 게 사그라다 파밀리아예요."
서연이 가리켰다. 준호는 그 방향을 보며 카메라의 줌을 당겼다.
"다음은 거기로 가볼까요?"
"좋아요.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준호의 대답은 의미심장했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시간. 현실에서 벗어난 시간. 두 사람만의 시간일 테니까.
바르셀로나 중심부로 다시 내려온 그들은 유려한 곡선의 외벽과 비늘처럼 빛나는 유리로 장식된 까사 바뜨요 앞에 섰다. 창문은 마치 물고기의 아가미 같았고, 건물은 꿈속의 조각 같았다. 햇살이 유리 장식에 반사되어 다채로운 빛을 만들어냈다.
"생각보다 더 아름답네요."
서연이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탄이 묻어 있었다. 사진으로 본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건물이 내뿜는 에너지, 그 존재감을 사진은 담아낼 수 없었다.
"뉴욕은 직선이죠. 바쁘고 예리하고..."
서연이 말했다. 그녀는 뉴욕의 마천루를 떠올렸다. 수직의 도시, 명확한 그리드, 효율을 위한 설계. 그곳에서 준호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직선적인 삶, 바쁜 일정, 끊임없는 프로젝트 사이에서.
"그래서 그런가, 여긴 좀 다르게 숨 쉬는 것 같아요."
준호가 덧붙였다. 그의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공간이 사람의 호흡까지 바꾼다는 것. 서연은 그 말에 공감했다. 뉴욕에 갔을 때 그녀도 느꼈던 것이었다. 도시가 사람의 리듬을 결정한다는 것을.
"준호 씨는 뉴욕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어요?"
서연이 문득 물었다. 그녀는 준호의 실제 삶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가끔 전화로, 메시지로, 짧은 만남으로 알게 된 그의 삶이 아닌, 실제 그가 매일 살아가는 모습.
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이 멀리 바라보는 듯했다.
"바쁘죠. 사진 작업도 하고, 로케이션 디렉터 일이라는 게 현장에서 바쁜데, 또 항상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하는 거라서, 다음 마감, 다음 미팅... 그런데 가끔은 그 '다음'들 사이에서 '지금'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고백은 솔직했다. 자유롭고도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그에게 가져다준 만족감과 동시에 희생도 있었다. 서연은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녀 역시 출판계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바르셀로나에 왔어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그것인가요?'
라는 숨겨진, 하지만 분명한 질문.
준호의 눈이 서연을 향했다. 그의 시선은 깊고 따뜻했다.
"부분적으로는요.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죠."
그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갑자기 관광객 무리가 그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순간은 깨졌고, 그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저쪽으로 걸을까요?"
그들은 가우디의 리듬을 따라 걷다가 어느샌가 지도를 접고, 발길 닿는 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 골목이 다른 골목을 불러냈고, 햇살이 낮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 익숙하지 않은 돌길 위에 서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오래된 구역, 지도에도 자세히 나오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서연은 문득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불안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어떤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서연이 먼저 말했다.
"지금, 우리 어디쯤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안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마치 모험을 즐기는 어린아이 같은 톤이었다. 준호가 핸드폰을 꺼내다 말고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잠깐만요. 지도 꺼내기 전에 조금 더 헤매보고요."
그 말에 서연도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모든 것이 유머러스하게 느껴졌다. 이 순간만큼은 길을 잃는 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요. 길을 잃으면,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
서연의 말에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인생을 떠올렸다. 계획된 길, 예상된 여정,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예기치 않게 마주친 순간들. 어쩌면 가장 값진 발견은 길을 잃었을 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연 씨도 그런 적 있어요?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낀 순간."
준호의 질문은 갑작스러웠지만, 서연은 오히려 편안하게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있었죠. 그런데 나중에 돌아보면, 그 길 잃음이 결국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더라고요."
그녀의 말은 깊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준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듯했다.
