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다시 걷는 사람들

by 강마레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서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시 낯선 느낌에 어리둥절했지만,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은 어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웰의 광장에서 시작된 대화, 람블라스 거리를 함께 걸었던 시간,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함께한 밤.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서연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바르셀로나의 아침은 평온했다. 골목길을 오가는 현지인들, 커피를 들고 서두르는 관광객들. 서연은 자신의 마음을 살폈다.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평온했다. 마치 길을 잃었다가 정확한 지도를 찾은 것처럼.


객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호가 종이봉투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 살짝 땀이 맺힌 이마,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밝은 미소.


"일어났네요. 우리 아침 먹어요."


서연은 미소 지었다.


"어디 다녀왔어요?"


"근처 시장에 잠깐."


준호가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크루아상이랑 스페인식 오믈렛. 그리고 카페에서 직접 볶은 커피."


음식을 꺼내놓는 준호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서연은 그가 단순히 아침을 사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건 배려였고, 관심이었고, 어쩌면... 사랑이었다.


준호가 서연에게 커피를 건넸다. 손이 스치자 둘 다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 생각해 봤어요. 오웰이 쓴 글들 중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고요. '자유란 무엇인가를 행하는 자유가 아니라, 누군가 앞에서 진짜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다.'


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구절은 없는 거 같은데... 방금 만든 거죠?"


준호도 웃었다.


"들켰네요. 하지만 의미는 진짜예요. 당신과 있으면... 편안해요.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서연은 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마치 오래된 책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그들은 창가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바르셀로나의 아침 햇살이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크루아상 부스러기가 접시 위에 흩어지고, 커피 향이 방 안을 채웠다.


"우리 오늘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가요."


서연이 말했다. 준호는 미소 지었다.


"좋아요. 가우디의 걸작을 보게 되겠네요."


바르셀로나는 아침부터 더웠다. 그들은 호텔을 나서자마자 여름 햇살의 강렬함을 느꼈다. 거리는 활기찼다. 맛있는 빵 냄새, 길거리 악사의 기타 소리,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빛.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며 무지개처럼 바닥에 내려앉았다. 준호와 서연은 그 빛의 향연 속에 서 있었다. 어젯밤 나눈 깊은 교감이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을 만들어 놓은 듯했다.


"믿기지 않아요."


서연이 고개를 들어 높이 솟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이런 장소가 정말 존재한다니."


준호는 말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그의 렌즈는 성당의 아름다움이 아닌, 빛에 물든 서연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어젯밤의 친밀함 이후, 그녀의 모든 표정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경이로움에 입을 벌린 순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순간, 그리고 미소를 짓는 순간까지.


"가우디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대요."


준호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 기둥들이 나무처럼 위로 뻗어 있죠. 마치 숲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로 만든 숲이네요."


그들은 천천히 성당 내부를 거닐었다. 다른 관광객들과 달리,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하나의 기둥, 하나의 빛 조각, 하나의 색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눈빛만으로, 작은 손짓만으로 서로의 감상을 나눌 수 있었다.


"준호 씨는 어제 오웰의 세계를 들여다봤고, 오늘은 가우디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네요."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걸 좋아하나 봐요."


준호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요."


"그런데 정작 자신의 시선은요?"


준호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질문은 표면적으로 단순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그게... 내가 찾고 있는 거예요."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너무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담아왔어요. 가끔은 내가 뭘 보고 싶은지, 내가 뭘 말하고 싶은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서연은 그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편집자로서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를 돕는 동안, 자신의 이야기는 미뤄뒀으니까.


"준호 씨는 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물었다.


"처음에는... 순간을 붙잡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거든요. 특히 아름다운 것들이요."


그의 시선이 서연에게 머물렀다. 말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서연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두 사람은 천천히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가우디의 건축물은 여전히 미완성이었다. 이미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공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서연은 문득 그 의미를 생각했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걸까요?"


서연이 물었다. 준호는 그녀의 생각을 따라잡은 듯했다.


"가우디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이 성당이 완성되지 않을 걸 알았을 거예요. 그래도 멈추지 않았죠. 어쩌면 그게 진짜 예술가의 마음일지도 모르겠어요. 결과보다 과정을 사랑하는 거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준호의 손을 찾았다. 그들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얽혔다.


"우리의 여정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준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함께 걷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적어도 오늘까지는."


바다를 보러 갔다. 바르셀로나의 해변은 따뜻했고, 파도는 부드럽게 해안선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 앉아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야기해 볼래요?"


서연이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이야기요?"


"미루던 이야기. 우리에 대한."


준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마드리드로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서연 씨."


그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처음 이야기를 나누면서부터 당신에게 끌렸어요. 당신이 책을 고르는 방식, 작가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어요. 누군가가 내 작품보다 내 의도를 본다는 건 드문 일이니까요."


