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조지오웰의 광장

by 강마레

바르셀로나 어느 늦은 오후.


좁은 골목길을 몇 번이고 돌고 나니, 갑자기 공간이 탁 트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 섰다. 발걸음을 멈춘 그 공간은 조용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다. 어제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길을 잃었다가 찾았던 광장, 그리고 그곳에서 나눈 약속과 같은 대화.


"여기… 광장인가요?"


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벽에는 어색한 모양의 조각상이 서 있었고, 한쪽에는 'Plaça de George Orwell'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조용한 오후의 햇살이 작은 광장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도착한 이 장소가 문학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 광장이에요."


준호가 표지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잔잔한 흥분이 묻어 있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쓴 그 오웰이요?"


서연이 물었다.


"고등학생 때 읽었는데, 당시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이상하게 인상적이었죠."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이 오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이 작은 공통점이 낯선 도시에서 더 가깝게 느껴지게 했다.


"1936년, 오웰은 여기 바르셀로나에 왔어요. 처음에는 기자로 왔다가, 결국 내전에 참전했죠."


준호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1984'나 '동물농장'만 기억하지만, 저는 '카탈로니아 찬가'가 더 마음에 와닿았어요."


"전쟁을 체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책이니까요."


서연이 덧붙였다.


바르셀로나의 바람이 조용히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준호와 서연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매미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골목의 소음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광장이 생각보다 소박하죠."


준호가 말했다.


"처음 왔을 땐 실망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마음에 들어요. 진짜 그가 살았던 곳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서연은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다른 명소들과 달리, 이곳은 진정성을 간직한 채 조용히 존재하고 있었다.


"오웰의 글은 늘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는 느낌이 있어요.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정확히 짚어내죠."


서연의 말에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문학적 통찰력을 보이는 서연에게 더 관심을 느꼈다.


"그래서 전, 오웰을 처음 접하고 나서 제 삶을 돌아보게 됐어요.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도 그게 진짜로 의미 있는 일인가? 그런 고민을 많이 했죠."


준호의 말은 단순한 대화를 넘어 자신의 내면을 조금씩 드러내는 것이었다.


서연은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주의 깊게 들었다.


"계속 글을 읽다 보면, 때론 글쓴이가 오히려 나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서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오웰이 그런 작가 중 한 명이예요."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광장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더 깊은 이해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저는 '1984'를 몇 번이나 읽었어요." 준호가 침묵을 깼다.


"특히 이 문장이 좋더라고요. '자유란, 두 더하기 두는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다.'

Freedom is the freedom to say that two plus two make four. If that is granted, all else follows."


"가장 단순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죠."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준호가 물었다.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르보다는 진실된 목소리가 있는 책이 좋아요. 작가가 쓰고 싶어서 쓴 책. 아무도 읽지 않아도 쓸 수밖에 없었던 그런 책들이요."


준호는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래서 편집자가 되었군요."


"네, 그런 책들을 세상에 내보내고 싶었어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열정과 동시에 어딘가 회의적인 면도 묻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이상과 달라요. 판매량, 마케팅, 트렌드... 점점 원래 하고 싶었던 일과는 멀어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죠."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엔 진실을 담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었는데, 뉴욕에선 점점 상업적인 작업만 하게 됐어요. 어느 순간부터 숨이 막히더라고요."


그의 말에서 서연은 준호가 가지고 있는 내적 갈등을 느꼈다. 성공적인 사진작가로서의 삶과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괴리. 그것은 그녀 자신의 고민과도 닮아 있었다.


"가끔 생각해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뭘까? 편집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글을 쓰고 싶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또 두렵기도 하고..."


준호는 서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진지함과 취약함을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


"뭐가 두려워요?"


"실패요. 그리고... 내 진짜 목소리를 찾지 못할까 봐."


준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저는 뉴욕에 있을 때, 한국어 책이 그리웠어요. 영어로만 글을 읽다 보니 모국어의 감각이 무뎌지더라고요.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를 담고 있으니까요. 서연씨가 뉴욕 떠나면서 줬던 한국책 오랜만에 자극이 되었어요."라고 말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 문학이 필요로 하는 건 당신 같은 사람이에요."