"저도 그래요. 뉴욕에 처음 갔을 때도 길을 많이 잃었어요.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의미로도."
두 사람은 서로의 경험을 조용히 공유하고 있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이 단순히 방향을 잃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혹은 무언가를 찾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일. 예전의 서연이라면 불안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준호와 함께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이 변했기 때문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서연은 자신이 더 이상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로는 흐름에 맡기는 법도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또 한참을 걸었다. 좁은 골목과 넓은 골목이 번갈아 나타났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언덕을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며, 작은 광장을 하나 지나쳤고,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떤 순간, 준호는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처럼. 서연은 그 손길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접촉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계속 걸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풍경들이, 이날 따라 둘의 기억 안에 깊이 새겨졌다. 평범한 가게들, 일상적인 거리 풍경, 지나가는 행인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특별해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을 통해 바라볼 때, 세상은 다르게 보였다. 더 선명하게, 더 아름답게.
"길 잃는다는 게 뭔가 우리 같아요."
준호가 문득 말했다. 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면에서요?"
"계획하지 않았지만, 결국 어딘가에 도착했잖아요. 우리도 그런 것 같아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함께 있네요."
그의 말에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서연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준호와 자신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우연의 연속, 선택의 순간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그들은 정말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마침내 길을 찾은 것일까.
그들은 작은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외부 테라스에는 바람이 서늘했고,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테이블 위엔 하우스 와인과 간단한 타파스가 올랐다. 햇살은 이제 빌딩 사이로 주황빛을 띠며 기울고 있었다.
"사진, 오늘은 다 찍은 건가요?"
서연이 물었다. 그녀는 오늘 준호가 평소보다 카메라를 덜 꺼내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바라보는 대신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준호는 카메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기고 싶지 않은 순간이 아니라, 그냥… 지금은 담고만 싶어요."
그의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었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자신의 눈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달랐다. 서연은 그가 선택한 '현재'가 더 좋았다.
서연은 대답 없이 와인잔을 들었다. 와인 너머로 붉어진 하늘이 비쳤다. 그녀는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고 싶었다. 글로도,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순간의 온전함을.
"가끔은 경험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기록보다는."
서연이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감성적인 빛이 어려 있었다. 준호는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맞아요. 사진작가로서 말하기 민망하지만, 가끔은 셔터를 누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들 사이에는 이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는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오늘 길을 잃은 것처럼... 인생도 가끔은 길을 잃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서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너무 계획적으로, 너무 조심스럽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을 조금 더 믿고, 흐름에 맡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목적지를 정확히 알면, 여정의 즐거움을 놓치게 되죠."
준호가 덧붙였다. 그의 말은 서연의 생각을 완성시켜 주었다.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이어가며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있었다.
타파스를 나누어 먹으며, 두 사람은 점점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열정, 그리고 각자가 겪었던 어려움까지. 말은 자연스럽게 흘렀고, 시간도 그렇게 흘러갔다.
서연은 문득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본 적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생각했다. 그녀는 보통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준호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준호 씨는 어떻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걸까요?"
서연이 문득 물었다. 그녀의 질문은 솔직했다. 준호는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곧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가요? 사실 나는 서연 씨와 있을 때만 그렇게 느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조금 무뚝뚝하다고 해요."
그의 고백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준호가 자신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도 준호 씨와 있으면 평소와 다른 내가 되는 것 같아요. 더 솔직해지고, 덜 계산적이고..."
서연의 말에 준호는 깊은 이해의 눈빛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서로를 변화시키고,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그런 관계였다.
와인 한 병이 비워지고, 하늘은 더 깊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걸어 돌아오는 길. 길을 잃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해가 서서히 기울며 건물들 사이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주황빛 햇살이 골목의 돌담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조용한 광장 하나를 지나쳤고, 다시 고요한 돌담길이 펼쳐졌다. 서연은 어디쯤 걷고 있는지를 또 잊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좋았다.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이 아니라, 함께 걷는 길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