그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 다시 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뉴욕에서 당신이 떠날 때, 서울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또 이곳에서 다시 만났을 때, 준비가 안 됐어요. 말도 제대로 못 했죠. 그저...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준호가 망설였다. 그러다 결심한 듯 서연의 손을 꼭 잡았다.


"지금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만나기도 전부터요."


준호의 말에 서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자신도 같은 감정이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 마드리드로 가고, 나는 서울로 돌아가고..."


서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요. 이건 여행 중 만난 로맨스로 끝날 수도 있잖아요."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내 감정은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도 그렇지 않다고 믿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준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바다 내음과 함께 그의 향기가 서연의 코끝을 스쳤다.


"마드리드 프로젝트는 얼마나 걸릴까요?"


서연이 물었다.


"원래는 한 달 정도로 생각했지만, 진행 상황을 보니 좀 더 길어질 것 같아요. 3개월 정도?"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뉴욕에서 몇 가지 정리할 일이 있고요."


"그럼... 올해 안에 서울에서 만나기는 어렵겠네요."


준호는 서연의 손을 꼭 잡았다.


"겨울엔 서울에 갈 수 있을 거예요. 첫눈이 내릴 때쯤."


"정말요?"


서연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스며들었다.


"네. 사실... 서울에서 좀 더 머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어떤 의미예요?"


준호는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말했다.


"뉴욕에서의 커리어는 외형적으로는 성공적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점점 공허해졌어요. 다른 방향을 찾고 있었죠. 그러다 작년에 한국에서 온 제안을 받았어요. 서울에 작은 갤러리를 열고 사진 작업실도 함께 운영하는 거였죠."


"그걸 수락할 생각이었어요?"


"고민 중이었어요. 그러다 당신을 만났고... 이제는 결정했어요."


서연은 생각에 잠겼다. 준호가 서울로 온다면, 그들의 관계는 정말로 계속될 수 있을까? 여행의 마법 같은 감정이 일상에서도 유지될 수 있을까?


"겨울에 서울에서 만나게 된다면..."


서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때도 우리는 지금 같은 감정이 계속될까요?"


준호는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진짜 나 자신이 될 수 있어요. 그건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더 나다워지는 것 같아요. 더 솔직해지고, 더 용기를 내고 싶어 져요."


준호는 미소 지었다.


"그럼 약속해요. 겨울, 첫눈이 내릴 때 서울에서 만나요. 그때까지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되, 서로에게 정직하게 연락하며 지내요.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될 수 있을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요."


"좋아요."


서연이 대답했다.


"겨울에 만나요. 그때까지 우리 둘 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래요. 시간은 필요해요.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아요."


그들은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 해가 완전히 기울고 있었고, 지평선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언가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듯한 풍경이었다.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갔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지고, 바르셀로나의 밤이 찾아왔다. 준호의 마드리드행 기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 해요." 준호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요. 마지막까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들은 호텔로 돌아왔다. 준호는 짐을 챙기는 동안, 서연은 그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말없는 대화가 오갔다. 그것은 아쉬움과 기대, 그리고 약속으로 가득 찬 침묵이었다.


"이거,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준호가 작은 봉투를 건넸다. 서연이 그것을 열자, 그 안에는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찍은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오웰의 광장, 람블라스 거리, 사그라다 파밀리아, 그리고 빛 속의 서연.


"이 사진들은... 마치 우리의 여정을 담은 것 같아요."


서연이 속삭였다.


"그래요. 이건 우리의 기록이에요.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라는 약속이기도 하고요."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없이도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그런 시간.


"겨울에 만나요. 서울에서." 준호가 말했다.


"꼭 연락해요. 마드리드에 도착하면."


"그럴게요. 그리고 당신도 서울에 안전하게 도착하면 알려줘요."


마지막 순간, 준호는 조심스럽게 서연을 안았다. 그것은 짧지만 강렬한 포옹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서연의 말에 준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가 선택한다면요."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 준호는 마드리드행 기차에 올랐고, 서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 사이에는 아

쉬움이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서연은 그날 밤, 호텔 창가에 앉아 일기를 썼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순간이다.'


그날 밤, 서연은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했다.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던 두려움, 정해진 길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새로운 가능성도 발견했다. 준호와 함께 했던 시간들, 나눴던 대화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삶에 가져온 변화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창문이 갑자기 열리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 것 같았다.


'준호 씨가 정말 서울에 머무를까?'


그녀는 또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어떤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답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확신했다. 이 여행은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변화는 바르셀로나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역사적인 건물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한 사람, 우연히 만난 사진작가 때문이었다.


서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르셀로나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고, 도시의 불빛들이 마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녀는 이 도시를 떠나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겨울, 첫눈이 내릴 때쯤 준호도 서울에 오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은 그녀에게 묘한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오웰은 말했지.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미래를 만들 수는 있다고.'


서연은 천천히 일기장을 닫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준호가 준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그 사진들 속에는 그들의 짧지만 강렬했던 바르셀로나에서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추억은 이제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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