준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좋은 책을 알아보는 안목, 그리고 작가의 진심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 그런 사람이 편집자이자 독자로 있다는 건 한국어 사용자들의 행운이죠."


서연은 준호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준호의 말은 그녀가 잊고 있던 소명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그녀가 작게 말했다.


준호는 문득 자신의 카메라를 꺼냈다.


"여기서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서연은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준호는 서연이 아닌 광장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서연의 모습이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햇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그녀의 옆모습, 생각에 잠긴 눈빛, 가벼운 미소.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한 장의 사진보다 더 선명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준호가 물었다.

서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 지었다.


"오웰이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람블라스' 거리라고 해요. 거기 가볼래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함께 일어나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햇살이 점점 기울면서 거리에는 황금빛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때로는 겹치고, 때로는 멀어지며 바닥에 드리워졌다.


람블라스 거리는 활기찼다. 거리 예술가들, 꽃 노점상,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준호와 서연은 그 모든 것을 천천히 걸으며 감상했다. 간간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편안한 침묵 속에서 걸었다.


"이 도시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요."


서연이 말했다.


"여행을 많이 해봤지만, 바르셀로나는 달라요. 뭔가... 자유로운 느낌이 있어요."


"오웰도 그래서 이곳을 좋아했을까요?"


준호가 물었다.


"아마도요. 그는 자유를 갈망했으니까요."


두 사람은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와인 한 잔과 간단한 타파스를 주문했다. 햇살이 더 기울어지고, 거리에는 황혼의 분위기가 퍼져가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이 좋아요."


준호가 문득 말했다.


"낯선 도시, 좋은 음식, 그리고... 좋은 대화."


서연은 와인 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


"저도요."


그들은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웰에서 시작된 대화는 점차 그들 자신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뉴욕에서의 준호의 생활, 서울에서의 서연의 일상. 그들은 서로의 세계에 조금씩 들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어디 갈 예정이에요?"


준호가 물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요. 가우디의 미완성 작품."


"함께 가도 될까요?"


그 질문에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원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준호와 함께 했던 오늘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의 시선으로 바르셀로나를 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좋아요." 그녀가 마침내 대답했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람블라스 거리를 걸었다. 오웰이 걸었던 길, 그가 보았던 풍경, 그리고 그가 느꼈던 감정들을 상상하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그들은 다시 조지 오웰 광장을 지났다. 밤의 광장은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조용하고, 신비롭고, 그리고 어딘가 친밀한.


"오늘 하루, 고마워요."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저도요. 함께 오웰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르셀로나의 별들이 그들 위로 조용히 빛났고, 거리는 이제 한적했다. 서연은 준호의 눈빛에서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준호가 조심스럽게 서연에게 다가섰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 서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오늘 하루..." 준호가 말을 시작했지만 끝맺지 못했다.


서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망설임과 함께 강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그녀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준호의 손이 서연의 뺨을 감쌌다. 따뜻한 손길에 서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입술이 만났다. 처음에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하지만 서연이 준호의 셔츠를 살짝 잡아당기자, 키스는 더 깊어졌다.


그들의 키스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감정을 모두 담고 있었다. 서울에서 헤어지면서 나눈 마음이 이어졌다. 서로를 향한 그리움, 그리고 이제 마주한 진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의 세계 안에 있었다. 서울도, 뉴욕도, 마드리드도 없었다. 오직 그때, 거기, 그들만이 있었다.


준호는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연은 준호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고, 문이 닫히는 순간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더 깊게, 더 절실하게.


밤이 깊어갈수록 그들의 감정은 더 강해졌다. 서로의 손길, 숨결, 그리고 낮은 속삭임만이 어둠 속에서 흘렀다. 그들은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걱정과 고민을 잊은 채.


바르셀로나의 밤은 깊어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만남이 무엇으로 이어질지 그들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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